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훙―.
압에 의해 공기가 먼저 닿자 머리칼들이 비켜 주며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건강한 피부와 흑요석이라도 박은 듯 빛을 머금은 눈, 굳은 심지처럼 곧게 내리뻗은 코, 그리고 앙다문 입술.
일이 년 후 남자로서 완성될 얼굴이 기대되는 십팔 세 청년, 용연이었다.
“……!”
용연은 쇠침 박힌 몽둥이가 더 가까워지기 전에 재빨리 고개를 숙여 피했다.
팟.
머리칼 몇 올이 잘리는 것이 느껴진다.
머뭇거려선 안 된다.
푹.
용연은 힘껏 발을 내디뎌 앞쪽 땅을 찍었다.
하체가 안정된 것을 느끼자마자 곧바로 상체를 회전시켰다.
홱.
턱.
회전과 함께 내뻗은 손바닥이 몽둥이 주인의 복부에 닿았다.
어깨부터 손바닥까지 일직선이다.
제제제(際制提), 합쳐서 삼제(三製)라 부른다.
하나씩 따로 떼어놓고 보면 수련이든 실전이든 쓸모라곤 전혀 없지만, 지금처럼 연계시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면 놀라운 일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닿는 손에 밀착시켜 주고[際], 내뻗은 힘을 온전히 전해 주며[制], 마지막으론 원하는 방향으로 던질 수 있게[提] 해 준다.
용연이 세 살부터 아버지로부터 아무런 시범 없이 홀로 터득한 흐름이다.
―연아, 삼제를 꾸준히 수련하면 언제고 네 몸 안에 뜨거운 것이 돌아다니게 될 게다. 이 아비는 먹고사는 것이 바빠 그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네 할아버지 때는 우리 용씨 가문도 제법 이름을 날렸더랬…….
용씨 가문의 몰락은 할아버지 대에서 시작됐다.
도박은 무공 고하,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이름 모를 어느 골목에서, 아버지에겐 빚을, 어머니에겐 화병으로 인한 죽음을 남겨 놓고 최후를 맞으셨다.
아들 하나 데리고 살아 내야 하는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유품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을 찾다가 얇은 책자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이 삼제였다.
아버지는 그날로 용연에게 글과 삼제를 가르쳤다.
본인이 익히지 않은 이유는, 어릴 때부터 무공의 무 자도 꺼내지 못하게 한 할아버지 때문에 무공을 익힌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용연에게 전해진 이유다.
꾸득.
밀착된 용연의 손에 힘이 실리자 사내의 몸통 안으로 뭔가가 밀려 들어갔다.
꾹.
다시 한번 힘을 주어 밀어 넣었다.
그러자 옷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사내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양옆으로 도망가는 것이 느껴졌다.
히죽.
용연은 자신의 공격이 성공했음을 알았다.
이제 마지막 흐름을 이용해 사내를 좌우 어느 쪽으로든 내팽개쳤어야 한다.
그러나 힘을 과하게 썼는지 팔이 떨렸다.
덜덜덜.
재빨리 긴장된 표정으로 사내의 표정을 살폈다.
꿀꺽.
사내는 여전히 몽둥이를 치켜든 채 험악한 얼굴로 용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 위험하…… 응?’
용연이 피할 궁리를 할 때, 멀쩡하던 사내의 동공이 미미하게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흔들―.
공격하려던 사내의 다리가 살짝 구부러진다.
‘지금!’
홱―.
빡!
용연의 정강이가 사내의 갈비뼈와 골반 사이를 파고들며 거칠게 소리를 냈다.
“큽.”
사내는 눈이 돌아가며 뒤로 넘어갔다.
쉭―.
“……!”
용연은 소리를 듣자마자 확인도 하지 않고 재빨리 우측으로 몸을 회전시키는 것과 동시에 세 걸음을 뛰듯이 움직였다.
쉬쉬―.
