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록-124화 (124/158)

신녀와 마녀 神女와 魔女8

만류귀종 萬類歸終.

세상 모든 무공이 지향하는 궁극의 경지가 바로 심검....

즉, 의형수형 意形隨形의 경지라면....

그 경지로 가는 첫걸음은 바로 초식이라는 형식의 탈을 벗고 자유로움을 찾아가는 것이다.

당연히 그 형태가 서로 비슷해보이는 것이 뭐가 이상할까?

그리고....

초식의 한계를 벗어난 타말의 도법이 구첩만월의 그것과 비슷했다면....

그 초식의 굴레를 벗어버린 자신의 구첩만월은 또 어떤 모습일까?

무적의 눈빛이 반짝이고....

미끄러지듯이 일남일녀를 향해 몸을 움직인다.

지금까지의 무적에게서는 보기힘들었던 유령 같은 신법과....

피윳!

가볍게 사선을 그리는 파천일도 破天一刀에 혈수와 소수가 마주 날아온다.

쩡!

세 개의 손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강하게 뒤로 밀려나는 일남일녀.

그리고....

사르륵....!

풀잎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뒤로 밀려나는 여인의 머리결이 길게 늘어나는 것이 보인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늘어난 여인의 머리카락이 무적의 목을 감아오고....

피윳!

빠르게 움직이는 무적의 칼에 여인의 머리카락이 감긴다.

그리고....

강하게 자신을 당기는 머리카락의 힘에....

스윽....!

마치 자신의 칼을 잡고 있는 머리카락이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무적의 칼이 움직이고....

티틱....!

야릇한 소리와 함께 팽팽하게 당겨진 실타래가 끊어지는 것처럼 여인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간다.

상대의 혈수와 소수를 밀어내던 무적의 칼이 자신의 목을 조여오던 혈영의 긴머리카락을 잘라내고....

다시 방향을 바꿔 일남일녀를 향하는 순간....

티잉!

야릇한 소리와 함께 잘려져 날리던 여인의 긴 머리카락이 쇠로 만든 강침처럼 꼿꼿이 서며 무적의 등을 향해 날아온다.

흥!

싸늘한 콧웃음과 함께 앞으로 나가던 무적의 칼이....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등뒤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부처의 광휘처럼 떠오르는 도벽.

가볍게 등으로 돌아간 무적의 칼에서 도벽밀밀의 초식이 펼쳐지고....

날아오는 머리카락이 무엇엔가에 막힌 것처럼 허공으로 튕겨날아간다.

탕! 탕! 탕!

빠르게 등뒤로 돌아온 칼이 날카롭게 쏘아져오던 머리카락을 막아내고....

쇳조각이 튕겨날아가는 소리 속에서....

아....?

무적의 눈에 자신의 가슴에 닿는 두 개의 하얀 손이 보인다.

언제 다가왔는지 보지도 못한 사이에 빠르게 자신의 가슴에 닿는 혈영의 소수와....

등뒤에서 자신을 노리는 머리카락을 막아내는 칼을 앞으로 당길  여유도....

몸을 움직여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 피하지 못하면 죽을 거냐?---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도왕동부의 사부가 했던 말이 머리속을 울린다.

망할 영감 같으니라고.....

무적이 자신의 가슴을 때리는 소수를 똑바로 보고....

자신의 가슴에 닿는 하얀 두 개의 손을 향해 몸속의 기운이 움직인다.

쩡!

크윽....!

무적의 가슴에 닿는 소수에서 마치 쇠벽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부서질 것 같은 가슴의 통증과 함께 무적은 한 걸음을.... 여인은 주루룩 몇 걸음을 뒤로 밀려난다.

"반탄강기 反彈强氣....?"

깜짝 놀라는 여인의 경악성과 함께....

턱!

무적이 뒤로 밀리는 몸을 멈추고 빠르게 여인을 향해 몸을 날리고....

피윳!

또 다시 사선을 그리는 무적의 칼.

그리고....

빠르게 파천일도를 향하는 혈수와 소수가 무적을 칼을 막는다.

하지만....

쩌르릉!

갑자기 울리는 쇠구슬 소리와 함께 칼을 따라 나타나는....

보름달?

아니.... 칼의 궤적을 따라 어린아이의 주먹정도 크기의 구슬이 수십 개 나타난다.

칼을 따라 나타난 야명주처럼 반짝이는 구슬이 혈수와 소수를 지나 일남일녀를 향하고....

퍽! 퍽!

