11화
긁적긁적.
손가락으로 볼을 긁었다.
진지하게 의심스러운 눈으로 창천비를 펼치는 용연을 쳐다봤다.
얼마나 신나게 달리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팡!
담영호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도약하며 순식간에 용연을 지나쳤다.
힐끔.
담영호가 뒤를 돌아봤다.
“선임, 제가…….”
용연은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기쁨을 알리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말을 끝까지 하진 못했다.
쉬악―.
담영호가 무지막지한 도약을 하며 십여 장 가까이 거리를 벌려 버렸기 때문이다.
“…….”
용연의 표정이 굳었다.
칭찬 한마디 해 줄 거라 여겼건만, 저런 냉담한 표정이라니.
“아! 아직 멀었다는 걸 알려 주시려고…….”
담영호의 모든 행동이 좋게만 보이는 용연의 해석이었다.
용연은 더욱 속도를 내 담영호와 거리를 좁히려 전력을 다했다.
“응?”
담영호는 거리를 벌린 후 적당한 자리에 서서 용연이 다가올 때까지 쉬려 했다.
그러나 자세가 잡힌 용연의 창천비는 그럴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뭐야, 내가 앞질렀다고 제 놈도 그러겠다는 거야?”
담영호는 미간을 모았다.
기뻐하긴 아직 이르다는 충고를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인데, 감히 자신과 대결을 하려 든다?
확실한 응징이 필요한 시점인 모양이다.
팡!
담영호의 신형이 엄청난 속도로 용연이 다가오는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럴 줄 알았어. 아무런 의심도 없이 넙죽 받는 게 아니었어…….’
용연은 담영호가 또다시 거리를 벌리자 울고 싶었다.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중인데 지금보다 더 쥐어짜 내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까닭이다.
짝!
양손으로 볼을 때렸다.
―연아, 힘들 땐 더 힘든 생각을 해. 여름이 아무리 더워도 대장간 화구만큼 뜨겁겠냐?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얼음물에 몸 담그고 들어간 것보다 춥겠냐?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환경을 이겨 내는 방법이다.
‘다리가 없는 사람은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 없다. 달릴 수 있는 놈이 왜 달리는 걸 걱정해!’
용연은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며 아버지의 엄한 표정을 떠올렸다.
자꾸만 거리를 벌리는 담영호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으면 되는 것이다.
마음을 정하니 다리도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억지로 보폭을 넓혀서 속도를 내려 하지 않고 편안하게 왼발과 오른발을 이용해 땅을 때리듯이 찼다.
‘내 발이 땅에 닿고 있어…….’
용연의 머릿속에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상념이다.
닿는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닿는 손에 밀착시켜 주고[際], 내뻗은 힘을 온전히 전해 주며[制], 마지막으론 원하는 방향으로 던질 수 있게[提] 해 준다.
삼제의 원리다.
생각은 곧장 몸으로 전해졌다.
왼발에서 시작된 기는 땅에 닿자마자 일 촌가량 뻗어 나갔다가 솟구쳤다. 아니, 솟구치려는 순간, 오른발이 그 위치의 땅을 때렸다.
통―.
용연의 신형이 일 장 가까이 떠올랐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삼제가 창천비에도 적용……돼!’
용연은 몸이 너무 가볍게 느껴져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억지로 속도를 내려 할 때는 그토록 힘들었던 동작들이 너무도 쉽게 펼쳐졌다.
통―.
조금 전에 느꼈던 감각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뒤로 일각 이상을 달렸지만 단 한 번도 땅에선 이전처럼 둔탁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히죽.
용연은 창천비를 삼제의 원리로 펼칠 수 있다는 사실에 날아갈 듯이 기뻤다.
쉬― 익―.
어느 순간, 용연의 귀로 바람 소리가 지나갔다.
‘이런 거구나.’
강호인들이 신법을 펼칠 때 어떤 기분인지 알 것도 같았다.
“휘유, 방향은 알려 준 것이나 마찬가지니 올 때까지 쉬어 볼……. 음?”