소리가 따라온다.
멈추면 죽는다.
콱.
용연은 세 걸음째 닿는 땅을 힘껏 밟으며 목을 파묻은 채 팔꿈치를 들어 회전속도를 높였다.
홱―.
퍽!
‘맞았다!’
팔꿈치가 제대로 꽂힌 느낌이 난다.
“끄악! 내 코!”
사내가 나가떨어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하아, 하아…….”
용연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자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순간,
쾁!
쓰러진 자의 가슴 위로 날카로운 빛이 꽂혔다.
‘거, 검?’
용연은 빛의 정체를 확인한 후 깜짝 놀라 자세를 낮추며 좌우를 돌아봤다.
빛이라고 착각한 것은 검이었다.
“누, 누…….”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선 말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연 것이다.
“괜찮나?”
사십 대 문사 차림의 중년인이 사내의 가슴에 꽂힌 검을 뽑으며 돌아봤다.
퓻.
검을 흔들자 피가 바닥에 뿌려졌다.
“……무, 물론입니다.”
용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사이 숨이 돌아와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그다, 철혈사자맹(鐵血獅子盟) 소속 일곱 개 지원조를 통솔하고 있는 전광검 이규.
이규는 용연에게서 눈을 떼며 주위를 둘러보다 용연이 날려 버린 사내와 자신이 죽인 사내를 번갈아 쳐다봤다.
뭔가 이상했던가?
이규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용연을 돌아봤다.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괜찮다면서 뭘 멍청히 서 있는 거야? 다른 동료들 위험한 거 안 보여?”
이규가 여전히 싸우고 있는 지원조들을 턱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예? 아아! 갑니다, 지금 당장 가, 가겠습니다!”
용연은 머리를 다급히 흔들고는 가장 가까이서 싸우고 있는 같은 조에 속한 동료를 향해 힘껏 내달렸다.
“이게 무슨…….”
이규는 황당해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두칠과 오건을 상대했다 여겼던 용연이, 어처구니없게도 근력만을 이용해 달리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절로 인상이 구겨지며 용연이 달려가는 방향 뒤쪽으로 눈을 돌렸다.
“헉! 저자는 자모간(刺毛干) 탁추!”
이규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용연이 탁추와 만난다면 죽고 만다.
서둘러야 했다.
막 몸을 날리려 할 때였다.
탁추에게 접근하는 인영이 있었다.
쾅!
폭음과 함께 양쪽으로 떨어진 두 인영.
이규는 탁추와 부딪친 자의 옷을 보고 반신반의하며 혼잣말을 뱉었다.
“군림……단?”
획.
조원에게 달려가던 용연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엄청난 폭음에 저절로 몸이 반응한 것이다.
“저, 저…….”
용연은 놀란 표정으로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인영을 쳐다봤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의 사내는 그 모습에 괴소를 터트리며 기뻐했다.
인영의 앞섬에는 ‘군림(君臨)’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파하하! 군림단의 실력도 별것 아닌데?”
탁추는 자신의 무기인 방패를 흔들어 보였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침 중 몇 개가 빠져 있었다.
‘군림단? 아!’
용연은 군림단이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가 탁추의 방패에서 빠진 침이 어디로 갔는지 알게 됐다.
“……기다렸던 거냐, 탁추?”
가슴에 박힌 쇠침을 빼낸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면? 내가 미쳤다고 이런 피라미들 사이에 껴 있을까. 그나저나 네 보호자 혼원륜(混元輪) 담영호는 어디 있지?”
“나는! 후우, 후우…….”
사내는 거칠게 숨을 여러 번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뭔가를 결심하려는 것 같다.
“군림단원 안명이다! 가운장 혈겁에 연루된 자모간 탁추, 혈타 무부, 철고목 기과, 셋을 벌하러 왔으니 순순히…….”
“기 형에게 맞은 건 다 나았냐?”
히죽.
