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과 사 生과 死6
응....?
갑작스럽게 몸을 멈추는 가종덕이 모습에 당풍호가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의아한 듯 묻는 당풍호의 말에 가종덕이 등에 업고있는 무적의 몸을 바짝 당기며 울창한 숲의 입구를 가리켰다.
뭐야.... 우리보다 빨리....?
자신들이 뚫고 지나가려는 숲이 전면에 조용히 선 채 그 모습을 보이는 한 명의 노인.
하얀 유생건을 쓰고 티 한 점없이 깨끗한 백색의 장삼을 입고있는 한명의 노인이 눈에 들어온다.
도저히 이 험한 천산산맥의 깊은 곳에서 이렇게 만나서는 안되는 모습이다.
저 하얀 옷과 유생건이 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올때까지 먼지 한 점 묻지 않았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앞에 저렇게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우리를 기다리는 자다!
사자보가 아니라면 이번에는 또 누굴까?
굳어진 얼굴로 당풍호와 가종덕이 노인을 향해 천천히 다가서고 마치 오래된 벗이라도 만난 것처럼 기쁜 얼굴로 노인이 두손을 맞잡으며 포권을 해보인다.
"반갑습니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개방의 비호 철각선풍개 가 대협을 이 험지에서 만나뵙게 되다니 이 늙은이가 말년에 복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이 늙은 필부는 번활리라고 합니다."
번활리....?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번활리의 말에 당풍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가종덕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인문제일좌 무영살....?"
"오! 천하의 가 대협께서 고맙게도 이 늙은 필부의 이름을 아시는군요?"
마치 자신이 이름을 알아주는 가종덕이 고맙기라도 하다는 것처럼 번활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당풍호의 얼굴은 종이조각처럼 구겨져버린다.
인문제일좌 무영살.
천하무림에는 음지에서 굳은 일을 해주는 자들이 있다.
백주대낮에는 남의 눈이 두려워 하기 힘든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
대문파에서 비밀리에 그런 일을 시키기위해 직접 키우는 자들도 있고....
따로이 자신들만의 세력을 만들어 대가를 받고 활동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해야만하는 일이란 것은 의례 그렇듯이 살인, 방화, 납치 그리고 온갖 모략으로 두 개 이상의 세력이나 사람들을 이간질시켜 서로 원수가 되게 하는 그런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살문 殺門.
세상사람들이 흔히 살문이라고 부르는 이자들은 타인을 위해서 또다른 타인을 죽여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다.
그리고 천하에 산재한 이 수많은 살문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위치에 있는 자들.
천하는 그들을 십대살문이라고 불렀다.
청부를 받은 이상 대를 이어서라도 반드시 대상을 제거하는 악마 같은 자객들.
황금을 대가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인간백정.
그 인간백정과도 같은 십대살문 중에서도 혈옥과 함께 수위를 다투는 자객집단.
바로 인문 忍門이다.
그리고 지금 당풍호의 눈앞에 서있는 저 인상좋은 늙은이가 바로 인문의 제일좌.... 강호무림에서 무영살이라고 부르는 인문의 문주다.
"기가 막혀서....!"
당풍호는 마치 뒷간에 앉아서 볼일을 보다말고 주저앉은 것 같은 기분으로 다시 한 번 번활리의 얼굴을 쳐다봤다.
설마 저 천하의 살문마저도 검왕의 유급을 노리고 이곳까지 온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요. 기가 막히지요. 이 늙은 필부도 고작 청부대상 하나를 제거하기위해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따라다닐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청부대상....?
청부대상 하나라는 말에 당풍호가 흠칫 놀라며 신녀와 군자명을 돌아봤다.
무적과 이들 중 과연 누가 청부의 대상인가?
"그래서....?"
누가 인문의 청부대상인가 하는 당풍호의 궁금증과는 다르게 가종덕은 등에 업고 있는 무적을 바짝 당기며 차갑게 물었다.
그리고....
"한 사람만 남겨두시고 가시면 됩니다. 저희들은 천하제일대방과도 당문과도 원한을 남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희들이 일이지요. 어쩼던 사람이 일은 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사람.... 저 금군의 교두만 남겨두시고 가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희들은 절대로 가 대협과 당 대협의 앞을 막지도 뒤를 쫒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
당연히 무적을 노리고 왔으리라 생각했던 군자명은 오히려 인문의 표적이 자신이라는 말에 멍해져버렸다.
그리고 차가운 콧웃음과 함께 입을 여는 가종덕.
"흥! 아무리 이 험한 산속에 홀로이 떨어져있다고해도 인문따위에 내가 꽁무니를 말 것이라고 생각하나?"
"인문 따위가 아니지요."
차가운 가종덕의 말에 번활리가 자그맣게 웃고 번활리의 뒤쪽으로 두 사람이 나타난다.
"안녕하십니까. 비호대협과 사천의 표풍수 대협을 이렇게 보게되니 반갑기가 더할 나위 없습니다. 저는 혈옥염왕 부윤이라고 합니다."
붉은 옷으로 전신을 감싼 노인이 정중하게 포권을 해보이고 거친 마의를 입은 노인이 뒤이어 인사를 한다.
"이 늙은이는 작은 촌락을 책임지고 있는 공손락이라고 합니다. 천하의 열두 가문중 당문의 직계와 개방의 일대제자를 뵙게되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혈옥 血獄....? 동막 動幕....?"
두 늙은이의 인사와 함께 가종덕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새어나오며 군자명을 돌아봤다.
너 도대체 언제 무림에 나왔다고 이들과 얽힌 것이냐는 듯한 표정.
그리고 가종덕의 황당한 얼굴에 군자명도 멍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마도육문이 자신을 노리고....?
