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록-120화 (120/158)

신녀와 마녀 神女와 魔女4

빠르게 멀어지는 무적의 등이 흐릿하게 보이고 곧이어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린다.

"누가 광마 아니랄까.... 또박또박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철없이 투정부리는 아이처럼 궁시렁거리던 제갈식이 홍혜령을 돌아본다.

그리고....

"혜령아! 근데 너는 도대체 뭘 믿고 법륜궁주를 살려준다고 한거야?"

"전 살려준다고 한 적이 없어요."

"뭐....?"

홍혜령의 시치미를 떼는 말에 제갈식이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와 타말을 번갈아보고....

"네가 분명히 저 광마가 돌아올때까지 궁주를 살려놓겠디고 했잖아?"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요?"

"조금전에 광마에게 했잖아!"

화난 것처럼 소리를 지르는 제갈식의 말에 홍혜령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아.... 천하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입만 열면 자랑하는 제갈 오라버니가 오늘은 왜 이렇게 자꾸 바보 같은 소리만 해요? 제가 언제 살려놓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만약 법륜궁주님이 돌아가셨다면 내가 어떻게 되살려요?"

"광마에게 그가 돌아올 동안 분명히 살려놓겠다고....?"

따지는 것처럼 입을 열던 제갈식이 갑자기 말을 멈춘다.

그리고....

"살리지는 못하고....?"

"네. 낫게 해서 살릴 수는 없지만.... 죽지 않게는 할 수 있어요."

제갈식이 묘한 눈으로 홍혜령의 얼굴을 쳐다본후 고개를 돌려 황무지를 돌아본다.

자갈과 흙먼지 밖에 보이지않는 끝없는 황무지가 눈에 들어오고....

"하지만 아무리 네 의술이 신묘한 경지라 할지라도 음식과 약재는 물론이고 마실 물조차 찾기어려운 이 황무지에서 어떻게....?"

"그들이 올 동안만이라도 오라버니께서 진을 만들어 저희들을 지켜주시면 되요."

"광마가 금방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조 대협이 아니에요."

응....?

광마가 아니라고....?

"너....?"

"아 정말! 오라버니 왜 이렇게 멍청해졌어요! 우리 보광장의 식구들이나 아니면 다른 열두 가문의 누구라도 올거라고요!"

뽀로통하게 쏘아부치고는.... 또 방긋이 웃는 홍혜령의 모습에 제갈식이 멍한 얼굴이 돼 버린다.

이 여우 같은 계집애가....

"맹꽁이 같이 왜 그렇게 멍청해요! 조 대협이 쌍아를 풀어줬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쌍아는 보광장이나 다른 열두 가문 중 한곳으로 갈거 아니예요?

그리고 구민차의 고삐가 풀린 채 달려온 쌍아를 본 어느 가문이라도 그애들을 앞세워 우리를 찾아올거고.... 아 정말 모르는 것처럼 왜그래요?"

아....!

그제서야 홍혜령의 말이 이해가 되는 것처럼 제갈식이 탄성을 발했다.

쌍아.

홍혜령이 쌍아라고 부르는 두 마리의 말.

비록 구민차라는 마차를 끄는 짐승에 불과해 보이지만 이 흑백의 두 마리 말은 천하에 보기드문 명마였다.

이 천하의 명마가 천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혈통을 이어가며 구민차를 끌어왔고....

또 천하인이 지켜주는 구민차라고 할지라도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에....

이 흑백의 두 마리 말은 구민차의 고삐를 풀고 주인과 헤어지게 되면 가장 가까운 열두 가문 중의 한 곳으로 달려가도록 훈련 되어 있었다.

그리고 황무지에서 무적이 구민차의 고삐를 풀어주었고....

주인과 헤어진 흑백의 두 마리 말은....

* * * * *

따그닥!

따그닥!

길게 이어진 벽란곡의 계곡을 따라 늘어선 가게와 주택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달리는 말을 쳐다봤다.

마치 빛살 같은 속도로 상가의 중앙으로 난 길을 달리는 한 마리의 말.

힘겹게 뱉어내는 숨결과 말의 갈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이 마치 전설속의 적토마처럼 검은 몸을 붉게 보이도록 만든다.

그리고....

달리기위해 태어난 말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벽란곡의 깊은 곳으로 달려가는 말.

그리고 풀려진 고삐가 마치 천마의 날개처럼 흩날리는 말을 향해....

한 사람의 몸이 바람 같이 따라 붙으며 말등으로  올라탄다.

"워....!워....! 그만 멈추거라."

벽란곡이라 불리는 모용 세가의 소가주인 모용호가 빠르게 말의 등에 올라타며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서게 해보지만....

당겨지는 고삐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더 사납게 달려가는 검은 말.

응....?

쉽게 멈춰 세울 수 있을줄 알았던 말이 오히려 더 빠르게 달리자 모용호가 살짝 놀란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잡힌 고삐의 가죽끈에 희미하게 보이는 글자.

오래전 새겨진 것 같은 흐릿한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보광 保光.

분명히 보광이라고 새겨진 글자에 모용호의 눈이 크게 뜨지고....

어느새 벽란곡의 정문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달려오는 말에 당황해하는 정문의 경비무인들.

"막지말고 대문을 열어!"

크게 외치는 모용호의 고함소리에 무인들이 대문을 열고....

활짝 열린 대문안으로 흑마가 달려들어간다.

그리고....

푸히히힝~~!

벽란곡의 마당 한 가운데서 멈춰서며 울부짖는 흑마.

멈춰세우려 할때는 멈추지않던 말이 마치 자신이 해야할 일을 한다는 것처럼 마당 한가운데서 스스로 멈춰서며 커다랗게 울부짖는다.