담영호는 아름드리나무에 등을 기대다 말고 자세를 바로 하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수평선 위로 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분명 용연이었다.
“쫓아왔다고?”
입술을 뚫고 흘러나온 혼잣말이다.
지난 열흘 내내 뒤뚱거리며 달리던 녀석이 잠깐 동안 자세를 교정해 준 것만으로 저런 속도를 내고 있다.
안정적인 자세와 더불어 일다경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까지 갖춘 채 말이다.
담영호의 가늘어진 눈은 용연이 다가올 때까지 커지지 않았다.
휘릭, 탁.
“선임, 늦었습니다.”
용연은 밝아진 표정으로 담영호의 앞에 내려섰다.
곧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지쳐보 이던 일다경 전보다 훨씬 힘이 넘쳐 있었다.
“창천비가 네겐 신법이 아니라 심법이라도 되는 것 같군. 아무튼 잘 맞는 것 같아 보기 좋다.”
“……심법요?”
용연은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대수롭지 않게, 반쯤은 장난으로 꺼낸 담영호의 말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달리는 동안 내공이 채워지고, 달리는 것 자체가 무공이 되는 신법. 이 정도는 돼야 최고…….
이전에 담영호가 해 주었던 말이다.
‘창천비를 삼제의 원리로 펼치는 동안 힘이 들지 않았던 이유가, 달리는 동안 내공이 쌓였기 때문일 수도 있는 건가?’
용연으로선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었다.
“심법이 뭔지 몰라?”
용연의 예상과 다른 반응에 담영호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압니다, 알고는 있는데…….”
용연은 떠오른 생각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머뭇거렸다.
“흠. 창천비가 심법같이 느껴진 모양이구나?”
“……!”
용연이 깜짝 놀라 담영호를 쳐다봤다.
자신의 생각을 콕 집어냈기 때문이다.
“신법 같은 경우, 자세만 제대로 갖췄을 뿐인데 마치 엄청난 변화라도 일어난 것처럼 들뜨게 만들지. 실제로 이전보다 훨씬 적게 힘을 쓰는데 훨씬 먼 거리를 달릴 수 있거든. 내가 군림단에 몸담은 십 년 동안 단 한 번 들었던 적이 있다.”
용연은 담영호가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의 얘기를 들려줄 줄 알고 동공을 확장시켰다.
“선임의 말을 너무 맹신한 나머지 자신이 익힌 창천비가 심법이라 확신하고 탈진할 때까지 달린…… 꼴통이 한 명 있었다.”
“아…….”
용연은 담영호에게서 기대에 어긋난 말이 나오자 머쓱해지고 말았다.
“두 번째가 돼서 창피하게 만들지 마라.”
절레절레.
담영호는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닌데…….’
용연은 차마 창천비를 펼치는 동안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말하지 못했다.
“아무튼, 창천비에 대해선 해 줄 말이 없을 정도로 좋았다. 그 감각, 평생 기억해 둬라.”
“예, 선임!”
용연의 대답은 담영호의 뒷말에 대해서였다.
창천비에 대해선 담영호의 평가를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았다.
창천비가 삼제의 원리와 결합된 순간의 느낌은 결코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존재하는 거대한 무언가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
삼제의 원리와 결합된 창천비가 준 느낌이다.
‘창천비처럼 삼제의 원리와 어울리는 무공이 더 있지 않을까?’
용연은 담영호를 쳐다봤다.
다음에 줄 무공을 미리 알고 싶다는 충동에서 한 행동이었다.
“…….”
“…….”
담영호도 용연을 보고 있던 중이라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담영호는 입맛을 다시며 소매 속으로 손을 넣었다.
‘주시려나?’
용연은 기대에 찬 눈으로 담영호의 손에 집중했다.
“자.”
담영호가 뭔가를 용연에게 건넸다.
“……아! 가, 감사합니다, 선임.”