탁추는 대놓고 비웃었다.
“닥쳐, 이 개자식아!”
얼굴이 붉어진 안명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쾅!
탁추의 방패가 뒤로 날아갔다.
“……?”
안명은 날아가는 방패를 쳐다보다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자신이 탁추의 방패를 날린 것이 아니라, 탁추가 스스로 방패를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움찔.
안명의 시선이 사방을 훑었다.
방패에 시선을 뺏긴 탓에 탁추의 움직임을 놓친 것이다.
쉭―.
‘아…….’
안명은 뒤쪽에서 들린 미세한 기척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돌아섰다.
“힘을 좀 더 뺐어야지. 그렇게 굳어 있어서야 죽일 맛이 안 나잖아? 카핫!”
기다리고 있던 탁추가 힘껏 주먹을 내뻗었다.
훙―.
퍼펑!
폭음과 함께 안명이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멀리서도 안명의 가슴이 피로 흥건해졌음을 알 정도로 옷이 붉어졌다.
‘저 사람이 군림단원이라고? 너무 약한 거 아니야?’
싸움을 지켜보던 용연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버지께 들었던 군림단의 위명은 저 안명이란 자의 무공 정도로는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쯧. 에구구, 군림단 때문에 숨은 돌리게 됐네.”
뒤쪽에서 다 죽어 가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용연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구해 주려던 동료가 천천히 다가오며 손을 저었다.
“괜찮아, 어차피 내가 알아서 움직일 생각이었어. 나 때문에 온 거면, 미안.”
사내는 검을 지팡이 삼아 땅을 짚으며 왔다.
“좀 더 일찍 오지 못해서 죄송해요. 그나저나 발을 다치신 겁니까?”
“응. 발, 목, 어깨, 등짝까지. 그래도 어쩌겠나, 이게 전부 느려터진 동료를 둔 내 죄인 걸. 끙…….”
“…….”
용연은 사내의 얄미운 대답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아, 미안해하란 소리는 아니니 그렇게 울상 짓지 말라고. 어차피 네가 도와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잖아, 신입?”
사내는 용연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깨까지 두드려 주었다.
“저를…….”
“알지. 지원조잖아.”
“…….”
이곳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지원조였다.
용연은 사내의 전신을 훑어봤다.
상체엔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었지만 다리 쪽은 옷이 멀쩡했다.
“이상하지? 그렇지 않아?”
“확실히 이상하네요.”
사내는 안명과 탁추의 싸움을 보며 물었고, 용연은 사내의 의심스러운 상태를 보며 대답했다.
“그치? 너무 허접하지?”
“예?”
“음? 너도 이상하다며?”
“저는…….”
용연이 사내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쳐다볼 때 사내가 용연의 어깨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입을 열었다.
“그거야! 군림단이 왜 저런 허접한 단원을 보냈을까?”
“아, 군림단원…….”
용연은 그제야 사내의 시선을 좇아갔다.
“음? 군림단을 알아?”
사내는 용연이 혼잣말로 웅얼거리자 힐끗 눈동자만 돌려 쳐다봤다.
“알죠. 서른 명으로 구성된…….”
“뭐? 서른? 큭큭.”
사내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용연을 쳐다보다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말해. 뭐든 다 아는 것처럼 굴 필요 없다고. 일단, 군림단이라고는 부르지만 아직 단주는 없어. 일 대 단주가 죽은 지 이백 년 가까이 된다고는 하는데, 왜 단주를 안 뽑는지는 다들 궁금해하지. 그리고 군림단원의 숫자는 원래 스물아홉 명인데…… 뭐야? 호응 안 해?”
“예? 아! 스물아홉 명이었네요.”
용연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렇지! 선배의 설명에 그 정도 호응은 있어야 말할 맛이 나지.”
사내는 히죽, 웃으며 용연의 어깨를 다시 한번 두드려 주고는 재차 말을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