그와 함께 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자신이 귓가를 건드리는 가느다란 전음하나.
--- 군교두, 하나만 약속해주십시요. ---
응....?
가느다란 전음에 군자명의 두눈이 동그래지고....
--- 이들만.... 이 살수 나부랭이들만 처리하고나면 황도로 돌아간다고.... 그 약속만 해주신다면 이들은 우리가 처리해주겠소. ---
곡도혼....?
만불동에서 만상미리진에 갇힌 채 헤매고있던 곡도혼과 주작단의 살수들을 봤다.
정치적인 목적에.... 그리고 동창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 고관대작이나 군문의 무관들을 암살해온 자들.
비록 주작단의 면면은 알 수 없었지만 동창의 위세를 등에 업고 황궁을 활보하던 곡도혼의 모습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황궁으로 돌아가라고....?
--- 곡 내관이 뜻이요? ---
--- 아니지요. 제가 어찌.... 당연히 동창태감의 뜻입니다. ---
동창태감....?
한낱 종사품 무관에게 동창태감이 관심을 갖는다고....?
설마 아버님을 감시하는 것인가?
--- 이지들을 처리할 수 있겠소? ---
--- 우리는 그들의 은신을 볼 수 있고 그들은 우리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교두께서 승낙만 하신다면.... ---
살수들이 두려운 것은 그들이 음지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어둠속에서 날아오는 살수들의 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때에 날아오는 검.
그 암습에 명가의 고수들도.... 천하에 명망이 자자한 검호도 허무한 죽음을 당한다.
그런데....
주작단은 저 살문의 살수들이 은신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살문의 살수들은 주작단의 살수들을 보지 못한다.
그 단순한 차이때문에 주작단이 살수들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삼대살문의 살수들을 없앨 수 있다.
그리고 살수들 중에 드물게 고수라고 부를 수 있는 자들.
지금 눈앞에서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인문과 혈옥 그리고 동막의 주인은 자신이 직접 해결한다.
곡도혼의 전음과 함께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한 군자명이 힐끗 당풍호를 돌아봤다.
그리고....
웃음.
도저히 군자명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라고는 믿기 힘든 야릇한 웃음이 군자명의 얼굴에 떠오르고....
"당 대협 그리고 가 대협. 먼저 가십시요. 최대한 빨리 이들을 처리하고 두분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군 교두....?"
먼저가라는 군자명의 말에 가종덕이 놀라서 군자명의 이름을 부르고 당풍호의 눈빛이 묘해진다.
최대한 빨리 자신들을 따르겠다고....?
곤혹스럽기는 해도 자신들이 삼대살문의 살수들에게 쉽게 당할 턱은 없다.
하지만 살수들의 특성상 숨어서 움직이는 그들을 가볍게 처리할 수도 없다.
그리고 끊임없이 숨어서 자신들을 괴롭힐 그들을 상대하는 동안 자신들의 뒤를 쫒아올 사자보는....?
일만의 무인이라는 숫자는 결코 가벼히 볼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베고 베고 또 베면서 끝없이 베어도 자신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낼 그 일만이 무인들.
그들이 얼마나 고수인지 또 얼마나 용맹한가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살수들과 얽혀있다가 그들에게 꼬리를 잡힌다면....?
그래서 다시 일만의 고수들에게 포위된다면....?
지금 생사를 헤매는 광마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최대한 빠르게 홍혜령에게 데려간다고 해도 살릴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데 사자보의 무인들에게 포위라도 된다면....?
분명히 차가운 이성이 먼저가라는 군자명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뜨거운 가슴이 군자명을 이곳에 홀로 남겨두고 가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저 웃음.
저 야릇한 미소는 또 뭔가?
고지식하고 꽉막힌 벽창호 같은 인간의 얼굴에 떠오른 저 미소는....?
천하의 모사꾼이 사악한 계교를 쓸 때나 나타날법한 야릇한 미소가 웃음이 아닌가?
설마....?
"가종덕! 이곳은 군교두에게 맡기고 우리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
"이 여우새끼야! 어떻게 사지에 사람을 버려두고 간다는 말이냐?"
"네가 이곳에 남아있는 것이 오히려 군교두에게는 걸림돌이 된다. 내말을 믿고 빨리 가자. 군교두, 우리는 지금부터 능선을 타고 산을 내려가겠소. 말하신대로 최대한 빨리 따라와주시오."
버럭 자신에게 화를 내는 가종덕을 무시하며 군자명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인 당풍호가 먼저 몸을 날리고 가종덕이 황당한 얼굴로 군자명을 돌아봤다.
"한번쯤 저를 믿으셔도 됩니다."
쳇!
믿지않으려해도 믿지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담담한 군자명의 얼굴.
한치의 흔들림도 보이지않는 군자명의 모습에 이번에는 가종덕이 고개를 돌려 삼대살문의 문주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는 그들을 노려본 후 몸을 날리는 가종덕.
뭔가....?
당가 여우새끼가 저 벽창호 같은 인간에게서 도대체 무엇을 봤길래....?
멀어지는 가종덕의 뒷등에 매달리듯이 업혀있는 무적의 두 팔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의식이 없는 듯.... 아무런 기운도 없는 듯 가종덕의 등에 시체처럼 업힌 채 흔들리는 무적의 두 팔.
전신의 혈관이 터져 피멍이 든 두 팔이 왠지 서럽게 다가온다.
조무적.... 내가 죽지않는 한 반드시 너를 구민차의 주인에게 데려다준다!
지긋이 어금니를 깨문 군자명이 다시 고개를 돌려 삼대살문의 문주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는 그대들과 아무런 은원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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