모두 나와서 자신을 보라고 외치는 것 같은 흑마의 울부짖음소리에....

어느새 수 많은 벽란곡의 검객들이 마당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가볍게 말애서 내려서는 모용호.

"삘리 아버님께 가서 구민차에 일이 생겼다고 전해라!"

빠르게 외치는 모용호의 말에 몇 몇 검객들이 황급히 몸을 날리고....

모용호가 피 같이 진한 땀을 흘리는 검은 말을 진정시키려는 듯 가볍게 갈기를 쓰다듬어 준다.

그런데.... 왜 한 마리지....?

원래 두 마리가 아니었나....?

* * * * *

갈증.

목을 태울 것 같은 뜨거운 갈증이 난다.

물은....?

아무리 사방을 돌아봐도 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흐릿한 시야에 들어오는 커다란 짐승 하나.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는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는 짐승이 한 마리 보이고....

퍼억!

주먹으로 때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짐승이 쓰러진다.

그리고....

짐승의 목줄기를 타고 뿜어져 나오는 붉은 핏물.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핏줄기가 보이고....

신녀가 빠르게 다가가 핏줄기에 입을 가져간다.

꿀걱! 꿀걱!

무더운 여름날 감로주를 마시는 것처럼 뜨거운 핏물을 들이킨 신녀가 몸을 일으켜 다시 사방을 둘러본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어 어느 곳을 봐도 높은 산봉우리밖에는 보이지 않는 곳.

흐릿한 의식속에서....

이곳이 어딘가?

그리고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잠시 맑은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가 다시 눈앞으로 붉은 산봉우리만이 들어온다.

세상이 모두 핏빛으로 보이는 시야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지만....

이번에는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모우(야크)가 눈에 보이고....

또 다시 몰려오는 갈증.

짐승의 피를 통해 잠시의 기갈은 면했지만 다시 목을 태울 것 같은 갈증이 몰려온다.

그리고....

끄으으....!

신녀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괴이한 울부짖음과 함께 다시 신녀가 몸을 날린다.

* * *

황무지를 따라 한 번씩 나타나는 발자국이 군자명이 자신을 위해서 남겨준 흔적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것저것 신경쓸 것도 없이 군자명의 발자국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서 몸을 날리던 무적이 한 곳에 이르러 갑자기 멈춰선다.

저멀리 보이는 높다란 나무.

황무지가 끝나고 산이 시작된다는 경계라도 되는 것처럼 높게 솟아오른 숲이 보인다.

아니.... 숲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황무지와 산 사이의 경계를 따라 한쪽은 붉은 황무지가 다른 한쪽은 나무 안쪽으로 녹지가 길게 이어져있다.

그리고 그 길게 이어진 나무의 벽 한쪽이 엉망으로 넘어지고 부서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 사이를 비켜가지도....

또 몸을 날려 나무를 넘어가지도 않고 그대로 막아서는 나무를 부수고 들어간 흔적.

멈출 수도 비켜갈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렸는가?

이런식으로 앞만 보고 뚫고 가는 방식은 분명히 군자명의 방법은 아니다.

그렇다면....

신녀가 뚫고 지나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뒤를 군자명이 따랐을 거고....

도대체가 신녀가 왜 그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무슨 마귀새끼도 아니고....

그건 그렇고....

정말 신녀가 눈앞의 저산으로 들어갔다면 어떻게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소문으로만 듣던 저 험한 천산에서....

후우....!

깊게 몰아쉬는 숨과 함께 커다란 나무 뒤로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산을 향해 무적이 몸을 날렸다.

그리고....

눈앞으로 펼쳐지는 끝없는 산의 행렬.

한 개의 산봉우리를 넘으면 또 다시 한 개의 산봉우리가 앞을 막는다.

간헐적으로 보이는 깊은 발자국에 의지한 채 그렇게 산을 넘고 또 산을 넘자....

응....?

피투성이가 된 모우가 한 마리 눈에 들어온다.

생전 처음보는 털이 무성한 짐승의 모습에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다시 쓰러져있는 짐승의 사체를 살펴본다.

뜯겨나간 것 같은 목주위의 살점과 말라버린 핏자국.

그리고 짐승의 사체 옆으로 희미한 흔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구부려 동그래진 무릎이 바닥을 누른 것 같은 자국.

누군가 무릎을 꿇은 채로 모우의 목에 입을 가져가고....

머리속으로 떠오르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장면에 무적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 깊은 산속에서 누가 머무르지도....

그리고 지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이곳까지 오는 동안 군자명의 흔적외에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작은 무릎의 흔적이....

그녀가 이 짐승을 죽이고 피를 빨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그 짙은 어둠을 몰고오던 사악한 기운사이로 검게 변하던 신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정성스럽게 닦아주던 손길도....

만불동의 와불속에서 신녀를 다시 봤을때 무적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그녀의 손길에 반응을 보이던 자신의 남성과 온몸의 구석구석을 닦아주던 신녀의 손길.

그 손길이 떠올라 그녀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만불동을 나와 황무지로 들었을때도....

타미르가 자신들을 막았을때도 무적은 다른 사람은 모두 똑바로 쳐다봐도 신녀만큼은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길에 반응을 했던 부끄러움과 또 그녀의 신성한 기운에 약간은 죄짓는 것 같은 느낌.

그런데....

그 신녀가 어둠을 몰고오는 괴상한 짓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죄없는 짐승을 잔혹하게 죽이고 그 선혈을 취한다고....?

하아....!

무적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군자명의 흔적이 이어진 발자국을 따라 다시 산을 넘는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산을 넘어 달렸을까?

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꽈아아~~!

폭포....?

커다란 물줄기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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