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록-143화 (143/158)

생과 사 生과 死7

"당연히 없겠지요. 우리는 고작 치졸한 명분이니 원한이니 하는 것에 움직이는 그런 자들은 아닙니다."

"그럼.... 그런 명분이나 원한이 아니라면 그대들은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군자명의 말에 번활리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연히 황금이지요. 세상에 유일하게 그 존재가 분명한 것은 당연히 황금이 아니겠습니까?"

"황금....? 그렇다면 누가 그대들에게 나를 죽여달라는 청부를 넣었다는 말인가?"

"당연히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움직인 것이겠지요...."

능글맞다는 표현이 적절할만큼 여유롭게 답하는 번활리의 말에 군자명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렇다면.... 나를 죽여달라고 청부를 넣은 자가 누군지 물어봐도 되겠니?"

어쨌던 군자명은 나라의 녹을 먹는 군관의 신분이고 자신들은 아무런 벼슬이 없는 일개 야인이기에 번활리는 하대를 쓰는 군자명의 말에 꼬박꼬박 존재로 대꾸한다.

"뭐.... 이제는 말해줘도 상관 없겠지요. 혹시 우가장이라는 곳을 기억하시는지....?"

"우가장....?"

우가장이라는 말에 군자명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도육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우가장이라면....?

아....!

문득 망가진 얼굴로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어린 여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한순간의 분기를 참지못해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을 무참히 부숴버렸던 그날의 기억.

망가진 얼굴을 한채로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어린 여인의 모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우미랑이라고 했던가....?

한순간의 의기를 참지못하고 저지른 행동이 이렇듯 은과 원이라는 형태로 예기치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것인가?

삶이라는 것이.... 인과라는 것이  과연 이런 것인가....?

"그런데 살수들은 청부에 실패해 죽음을 직면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청부자의 신분만큼은 밝히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왜 내게 청부자의 정체를 알려주는 것인가? 설마 내가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다는 생각에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인가?"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은 청부를 넣은 그 어린아이도 그리고 그 아이의 애비되는 자도 모두 죽어버려서 이제는 별 의미가 없어서.... 그보다 군교두께서는 이 숲으로 들어오실 수 있겠소?"

번활리와 함께 두 노인이 슬쩍 몸을 움직이며 능선옆으로 울창하게 이어진 숲을 가리켰다.

그리고....

"곡 내관! 내가 들어가야하오?"

"아닙니다."

뜬금없는 군자명의 말과 그 말에 응답하는 가느다란 음성하나.

응....?

번활리와 두 노인이 깜짝 놀라 숲을 돌아보고....

크아악....!

크악....!

조용하던 숲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노인을 향해 빠르게 몸을 날리는 군자명.

수유일검도.... 다른 어떤 절기도 필요없다.

단지 빠르게 다가가 빠르게 찌르는 군자명의 검에....

피윳!

피윳!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채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번활리와 부윤이 목을 움켜잡으며 쓰러지고 동막주 공손락이 빠르게 뒤로 몸을 날린다.

하지만....

뒤로 몸을 빼는 공손락의 앞으로 곡도혼이 내려서고....

커다란 관 같은 물건이 곤손락의 몸을 향해 날아온다.

그리고....

펑!

갑자기 쇠북 터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산산히 찢겨져 사방으로 날리는 공손락의 몸.

뭐야....?

고기를 잘게 짲어놓은 것처럼 잘려나가는 공손락의 몸뒤로 곡도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 곡도혼의 모습이 아니라 그의 몸을 가리고 있는 커다란 물건이 하나 보인다.

마치 관짝처럼 넓은 도신을 가진 한 자루의 칼.

도신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 곡도혼의 몸을 모두 가려서 그의 몸이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크악!

마지막 비명인듯 울리는 비명과 함께 소란스럽던 숲속에 다시 정적이 내린다.

"주작칠호! 내 검을 챙겨라!"

공손락의 몸을 찢어놓았던 곡도혼이 차갑게 말하며 자신의 커다란 검을 숲을 향해 던진후 군자명을 향해 가볍게 두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숙인다.

"군 교두! 약속대로 삼대살문의 살수들을 모두 처리했으니 이제 이산을 내려가 황도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게 검이었어....?

하지만 군자명은 곡도혼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처럼 멍하니 곡도혼이 검을 던진 숲을 바라봤다.

기형적으로 커다란 검.

도저히 상상도 해본적이 없는 검이다.

"도대체 방금 보여준 곡 내관의 그 검은 뭐요?"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보며 묻는 군자명의 모습에 곡도혼이 쓰게 웃었다.

꽉막힌 벽창호에 천하의 고집불통.

황도에 있는 금군들이 군자명에 대해서 내리는 평가다.

아니.... 황도에서 황궁의 물을 조금이라도 먹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군자명에 대해서 그렇게 말한다.

정말 융통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꽉막힌 인간이라고....

하지만....

변했다.

이 꽉막힌 벽창호가 변했다.

서슴없이 자신들과 연수해서 살수들을 제거하는 것도 그렇고 또 다소 비겁해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살문의 문주들을 향해 기습적인 공격을 했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황도로 가자는 자신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자신의 검에 대해서만 묻는다.

능글맞아진건가?

아니면 정작 중요한 말을 뒤로 미루고 상대의 마음을 흔들어볼 정도로 심기가 늘었다는 것인가?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괴검 怪劍이라고...."

"괴검....?"

괴검이라는 말에 군자명의 눈살이 파르르 떨린다.

그옛날 조상이 무림에 남긴 칠대기병중의 하나인 괴검.

사실 칠대기병이니 팔대신병이니 하는 것은 모두 묘수천장이 정존 목계공을 위해 만든 물건이었다.

