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후에....
* * * * *
사막의 한쪽에서 붉게 타오르며 짙은 연기를 뿜어내던 불길이 사그러들고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재속에서 한 구의 유골이 그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화장이 끝난 유골을 꺼내서 모두 모은 후 무적이 몇 번 두드리자 뼛조각이 부서지며 고운 분골가루로 변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관자재보살!"
오랜 옛날 붉은사막을 가로질러 중원으로 향했던 구마라습이 한어로 번역했다는 반야심경의 한구절.
무적은 귓가를 울리는 이해할 수도 알아듣지도 못할 연화사태의 독경속에 분말가루를 작은 항아리에 담은 후 조심스럽게 신녀에게로 건넸다.
도저히 살아생전의 타말이라고는 믿기 힘든 작은 분골항아리.
그리고 그 분골항아리를 받아드는 신녀의 뇌리에 아버지를 화장할 당시에 들려주던 타말의 말이 떠오른다.
"한 번도 자신의 죽음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인간은 항상 죽음을 보면서 산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인간도 죽게 될 것이다."
그렇게 죽으면 그뿐인 인생에서 장례는 왜 치러야하는가?
죽은 자에 대한 예의에서....?
아니다!
장례는 남아있는 자를 위한 것.
떠나는 자를 보내야하는 준비를 하기위한 시간과 그 기억을 고이 간직하기 위한 것.
바로 남아있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할아버지....!
슬픈 미소와 함께 분골항아리를 꼭 끌어안는 신녀의 귀에 은근한 만리비개의 말이 들린다.
"상중에 죄송한데.... 신녀께서는 혹시 찾았습니까?"
무엇을 찾았는지 목적어를 생략한 만리비개의 질문에 신녀가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저는 찾지 못했어요.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는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사람의 눈으로는....? 그럼 다른 것으로는....?"
눈빛을 반짝이며 심각하게 물어오는 만리비개의 말에 신녀가 조용히 그를 보며 입을 연다.
"글쎄요.... 저로서도 그것까지는...."
"흐음....! 그렇다면 신녀께서는.... 신녀께서는 이제 어쩌실 겁니까?"
"돌아가야지요.... 부질없는 짓은 더 이상 없을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분골항아리를 가슴에 안은 채 처연하게 입을 여는 신녀의 말에 만리비개도 더 이상 말을 하지않고 살짝 고개만 숙여보인다.
그리고 이번에는 연화사태가 무적을 행해 입을 열었다.
"조 시주께서는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연화사태의 말에 무적이 힐끗 길게 이어진 사막길을 돌아봤다.
붉은 사막과 천산의 협곡 사이로 길게 이어진 하서회랑을 지나 가욕관을 넘게되면 끝없는 황무지가 자신들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그 황무지를 지나 만나게 될 신의 땅.
천축으로 가는 그 먼길을 이제 신녀와 함께 가야만한다.
그리고....
돌아와야하는 것일까?
아니.... 내게 돌아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약속한 것이 있어 그 일을 해야 겠지요...."
"그 일이란 것이 신녀를 모시는 일인가요?"
"글쎄요.... 일단은 천축까지 가기는 가봐야 하겠지요."
잠시 사막길을 돌아보며 말을 하던 무적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군자명의 얼굴을 쳐다본다.
군자명....!
일면식도 없던 그와 어떤 운명으로 얽혔는지는 몰라도 짧은 시간동안 잊을 수 없는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깊은 신뢰로 그리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진정한 동료로....
그리고 이제 그 깊은 교감을 더듬어볼 시간도 없이 또 이렇게 예기치 못한 이별을 한다.
"그동안 고마웠네...."
담담하게 나오는 무적의 말에 군자명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광마라는 자는 도대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를 따라 혈로를 걸었고 그와 함께 또다른 세상을 볼 수 있었다.
피와 죽음만이 난무하는 비정한 강호.
별로 유쾌하지 못한 기억이지만 이 인연은 자신에게 또 어떤 의미로 남을까?
"함께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가지 않아도 돼!"
이 인간이....!
고개를 획하고 돌리며 짧게 나오는 무적의 말에 군자명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진다.
그리고....
"한 번쯤.... 그곳에 들려줄 수 있겠나?"
마치 마음속의 그말을 하는 모습을 감추기위해 고개를 돌린 것 같은 무적의 모습에 군자명이 움찔 놀란다.
초혼산에 잠들어있을 길평과 임영영의 묘.
아내와 친구의 묘를 다시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광마의 모습이 어쩐지 애처러워 보인다.
"예.... 시간이 나면.... 아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들리겠습니다!"
"고맙네."
뒤에 남은 사람을 돌아보기위해 다시 고개를 돌리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무적이 뒤도 돌아보지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떼고 그의 곁으로 분골항아리를 안은 신녀가 조용히 따른다.
그리고 깡총거리며 신녀의 뒤를 따르는 새끼호랑이와 함께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며 빠르게 무적을 따르는 제갈식과 홍혜령.
"광마라고해서 얼굴에 피칠이라도 하고 다니는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군."
멀어지는 무적의 뒷등을 보며 만리비개가 중얼거리고 가종덕이 힐끗 만리비개를 훔쳐봤다.
