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록-148화 (148/158)

천괴성 天怪星 2

* * *

혈뇌의 눈에 올망졸망 모여있는 신녀와 군자명의 일행이 보인다.

그리고 자신이 주술로 깨워낸 시체들을 일순간에 가루로 만들어버린 신녀의 신력.

세상 모든 마물의 상극이라는 대자재천의 광휘가 그 모습을 보였다.

"성가시네....!"

자그맣게 중얼거린 혈뇌가 빈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고 흐릿한 안개 같은 것과 함께 귀영이 나타나 한 자루의 활을 혈뇌에게 건넨다.

고루궁.

까마득한 옛날 묘수천장이 죽은 사람의 뼈를 손질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한 개의 각궁.

천하칠데기병중 고루라고 불리는 활을 받아든 혈뇌가 한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건 후 천천히 당긴다.

지이익....!

팽팽하게 당겨지는 활시위의 끊어질듯한 소리와 함께 고루궁의 활대에 양각된 고루의 형상이 활을 쥔 혈뇌의 왼손을 물어뜯을 것처럼 바짝 다가오고....

혈뇌의 시선속으로 당풍호와 군자명의 틈 사이로 보이는 신녀의 오른쪽 어깨가 들어온다.

그리고....

신녀의 품속에 안겨있는 한 구의 시신.

힘없이 사지를 널어뜨리고 있는 무적의 모습이 보인다.

광마....?

한무더기의 실타래처럼 엉망으로 얽혀버린 이 모든 일의 발단과도 같은 자.

동태기의 그 하찮은 정념때문에....

아니.... 애초에 동태기가 확실하게 마무리를 짓지 못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이 저 괴물 같은 인간을 너무 가벼히 봐서 진즉에 손을 쓰지 않은 탓으로....

손안에 들어왔던 신녀를 놓치고 결국 자신의 아내가 죽었다.

아니.... 자신의 아내뿐만이 아니라 초일과 예당 등 믿었던 자신의 수하들도 죽었다.

피를 나눈 혈육보다도 소중했던 오랜 가문의 종들이 저 광마의 손에....

짜증스럽게 찡그려지는 미간과  함께 신녀의 어깨를 겨누고 있던 혈뇌의 활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와 신녀의 품에 안겨있는 무적의 등을 향한다.

이미 죽었더라도 한 번 더 죽어라!

살며시 입술을 깨물며 고루궁의 시위를 팽팽하게 당겨내던 혈뇌의 손가락이 살짝 떨어지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걸려있던 한 개의 화살이 시위를 떠난다.

티잉....!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돌아가는 야릇한 소리와 함께 시위를 떠난 화살이 표적을 뚫고....

한 개의 화살에 꿰뚫린 신녀와 무적의 몸이 뒤로 넘어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모두 가라!"

담담한 혈뇌의 말과 함께 수를 헤아리기도 힘든 귀면탈이 그 모습을 보이고....

크르르....!

짐승 같은 괴성과 함께 군자명의 일행을 향해 몸을 날린다.

* * *

"신녀....?"

신녀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군자명의 눈에 신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한줄기 반짝이는 빛이 보인다.

뭐지....?

정확히 신녀의 눈동자에 떠오르는 반짝임의 실체를 알지 못한 군자명이 의아한 눈으로 신녀의 눈동자를 자세히 쳐다보고....

퍽!

갑작스럽게 들리는 묵직한 파육음과 함께 무적의 등을 뚫은 화살 하나가 신녀의 가슴까지 꿰뚫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피잉....!

쓰러지는 신녀의 모습과 함께 공기를 가르는 화살의 파공성이 들리고 귓가를 스쳐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이 느껴진다.

화살이 무적과 신녀의 몸을 관통하고 나서야 들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몸이 쓰러진 후에야 느낄 수 있는 화살의 기운.

하지만 소리마저 제압해버리는 엄청난 화살의 위력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쓰러진 신녀의 모습.

이건 또 뭔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군자명이 선뜻 믿기지 않는 상황에 쓰러진 신녀를 향하지 못한 채 멍한 얼굴로 화살이 날아온 등 뒤를 향해 몸을 돌리고....

까마득한 산길의 아래에서 활을 거두며 양손을 아래로 내리는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그 형체만 어렴풋이 보일 것 같은 노인의 모습이지만 군자명의 눈에는 분명 그 노인의 얼굴까지 또렷히 보인다.

하얀백발에 가슴까지 내려온 탐스런 수염.

그리고 백발백염의 신선 같은 풍모를 가진 노인의 뒤로 그 모습을 보이는 귀면탈.

혈왕궁....?

도대체 세상천지 어디에서 저 많은 실혼인들을 모았다는 말인가?

사람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너무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면 오히려 그 상황을 체념하고 마음을 비우게 된다고 했던가?

무적이 죽고 이제는 신녀까지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자신들 앞에 그 모습을 보이는 혈왕궁의 마물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하나씩 그 실체를 보여주기 시작하는 혈왕궁의 힘에 군자명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저 먼 거리에서 소리마저 제압하는 엄청난 활을 쏘는 노인과 귀면탈.

거기에 더해서 저들의 뒤로는 또 누가 나타날까?

옹귀....?

아니면 혈영일까?

크크크....!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무적이 죽었는데....

신녀가 저렇게 화살을 맞고 쓰러졌는데....

더 나빠질 것이 또 뭐가 있다고....

노인의 뒤로 산아래를 가득 메우던 귀면탈의 무리가 몸을 날려 자신들을 향하는 것을 보면서 군자명이 몸을 돌려 신녀에게로 다가갔다.