불사의 마신이라 불리던 혈마와의 단 한번의 승부를 위해 묘수천장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서 수많은 무기를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괴검은 괴이하다는 말 그대로 검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괴상한 물건이었다.

혈영의 폭혈공을 막기위해서 전신을 가릴 수 있을만큼 넓은 검신을 가진 검.

칠대기병의 다른 병기들은 그래도 지난 천년간 간간히 세상에 그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괴검은.... 정존 이후에 단 한번도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아 이제는 천하의 그 누구도 괴검의 진실한 실체를 알지 못했다.

단지 상리를 벗어난 제법 큰 검이라는 것 외에는....

그런데 그 괴검이 지금 동창의 밥을 먹는  하급내시의 손에서 그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조상인 묘수천장이 세상에 남긴 신기.

그리고 군자명은 이곳 천산에서 이미 조상이 남긴 절음종을 봤다.

그리고 이번에는 괴검을....

세상의 인연이라는 것은 이렇게 그 끈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는 것인가?

"괴검을 동창에서 가지고 있었던 거요?"

"아닙니다. 동창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천년전 정존의 시신을 모시고 황도로 온 묘수천장께서 당시의 황궁에 숨겨둔 것이 국조가 바뀌어가며 몇 개의 국조에서 황궁의 보물로 전해져오다 얼마전 제가 황궁무고에 우연히 들어갔을 때 그 물건을 발견하고 가지고 나온 것 이지요...."

"황궁무고에....? 그대들은 황족도.... 번왕도 아닌데 어떻게 황궁무고에....? 설마....?"

군자명이 정색을 하며 곡도혼을 노려보고 곡도혼이 멋쩍은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동창의 권력이 황제를 등에 업고 있으니...."

"황제라니? 폐하를 어찌 그렇게 부르는가?"

"군 교두! 설마 진정으로 모르십니까? 당금 황궁에서 무관들은 국위공을 문신들은 동창태감에게 충성한다는 것을! 허울뿐인 황제의 위엄은 이미 땅에 떨어지고 없소이다. 오로지 황사께서 황도에 버티고 천하의 무관들이 황사이신 국위공을 존경하기에 황제의 자리도 보전하는 것 아닙니까? 그나마 국위공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이미 천하는 동창태감의 손에 있다고해도 해도 무방하겠지요. 그리고...."

"그리고....?"

"태감은 호시탐탐 국위공을 노리고 있습니다."

아버님을....?

자신의 아버지가 군문에 몸을 담은 그 순간부터....

아니 재기발랄한 젊은 무장들과 함께 북방의 이민족들과 치뤘던 그 치열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그날부터....

황도의 많은 문신들이 아버지를 시기하고 노렸다는 것은 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창.

황제를 손에 넣고 천하를 주무르는 이 절대권력에게 아버지는 항상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키운 그 많은 무장들.

번방은 물론이고 천하각지에 웅크리고 있는 그 막강한 군부의 힘을 꺼리기에 동창도 수많은 권신들도 자신의 아버지를 함부로 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당금의 동창태감이 아버지를 노려....?

"무슨 소리요?"

"동창태감이 내게 밀명을 내렸소. 강호로 나가서 상관을 폭행하고 다니는 군 교두를 황도로 불러들이라고....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로 단순히 상강의 법도를 어긴 군 교두를 불러들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금군도독에게 황명으로 지시를 해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금군도독이 태감의 지시를 따른다는 보장은 없지만.... 굳이 저를 강호로 내보내지 않고도 금군에 압박을 가하는 것 만으로도 분명히 군 교두께서는 황도로 돌아오실 것 입니다. 그런데 저를 보냈습니다. 그것도 주작단의 동창살수 일백 명과 함께.... 왜 그랬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군 교두를 죽여주기를 원한거지요. 아니면 우리가 군 교두의 손에 죽거나.... 만약 태감의 의도대로 군 교두께서 우리 손에 죽임을 당한다면 어떻게 되겠소? 그 범 같은 군 교두의 영존께서.... 황제가 아버리가고까지 부르며 궤와 장을 하사한 국위공께서 저를 살려둘까요? 그리고 제가 국위공의 손에 죽게 된다면 그때는 어땋게 되겠습니까? 사사로이 아들이 죽은 것 때문에 동창의 관원을 살해한 국위공께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엄연히 나라에는 국법이라는 것이 있고 국위공께서 당장의 화를 당하지는 않겠지만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국가의 존망을 지켜낸 국위공의 명성에 흠이 가는 것은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군 교두, 단단한 항아리는 물을 붓는다고 쉽게 깨지는 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금이 간 항아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항아리에 붓는 물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서 깨어진 틈새로 물이 새어나오다 결국 깨어지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이지요. 반대로 우리가 군 교두의 손에 죽어도 마찬가지 아닐까요?국위공께서 죄지은 자신의 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국법대로 벌을 준다면 당장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부귀영화와 권세를 버리지 못해서 자식까지 죽인 사람으로 이야기 될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된다면.... 그때가서 누가 있어 권력에 눈이 멀고 부귀영화를 탐해서 자식까지 죽인 국위공을 따르겠습니까? 권력앞에 자식까지 버리는 사람에게 과연 누가 진정으로 충성을 다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국위공께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국법을 어긴 반역자가 되겠지요. 이렇든 저렇든 동창의 태감이 군교두를 노리는 이 시국은 국위공께도 절대의 위기라고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군 교두께서 저희들을 죽이지도.... 또 저희들의 손에 죽지도 않고 지금 두발로 걸어서 황도로 돌아가는 것이.... 그래서 강호에서의 일을 소상히 밝히는 것만이 그 불알없는 늙은 변태의 술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