용연은 담영호의 손에 쥐어진 것을 보고 잠시 동공이 흔들렸으나 재빨리 받아 들었다.
“알았다. 저녁엔 배가 부를 만한 걸 찾아보마.”
담영호는 말린 육포를 본 용연의 시선이 흔들리자 제대로 만든 음식을 먹고 싶다 여긴 것이다.
질겅.
용연은 육포 조각을 입에 넣고 씹었다.
창천비만 삼제의 원리와 잘 맞았을 수도 있다.
스스로에게 당부하듯 다짐했다.
‘선임이 주실 무공이 아닌 다른 무공에도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까?’
기대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미 다른 무공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를테면 주루 같은 곳.
***
‘원하는 장소에는 왔는데…….’
용연은 왁자지껄한 주루로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쓰며 주위를 둘러봤다.
“왜, 마음에 안 드냐?”
담영호는 용연의 표정을 보고 나가려 했다.
“아, 아닙니다, 선임. 너무 시끄러워서…… 아! 저 안쪽 창가로 가시죠.”
용연은 벽 쪽 창가를 가리키더니 안으로 들어가 담영호가 앉을 의자를 꺼냈다.
“빈자리가 여기뿐이라 넘어가지만, 여기가 이 층 전체를 통틀어 가장 시끄러운 곳이라는 건 알아 둬라.”
담영호는 자리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예.”
용연은 이래저래 미안한 마음이 들어 넙죽 허리를 숙였다.
“음식이나 시켜.”
“소면 두 그릇에 돼지고기 수육, 그리고 야채 볶음.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선임?”
“한 명 더 오니 소면 한 그릇과 두부탕도 주문해.”
“예? 한 명 더…….”
“외연(外緣)에서 온다.”
“외연…….”
“단을 지원해 주는 곳이다. 외연, 은타(隱他), 고람(考覽). 단원들을 도와주는 곳들이다.”
“단에서 운영하는 곳인가요?”
“운영? 단은 그런 건 하지 않는다.”
“그럼…….”
“필요한 걸 주고받는 관계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용연은 담영호가 귀찮아하는 것 같아 재빨리 입을 다문 채 세 곳에 대한 생각을 이어 가 보려 했다.
“네가 만날 준비를 할 필요 없으니 눈에 힘 풀어. 곧 보게 되니까.”
‘윽.’
용연은 또다시 생각이 들키자 재빨리 시선을 피해 주방 쪽을 돌아봤다.
화제를 돌리려고 점소이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뛰어다니는 점소이들은 아무도 자신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선임, 주문하고 뒷간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런 건 알아서.”
“예.”
용연은 얼른 대답하며 일어나서 주방 쪽으로 갔다.
점소이들은 여전히 주방에서 나온 음식을 나르느라 바빴다.
저들 중 누군가는 말을 건넬 거라 여기고 용연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소형제, 그렇게 있다가는 배곯기 딱 좋네.”
돌아보니, 사십 대 장한이 웃으며 다가왔다.
“주문하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자리가 어딘가?”
장한은 용연에게서 눈을 떼고 주루 안쪽을 둘러봤다.
“저쪽 창가 끝자리입니다.”
용연은 자리를 가리키며 무의식적으로 장한의 얼굴을 살폈다.
왼쪽 눈에 자상이 있었다.
“어? 저기 혼자 앉아 있는 분과 일행이신가?”
“예.”
“후후. 뭘 시킬 건지 물어봐도 되겠소?”
장한의 말투가 살짝 달라졌다.
“소면 세 그릇에 돼지고기 수육, 야채 볶음, 두부탕을 시키려고 합니다.”
용연이 막 말을 마쳤을 때였다.
“야!”
주방을 향해 장한이 호통을 쳤다.
용연은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주문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나와? 내가 직접 와서 언제 나오는지 확인하고 있어야겠어? 여기 주인 누구야? 주인 나오라고 그래!”
장한은 용연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 일부러 큰소리를 내신 거구나.’
용연이 장한의 의도를 알아차린 순간,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