묵직한 소리와 함께 일남일녀의 몸을 뚫고 지나가는 구슬.

그리고....

가볍게 구슬의 뒤를 따르는 무적의 칼과 함께....

서걱!

두 개의 하얀 손이 피를 토하며 허공으로 떠오르고....

서걱!

갈라지는 여인의 가슴과 함께  잘려져 허공으로 솟구치는 남자의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건가....?

초식의 굴레를 벗어던진 구첩만월의 모습이....?

파천일도의 초식으로 빠르게 사선을 그리던 칼이 만월도를 펼쳐내고....

평소의 만월보다는 작은 구슬 같은 것이 나타났다.

만월보다 빠르고 자유롭게 사방을 움직이는 작은 구슬 같은 도기.

새로운 만월도의 경지에 무적이 잠시지만 야릇한 황홀경에 빠진다.

하지만....

응....?

자신의 무공에 야릇한 희열을 느끼던 무적의 눈에....

두 팔이 잘리고 가슴이 갈라진 여인과 목이 잘려나간 남자의 몸이 물이 가득찬 주머니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퍼엉!

찢어지듯 터지는 몸과 비산하는 피와 살.

그리고 빠르게 날아오는 뼛조각에 무적의 칼이 다시 움직이고....

피윳!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구슬이 무적의 전신을 휘감는다.

치지직....!

무적의 전신을 감싼 구슬의 벽에 부딪친 핏줄기와 살점에서 무엇인가 타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허공에 머물렀던 피와 살점의 파편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살점과 핏물이 떨어진 바닥의 풀에서 불이난 것처럼 짙은 연기가 올라오고....

그 순간 살짝 흔들리는 만월도의 도기속을 헤짚으며 한줄기 기운이 무적의 옆구리를 건드린다.

윽....!

불로 지지는 것 같은 충격에 무적이 비틀거리며 몇 걸음을 물러서고....

아직 완벽하지 않은가?

짧은 순간의 깨달음으로 초식의 한계를 극복해낼 수는 있었지만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무공에 조그만 헛점이 있었고....

그 작은 틈을 뚫고 상대의 뼛조각이 자신의 옆구리를 관통해버렸다.

인상을 찡그리며 왼쪽 옆구리를 내려다보는 무적의 눈에 찢어진 옷 사이로 뼛조각이 뚫고 지나간 작은 구멍이 보인다.

그리고 순식간에 검게 변해버리는 상처 주위의 살가죽과 찌릿찌릿하게 울리는 감각.

독....?

무적이 흠칫 놀라고....

갑자기 자신의 몸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청량한 기운이 올라온다.

그리고 그 청량한 기운과 함께 죽은 것처럼 검게 변했던 살갖이 원래의 색을 되찾는다.

공청석유....?

신녀의 손에 구해졌을때 온몸으로 빨아들였던 공청석유가....

전신의 혈맥과 근육에 숨어있던 공청석유의 기운이 부시독 腐屍毒의 기운을 몰아내고 구멍난 상처를 치료한다.

하아....!

이래저래 맹노와 신녀의 신세를 갚기는 해야....

* * * * *

얇은 철판으로 만든 비구를 양팔에 찬다.

그리고....

기다란 가죽끈을 비구의 위로 돌리고 단단히 묶는다.

탕! 탕!

초일이 양팔에 두른 비구를 서로 부딪쳐보고....

작은 천막을 나와 커다란 천막으로 들어갔다.

"주인....! 다녀오겠습니다."

초일이 등을 보이며 앉아있는 혈뇌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혈뇌의 몸이 돌아선다.

그리고....

혈뇌의 얼굴에 씌어져 있는 하얀 가면.

군데군데 옅은 핏자국이 보이는 하얀 가면이 초일의 눈에 들어오고....

"굳이 직접 가볼 생각이냐?"

"주인께서 가지 말라시면 가지않겠습니다. 하지만...."

왠지 주인의 뜻에 거스리는 것 같은 생각에 초일이 말을 흐리고....

하얀 가면이 말없이 초일을 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뜻을 거스린 적이 없던 초일이....

그 초일이 저 깊은 산으로 직접 들어가려한다.

신녀를 데려오겠다는 것은 핑계일뿐....

결국은 그 광마라는 자를 만나기위해....

도대체 그 광마의 무엇이 초일의 부동심 不動心을 흔들었을까?

"혼자 갈거냐?"

"청색검기 靑色劍旗의 제자들을 데리고 갈 생각입니다."