당장 죽지는 않았지만 가슴을 뚫고 있는 화살이 고통스러운 것처럼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여전히 무적을 놓지안고 꼭 껴안고 있다.

아니.... 두 사람의 몸을 하나로 엮어놓은 화살때문에 이제는 놓을 수도 없는 것인가?

"건딜만 합니까?"

도대체가 이 싱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뚱맞은 군자명의 말에 신녀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래도 여기까지가 우리의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는 신녀를 향해 군자명이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그리고 감탄한 것 같은 눈으로 군자명과 신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가종덕과 당풍호.

혈왕궁이 다시 나타나고 신녀가 쓰러졌다.

그런데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이 긴박한 상황에서 오히려 평소보다 더 침착해보이는 군자명과 고통스러운 상처를 애써 감추려는 신녀의 모습에 적잖이 놀란다.

그리고....

"곡 내관....!"

누구를 부르는지도 모르게 담담하게 나오는 군자명의 말과 함께....

"말씀하십시요."

산길 옆의 숲을 헤치며 하늘거리는 걸음으로 곡도혼이 나타난다.

"곡 내관.... 부탁이 하나 있소."

"그런 부탁은 하지 마십시요!"

담담하게 운을 떼는 군자명의 말을 곡도혼이 단호하게 잘라버린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시는 거요?"

"이미 이 산 일대는 천라지망으로 포위돼 있습니다. 이제는 저희들도 저 여인을 데리고 천산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신녀를 데리고 천산을 내려갈 수 없다는 곡도혼의 말에 군자명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그리고 가종덕을 향해 눈길을 돌리는 군자명.

"가 대협....! 개방은 언제 올 수 있는 것 입니까?"

"이 넓은 천산산맥의 어느 구석에 우리 방주가 쳐박혀있을지...."

자신도 알 수 없다는 듯이 가종덕이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들의 시야에 커다랗게 다가오는 귀면탈의 모습.

조그만 점처럼 보이던 산길 아래의 귀면탈이 어느새 산길의 중턱까지 올라온 것인지 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빠르게 몸을 날리는 귀면탈의 두 손에 끼어진 세갈래로 갈라진 갈퀴손의 반짝이는 날이 두 눈을 자극하고 군자명과 세 사람이 귀면탈을 마주보며 돌아선다.

그와 함께 유령처럼 그들의 뒤로 모습을 보이는 일 백의 주작단.

그런데....!

드드드드....!

은은하게 발 밑을 자극하는 땅의 울림이 느껴진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산의 울림에 군자명의 일행이 흠칫 놀라고....

이건....?

드드드드.....!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지는 산의 울림과 함께 희미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두두두두....!

점차 커지는 소리가 무엇인가가 다가온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요란스럽게 떨리는 발 밑의 감각과 함께 산아래쪽으로부터 짙은 흙먼지가 일어난다.

그리고....

두두두두....!

짙은 흙먼지를 뚫으며 그 모습을 드러내는 요란스러운 소리의 정체.

벼락 같은 소리를 내며 빠르게 산길을 향하는 수백 필의 말이 나타난다.

그리고 마상에 보이는 두터운 털가죽옷을 입은 무인들.

저마다 번뜩이는 한 자루 창을 한손에 쥐고 빠르게 말을 몰아오는 자들의 선두에 높이 치켜세운 깃발 하나가 보이고....

서량무적 천외목장 西粱無適  天外牧場!

장성너머 서량땅의 대초원을 지배한다는 마씨세가의 깃발과 함께 약간은 우직해보이는 마호길의 모습이 네 사람의 눈에 들어온다.

" 저 인간이....?"

마호길의 모습을 확인한 당풍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종덕의 입에서 통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으하하하하! 마호길! 마호길! 내 일전에 저 인간을 보고 다시는 상종 못할 벽창호라 욕했건만 이제보니 군 교두 보다는 낫구만! 확실히 군 교두 보다는...."

통쾌한 웃음과 함께 한껏 흥분해서 떠들던 가종덕이 흠칫 놀라며 슬며시 군자명을 돌아보고....

그런 가종덕의 모습에 왜 자기보다 저 말탄 산도적 같은 인간이 더 낫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 눈만 말뚱거리는 군자명과....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을 보며 쓴 웃음을 짓는 곡도혼.

에라이 천하의 벽창호야!

좀 나아졌나 했더니 이제는 천하무림까지도 네가 벽창호라는 건 다 알고 있구나!

두두두두....!

빠르게 질주하는 천외목장의 기마대가 산길을 뛰어오르는 귀면탈의 무리들을 향하고 귀면탈의 후미에 있던 자들이 천산을 울리는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에 뒤를 돌아본다.

두려움도 어떤 감정도 없는 반인반시 半人半屍의 마물들 앞으로 뜨거운 입김을 뱉어내는 짐승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충돌.

꽝!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막아서는 귀면탈을 부수며 귀면탈의 무리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천외목장의 기마대.

짐승과 마물의 충돌속에 갈퀴손을 휘두르기위해 손을 드는 귀면탈의 가슴이 말발굽에 밟히고....

부딪치는 짐승의 강한 다리에 마물의 몸이 튕겨져 나간다.

빠각!

튕겨져 날아가는 마물의 머리가 기마대의 말발굽에 부서져 터져나가고....

강하게 몰아치는 기마대의 힘에 산길을 가득 메운 귀면탈의 무리가 둘로 갈라진다.

두두두두....!

빠르게 귀면탈의 무리를 가르며 산길을 올라온 기마대가 다시 방향을 틀고....

이번에는 올라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귀면탈의 무리를 향해 쏫아져 내려간다.

그리고 그 빨라진 속도만큼 더 강력하게 부딪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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