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4
* * * * *
두런두런 걸히는 천막밖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적과 신녀가 죽은듯이 누워있는 타말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런 두 사람의 안색을 살피는 홍혜령.
홍헤령의 눈에 별다른 표정의 변화도 없이 타말을 보고있는 무적과는 다르게 파르르 떨리는 얼굴로 타말을 내려다보는 신녀의 얼굴이 안스럽게 다가온다.
아니 파르르 떨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 커다란 두 눈에서 곧 눈물이라도 쏫아질 것만 같다.
"살릴 수 있소?"
담담하게 묻는 무적의 말에 홍혜령의 눈이 반짝이더니 살며시 고개를 젓는다.
죽는가....?
자신의 눈앞에서 타말이 죽는가?
비록 두 번의 죽음을 경험했던 무적이라지만 눈앞에서 타말이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과연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도왕동부의 사부가 말했던 바로 그 평화로운 영면일까?
아니면 자신이 겪어야 할 무간지옥과는 다른 또 다른 지옥이 타말을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 혹시라도 먼저 간 타미르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도 알지못하는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한 묘한 두려움에 무적이 고개를 돌려 신녀를 보고....
"깨울 수는 있나요?"
신녀의 입에서 떨리는 음성이 새어나온다.
"깨울 수는 있지만.... 예. 사실대로 말할께요. 지금 깨우게 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게 될 거예요. 그리고 깨운다고 한들 온전한 의식이 돌아올지도 알 수 없어요."
신녀의 말에 홍혜령이 힘겹게 입을 열고 신녀가 아랫입술을 꽉 깨문다.
그리고....
"이렇게 숨만 쉬며 누워있는 것은 궁주께서도 원치 않으실 거예요.... 힘들겠지만 깨워주시겠어요?"
복받치는 감정을 억지로 누느려는 것 같은 신녀의 음성에 홍혜령이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품속에서 작은 침통 하나를 꺼낸다.
그리고 뚜껑이 열리는 침통속으로 눈에 들어오는 눈부신 금침.
침통속에 한가득 들어있는 봉황금침을 꺼내든 홍혜령이 타말의 전신요혈중 몇군데에 금침을 놓기 시작한다.
발목옆의 족부태양경에서부터 시작해 회음혈을 거쳐 견정혈과 인중에 침을 놓자 타말의 몸이 움찔 놀란다.
생사침이라고까지 부르는 인중에 침을 놓자 그 고통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가?
잠시지만 인중에 꽂히는 침에 반응을 보이는 타말의 몸에 신녀의 두 눈에 혹시하는 빛이 떠오르고....
홍혜령이 마지막으로 천령개에 있는 천문혈에 깊숙히 금침을 찔러 넣는다.
그와 동시에....
움찔....!
죽은 시체처럼 누워있던 타말의 두 다리가 움찔거리며 힘겹게 타말의 두 눈이 열린다.
하지만....
촛점없는 타말의 두 눈.
흐릿한 타말의 두 눈이 무엇을 보는지도 모르게 촛점없이 빈 허공을 향한다.
조심스럽게 신녀가 타말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보지만 타말의 두 눈동자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철벽기가 뚫리고 타미르의 뇌음도에 공력이 깨지면서 풀려버린 천안통.
천안통이 풀리면서 평범한 노인의 눈처럼 흰자위와 검은 눈동자가 분명한 두 눈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신녀의 손에도 반응하지 못한다.
하아....!
미련이 남는 듯 몇 번이고 손을 흔들어보는 신녀의 모습에 무적이 나직한 한숨을 쉬고 울먹이는 음성으로 신녀가 입을 연다.
"궁주님.... 혹시 제 말 들리세요?"