그래.... 살면서 한 번쯤은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을때가 있겠지.

그리고 꼭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지 못한다면....

어쩌면 인생에 후회가 남을지도....

"혈영이 산으로 들어갔다. 혈영이 먼저 그녀를 찾는 것이 보인다면 너는 절대로 나서지마라."

"감사합니다. 주인....!"

주인님이라 부르고 싶지만....

절대로 '님'자를 붙이지 말라는 혈뇌의 말에 끝을 흐리고....

다시 한 번 초일이 혈뇌를 향해 깊숙히 허리를 숙여보이고는 등을 돌려 천막을 나선다.

세상에는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곁눈질 한 번 주지않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초지일관 初志一貫의 집념이랄지....

아니면 목표를 향한 열정일지....

그리고 이런 열정이야말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가지는 특질이고....

그 사람을 비범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그리고....

초일이야말로 그 누구의 눈에라도 비범해보일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천막을 나선 초일이 다시 한 번 천막을 향해 허리를 숙여보이고....

눈앞으로 펼쳐진 광활한 천산산맥을 올려다봤다.

"청색기! 뒤쳐지지말고 따르라."

어디에 하는지도 모를 짧은 말과 함께 초일의 몸이 천산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 * * * *

갈증.

어둠이 눈앞으로 깔리는 순간부터 다시 목을 태울 것처럼 타오르는 갈증이 느껴진다.

어떡해야 이 갈증을 풀어낼 수 있는가?

산속의 무성한 숲을 뚫으며 만나는 계곡의 물에 온몸을 담궈봐도....

바위틈에 고여있는 차가운 물을 마셔봐도....

이 갈증은 가시지 않는다.

타는듯한 갈증과 함께 빠르게 몸을 날리는 신녀의 눈에....

크르릉....!

낮은 울림과 함께 산중대호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바닥에 빈듯이 드러누운 채 낮선 침입자를 보는 대호의 눈과 신녀의 눈이 마주치고....

크아앙!

벌떡 일어나는 산중대호의 목줄기가 검은 기운에 뜯겨나가며 쓰러진다.

그리고....

빠르게 쓰러진 호랑이에게 달려가 치솟는 핏줄기에 얼굴을 쳐박고....

벌컥! 벌컥!

사막에서 물을 만난 것처럼 죽은 호랑이의 피를 빨던 신녀의 검은 눈동자에 조그만 빛이 살짝 떠오르고....

천천히 옆으로 돌리는 눈길에 호랑이의 배에 붙어있는 앙증맞은 새끼 호랑이 한 마리가 보인다.

작은 고양이 같은 새끼 호랑이가 빨고있던 어미의 젖이 나오지 않는지 뒤뚱거리며 호랑이의 배에서 떨어지고....

주위를 돌아보는 눈에 신녀의 모습이 들어온다.

카아아....!

어미의 목에 붙어있는 낮선 이방인을 향해 새끼 호랑이가 하악질을 하고....

신녀의 검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그리고....

도마뱀의 눈처럼 검은 동자가 갈라지며 또렷한 흑백을 가진 신녀의 눈동자가 나타난다.

나는....

나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처럼 오물거리던 신녀의 입이 닫히고....

자신을 바라보는 똘망똘망한 새끼 호랑이의 눈동자속으로 흐릿한 환영이 떠오른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침상에 누워있는 노파와 중년의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옛된 계집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머니....!"

중년남자의 입에서 탄식 같은 음성이 들리고....

남자를 보던 흐릿한 노파의 눈이 어린 여자아이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아이를 향해 힘겹게 들려지는 노파의 손.

앙상하게 뼈밖에 남지 않은 손이 힘겹게 어린 여자아이를 향하고....

중년남자가 황급히 노파의 앞으로 아이를 당긴다.

턱!

기운 없는 노파의 손이 아이의 머리에 닿고....

"아난타.... 죽여라! 모두 죽여....!"

단발마의 비명처럼 괴로운 음성과 함께 노파의 흐릿하던 눈에 짙은 원독의 빛이 떠오른다.

그리고....

"으아앙!"

노파의 무서운 모습에 계집아이가 울음을 터트리고....

뼈밖에 보이지않는 앙상한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어머니!"

평생 단 한 번도 아들이라 불러주지않고 젖 한 번 물려준 적이 없었지만....

아니.... 따뜻한 눈길 한 번 준적이 없는 어머니였지만....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죽음에 중년의 남자가 통곡을 하고....

어린 계집아이도 서럽게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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