저 인간이 미쳐서 날뛰는 꼴을 봐야 저런 말을 안하지....
입속으로 궁시렁 거리는 가종덕의 모습에 당풍호가 묘한 표정을 짓고....
"일심을.... 그 아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연화사태의 귓가로 무적의 전음이 들린다.
"아미타불....!"
마치 무적이 들으라는 것처럼 연화사태가 크게 불호를 외우고 길게 이어진 사막의 협곡을 따라 무적의 뒷등이 점점 멀어져간다.
* * * * *
만물이 잠든 것처럼 달빛만이 온 세상을 비추는 어둠속에서 넓디 넓은 황궁의 한쪽 구석에 자리한 커다란 전각의 문이 열리고 한 명의 노인이 걸어나오는 것이 보인다.
흐릿한 달빛아래 인적하나 보이지않는 주변을 살피던 노인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턱밑으로 한가닥의 수염도 보이지않는 늙은 얼굴이 그 모습을 보인다.
내시.
거세해서 수염이 나지않는 내시의 얼굴.
그리고 그 내시들 중에서도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쥔 자.
바로 동창태감의 얼굴이 흐릿한 달빛아래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뎐 동창태감의 손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앞으로 뻗어내는 동창태감의 팔뚝위로 벼락 같이 떨어져 내리는 한 마리 혈응.
꺄아악....!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피처럼 붉은 혈응 한 마리가 동창태감의 팔뚝위로 내려오고 태감이 혈응의 부리를 살짝 만져준다.
그리고 다리에 묶인 전서통을 풀어 편지를 읽기 시작하는 동창태감.
한참동안 편지를 읽던 동창태감의 얼굴색이 눈에 뛰게 번하고 살짝 흔들리는 손으로 팔을 떨쳐 혈응을 다시 날려보낸다.
푸드득....! 푸드득....!
힘찬 날개짓과 함께 혈응이 다시 하늘로 오르고 동창태감이 서쪽을 향해 깊게 허리를 굽힌다.
주인....!
자신의 주인이 죽었다는 전서.
누구에게라도 빌붙어 힘을 키우라는 주인의 지시에 따라 자신은 내시가 됐고 그렇게 주인을 위해 이제 최고의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이룬 지금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했던 자신의 주인이 죽었다!
언제라도 손만 내밀면 황궁을 바칠 수 있는 지금 자신의 주인이 죽었다.
곧 쏫아질 것 같은 눈물과 통곡을 속으로 삼키며 동창태감이 이빨을 악물었다.
하지만 주인에게는 후사가 있고 자신은 주인의 뒤를 이을 또다른 주인.... 새로운 목가의 가주에게 다시 한 번 절대의 충성을 바치면 된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 한 구석이 찢어지는 것 같은가?
동창태감이 애써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며 몸을 돌리고....
"태감께서는 혈왕궁의 사람이셨소?"
응....?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음성에 동창태감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고 달빛아래 서있는 군자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군자명....?
"군 교두께서는 어찌 이 시간에 이 금지에 들어온 것인가? 금군은 지시가 없다면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잊었는가!"
엄중하게 자신을 질타하는 동창태감의 말에 군자명의 시선이 까마득한 하늘로 날아오르는 혈응을 향한다.
그리고....
"천산에서 저 혈응을 본 적이 있었소. 바로 혈왕궁의 전서응인 대막혈응이었지요. 다시 한 번 태감께 여쭤보겠습니다. 태감께서는 혈왕궁의 사람이요? 아니면 혈왕궁이야말로 태감이 숨겨둔 힘이요?"
차갑게 뱉어내는 군자명의 말에 동창태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끝인가....?
광마와 함께 주인의 천라지망을 뚫어낸 자.
귀면탈과 강시는 물론이고 전설속의 혈영과 옹귀까지 물리친 자.
그리고 이제는 광마와 함께 짝을 이뤄 무림이마 武林二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검마 군자명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다.
저 벽창호가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 이곳에 왔다면....?
주인....!
살짝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는 동창태감의 눈에 하얀가면을 쓰고있는 주인의 모습이 보인다.
주인.... 저도 곧 따라 가겠습니다.
그곳에서는.... 배신도 탐욕도 없는 그곳에서는 주인의 종으로 곁에서 영원히 주인을 모시겠습니다.
환영처럼 떠오르는 하얀가면을 보는 동창태감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리고 입가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아....!
갑작스럽게 피를 토하는 동창태감의 모습에 군자명이 몸을 날려 태감을 안아들고 옅은 미소를 뛴 채 눈을 감는 태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빌어먹을....!
독을 삼키기전에 먼저 제압했어야 했는데....
너무 싱거운 결말에 군자명이 허탈한 심정으로 뒤를 돌아보고 언제 나타났는지 곡도혼이 조심스럽게 군자명의 곁으로 다가온다.
"이제 태감도 죽었는데 곡 내관께서는 어쩌실 거요?"
"글쎄요.... 이 황궁도 이제는 신물이 나는데 다른 곳으로 가볼까 합니다."
"다른 곳? 어디로 말이요?"
"요동 遙東!"
요동이라는 말과 함께 곡도혼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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