신녀의 애처러운 음성에도 타말의 몸이 반응을 보이지 못하자 결국 신녀의 두 눈으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어린 소녀가 있었어요.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아버지의 손에서 자란 그 어린소녀에게는 할머니도 한 분 계셨어요. 소녀의 아버지를.... 아니 자신의 아들을 저주하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셧어요. 소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저주하면서도 소녀 자신은 끔찍히 아끼는 할머니가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어요. 그래서 소녀는 할머니의 말은 그것이 무엇이던 모두 시키는대로 했어요. 혹시라도 소녀도 할머니의 눈밖에 나서 할머니로부터 미움을 받을까 두려워서 할머니가 하는 말은 모두 외우고 항상 귀담아 들었어요. 그리고 할머니는 그 어린소녀에게 항상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해주셨어요. 매일 매일 잊지말라며 하루도 거르지않고 해주셨어요. 궁주님.... 제가 그 이야기를 지금 해드려도 될까요?"
넋두리처럼 입을 연 신녀가 의식도 없는 타말에게 묻는다.
그리고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는 타말.
오히려 무적과 홍혜령이 의아한 눈으로 신녀를 쳐다본다.
자신의 이야기인가....?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드릴께요. 옛날에 아주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인이 한 명 있었어요. 그리고 그 여인에게는 사랑하는 정인이 있었고요. 천하애 명성이 자자한 집안의 아들인 여인의 정인은 그 아름다운 여인의 정인으로 한치의 부족함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뛰어난 학식에 고매한 인품 그리고 아름다운 용모까지.... 참으로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소리가 부끄럽지않은 그런 천하의 기남아였어요. 그리고 그 기남아에게는 항상 그가 자랑하는 형도 있었고요. 동생보다 절대 못하지 않은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뛰어난 그의 형도 두 사람의 사이를 축복하며 세 사람은 오누이처럼 정말로 사이가 좋았어요. 하지만 호사다마랄까 그의 형은 언제부터인가 더이상 진전이 없는 자신의 무공과 학문에 깊은 좌절에 빠지고 바로 그 시점에서 자신보다 빨리 한계를 극복한 동생에게 심한 시기와 질투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예.... 심마의 장난이었지요. 아니면 그들 두 형제를 시샘한 신의 장난이었는지....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아름다운 여인과 동생은 서로 혼인을 약속하고 그때까지도 심마의 벽을 뚫지 못한 그의 형은 결국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질렀어요. 여기까지는 궁주님도 아시는 이야기일 거예요. 그래요.... 궁주님의 이야기예요. 그날밤 궁주님은 그 아름다운 여인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동생의 정혼녀를 찾아가 해서는 안될 죄악을 범했어요. 그게 시기이던 아니면 욕정이던 그 무엇이 그런 짓을 시켰던 궁주님은 해서는 안될 죄악을 저질렀어요!"
길게 이어지는 신녀의 이야기를 타말이 듣고 있는가?
무적의 눈에 힘없이 늘어져있는 타말의 손이 살짝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어....?
"그리고 그날밤 여인을 보고싶어 그녀의 집을 찾은 동생은 찢어진 옷으로 겨우 몸을 가리고 울고 있는 자신의 정혼녀와 발가벗은 몸으로 넋이 빠져버린 자신의 형을 봤어요. 그는 두 사람의 모습에 분노했지만 상대는 자신이 존경하던 자신의 형.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범한 사람이 자신의 형이었기에 그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돌아서버렸고.... 그 모습에.... 더러워진 자신을 버려두고 떠나는 사랑하는사람의 뒷모습에 여인은 절망했어요. 힘이 없어 욕을 본 자신이 무슨 죄가 있다고.... 어떻게 된 거냐고 한 마디 묻지도 않고.... 괜찮느냐는 위로의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나고 한 마디 말도 없이 등을 돌려버리는 동생에게.... 아니 자신에게 욕이라도 하던지 아니면 자신이 정표로 준 그 뇌음도로.... 항상 주위에 자랑하며 다니던 그 뇌음도로 벌거벗은 자신의 형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멱살 한 번 잡아보지않고 등을 돌려버리는 정인의 그 차가운 모습에 아름다운 여인은 절망했어요.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던 저 얼굴이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형이 저지른 죄악의 대가를 자신에게 덮어쒸우고 저렇게 등을 돌려버린다. 차라리.... 차라리 자신을 더러운 년이라 욕하며 죽이기라도 하던지.... 그래요. 그렇게 절망한 여인은 결국 집안의 우물로 몸을 던졌고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감정이 격해지는지 신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타말의 얼굴을 쳐다본다.
하지만 여전히 촛점없는 두 눈동자와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않는 창백한 얼굴.
하지만....
무적의 눈빛이 반짝였다.
억지로라도 움직이기위해 힘을 주려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니 자세히 봐도 분간하기 힘들만큼 미세하게 꿈틍거리는 손가락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하늘은 아직도 그들 형제와 그 아름다운 여인에게 하던 장난을 멈추고 싶지않았던지 거의 미친 것처럼 울부짖으며 형이 그곳을 떠나자 이번에는 그들의 아버지가 그곳으로 왔어요. 그래요.... 그날은 그녀의 시아버지가 될 그분의 생일. 평소 사치를 멀리하고 생일상 한 번 받지않던 미래의 시아버지를 위해 그녀가 그분을 초대했던 날이었어요. 자신이 손수 지은 밥한끼를 대접하기위해.... 그녀가 가장 잘만드는 죽 한 그릇을 드시게 하려고 그들의 아버지를 집으로 초대했던 거예요. 그리고 평생 처음으로 생일상을 받기위해 며느리가 될 여인의 집으로 왔던 시아버지는 죽어있는 며느리의 모습을 보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거 알아요....? 물에 빠져 잠시 숨이 멎어도 사람은 그때 바로 죽지는 않아요. 순간적으로 폐에 물이 차 숨을 쉴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숨을 쉴 수 있도록 누군가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폐에 찬 물을 뱉어내며 다시 숨을 쉴 수가 있어요. 우물에 떨어질 때 입었던 몇 군데의 외상은 남겠지만 다시 살아날 수.... 아니 죽지않고 살 수 있다고요! 하지만 그때 궁주님께서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두려움에.... 자신의 모습을 본 동생과 우물에 몸을 던진 여인에 대한 죄책감에 반쯤 미쳐서 뛰쳐나가버렸고.... 그 죽어가던 여인을 궁주님의 아버지가 그녀의 시아버지가 됐어야 할 그분이 구해주셨어요. 그리고 모든 일의 전말을 알게된 그분은 그녀를 멀리 떨어지 비뉴슈의 신전에 숨겨서 살게했는데.... 몇 달이 지나자 그녀의 몸에 변화가 생겼어요. 그녀의 배가 점점 불러온거죠. 그 저주받은 밤에 궁주님이 저지른 죄악으로 그 아름다운 여인은 새생명을.... 죄악의 씨앗을 잉태하게 된거죠. 몇 번이나 죄악의 씨앗을 지우려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않자 결국 여인은 신전을 떠났고 어는 허름한 움막에서 자신의 아들을 낳게 됐어요. 자신의 배로 나았지만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원수의 자식. 그 여인은 자신의 아들을 안아줄 수도 젖을 물려줄 수도 없었어요. 그렇게 버려둔 아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그 여인은 자신을 범한 형과 자신을 버린 동생을.... 그렇게 그 두 형제를 저주하면서 살았어요. 그리고 어느날 아들의 아내가 딸을 낳았어요. 어미를 잡아먹고 나온다는 살모사처럼 어린 소녀를 낳던 소녀의 어머니는 산고에 목숨을 잃고 그렇게 어머니의 젖은 커녕 어머니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소녀가 태어났어요. 그리고 소녀의 할머니는 한맺힌 그 여인은 어린소녀에게 항상 말했어요. 자신을 범하고 또 자신을 버린 그 형제들. 그리고 자신을 방치하고 두 아들을 돌본다는 핑계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그들의 아버지. 그래요. 그들 부자들을 모두 죽여야한다고.... 아니 세상의 모든 비극과 죄악은 인간이 저지르는 것. 이세상의 모든 인간을 없애버리라고 아야기했어요. 그리고 어느날 할머니는 물론이고 아버지까지 모두 잃고 천애고아가 된 소녀의 앞에 할머니를 범한 그 자가 찾아왔어요"
잠시 말을 멈춘 신녀가 슬픈 눈으로 타말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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