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록-115화 (115/158)

회한 悔恨7

"제갈식! 네 생각에는 누구일것 같으냐?"

"글쎄요.... 혈왕궁 血王宮이라면 저렇게 불을 켜 놓은 채 우리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고.... 마도육문의 방식도 아닙니다."

"마도육문의 방식....?"

"예. 지금은 비록 마도육문이라고 불리지만 그들도 한때는 열여덟 가문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열여덟 가문은 문을 두드리고 당당하게 찾아가지 저런 식으로는....."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구나. 나를 기다리는 자들이냐?"

"아마도.... 아니라면 정말로 서역을 오가는 상단이거나 유목민일지도...."

제갈식의 말에 무적이 다시 한 번 멀리 보이는 불빛을 살펴봤다.

한 개의 커다란 빠오와 또 조그만 천막 두 개.

그리고....

빠오의 곁으로 걸려있는 솥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건량을 끓이는 구수한 냄새.

물도 먹지 못하도록 객점까지 모두 치워버리는 자들이 저렇게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린다고....?

"상대가 누구든 일단 밥이나 한끼 얻어먹으러 갑시다."

무적이 한 발을 디디며 나즈막하게 말하고 신녀와 타말이 말없이 무적의 뒤를 따른다.

저벅! 저벅!

의식적으로 큰 소리를 내는 무적의 발걸음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빠오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아니.... 빠오의 주위로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무적이 빠오의 입구를 가리고 있는 가죽을 걷어올리고....

응....?

눈앞에 펼쳐진 진수성찬.

넓은 빠오의 실내에 커다란 식탁과 잘차져린 음식이 보인다.

보통의 빠오보다 조금 더 넓어보이는 천막안에 커다란 식탁과 의자.... 그리고 언제 만들었는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따듯한 음식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빠오의 주인도.... 음식을 차린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무적이 작은 손짓으로 신녀와 일행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

빠오를 빠져나와 작은 천막으로 향한다.

펄럭~~!

힘껏 제치는 천막의 휘장뒤로....

이번에는 몇 개의 물주머니가 가지런히 놓여져있는 탁자가 눈에 들어오고....

다시 다른 천막의 입구를 여는 무적의 눈에 천막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술병이 하나 보인다.

재미있네....

물도 못먹게 막더니 이제는 술과 음식이라고?

무적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떠오르고....

술병을 잡아 뚜껑을 열어본다.

뽕!

밀납된 뚜껑이 열리며 올라오는 독하고 진한 주향.

강렬하게 술병을 타고  올라오는 주향만으로도 쉽게 볼 수 없는 명주라는 것을 알게해주는 짙은 향이 느껴지고....

무적이 발길을 돌려 중앙의 빠오를 향한다.

펄럭~~!

빠오의 입구를 가린 휘장이 걷혀지고....

성큼 안으로 들어오는 무적을 보는 네 쌍의 눈길.

호기심으로 가득찬 네 쌍의 눈길이 무적의 손에 들린 술병으로 향하고....

무적이 술병을 흔들어보이며 네 사람을 향해 싱겁게 웃어보인다.

"반주도 준비됐는데.... 식사나 하지요?

밥이나 먹자는 무적의 말에 홍혜령이 빠르게 식탁으로 가서 이것저것 음식을 둘러본다.

그리고 기다란 은침을 하나 꺼내서 음식에 찔러보고....

"독은 없어요."

"당연히 독은 없을 것이요."

홍혜령의 말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며 무적이 식탁에 앉고....

타말과 신녀가 뒤따라 식탁에 앉는다.

그리고.... 제갈식과 홍혜령도.....

사막이라는 곳은 그 황량한 모습만큼이나 무서운 곳이다.

물이 부족하고 태울듯이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빛을 피할 숲도 그늘도 없는 곳.

그리고 기본적으로 물이 부족한데 다른 것이야 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수시로 예기치 못한 위험에 직면하게 되고.... 우연히 만나는 자들이 강도로 돌변하는 배신의 땅.

그런데 이 척박하고 사나운 땅에서 누군가가 천막을 치고 음식을 차려줬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쉬라는 뜻인가?

아니면....

"캬아~~!"

독한 뒷소리와 함께 목을 타고 넘어가는 한 잔의 술.

무적의 일행은 마치 자신들을 위해 차려준 음식인양 아무런 말도 없이 주인없는 식탁의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식탁 위의 고기와 채소가 바닥을 보이자....

무적이 자리에서 일어나 빠오를 나선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들어오는 무적.

무적의 손안에 들린 솥을 보는 제갈식의 눈이 동그래지고....

"그 죽도 먹으려고요?"

"제갈식! 차려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음식은 남기면 안되는 법이다."

죽까지 먹느냐는 제갈식의 말에 마치 죽을 먹지 않으면 큰 실례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며 무적이 빈 그릇에 죽을 떠 일행에게 나눠준다.

그리고....

한 숟가락 죽을 떠서 입에 넣던 타말이 움찔 놀란다.

이건....?

약간의 고기와 쌀을 넣어 끊인 죽.

다른 어떤 양념이나 향신료도 없이 오로지 쌀과 고기에 소금만 조금 넣어 끊인 간간한 죽.

하지만 이 죽은....

딱딱하게 굳어지는 타말의 얼굴을 본 무적이 손에 든 죽그릇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이제 이 음식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은데.... 그만 모습을 보이면 안되겠나?"

뜬금없는 무적의 말에 네 사람이 흠짓 놀라며 무적을 돌아보고....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빠오의 천이 걷히며 누군가가 들어온다.

"식사는 잘했나?"

심한 감기에 걸린 것처럼 듣기 거북한 쉰 목소리와 함께 상대의 모습이 보이고....

"타미르....!"

타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진다.

타미르....?

저 자가 환희불이라고....?

타말의 입을 통해 나온 타미르라는 말에 제갈식이 황당한 얼굴로 타미르를 쳐다봤다.

믿기 힘들만큼 비대한 몸이.... 마치 코끼리를 연상시키던 환희불의 몸이....

그 엄청나던 몸이....

이제는 마른 장작처럼 뼈밖에 보이지 않는다.

뼈위에 얇은 가죽을 입혀놓은 것 처럼 온몸의 뼈가 모두 드러나보이는 몸에 한쪽 어깨와 상체의 일부만을 가린 붉은 가사를 입고 있는 환희불의 모습에 제갈식이 얼이 빠진 듯 타말과 환희불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리고....

"덕분에 잘 먹었소. 그런데 내게 볼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맹노에게 볼일이 있으신 거요?"

무거워진 천막안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적의 말이 나오고....

"그렇다네. 노납은 저 배은망덕한 늙은이에게 볼일이 있다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조 대협은 나서지 말고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없겠나?"

마치 도당옥이 그랬던 것처럼 환희불도 무적에게 비켜달라는 말을 한다.

"환장하겠네.... 어떤 인간은 물 한잔 줬다고 비켜달라질 않나.... 또 어떤 중은 고기 좀 먹였다고 참견하지 말라고 하지를  않나.... 내가 그렇게 싸구려로 보이나?"

"아니지.... 어떻게 근 십 년내에 중원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광마가 싸구려일 턱이 있겠는가? 다만 이 일은 남이 끼어들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일이라서...."

정말로 뼈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환희대불의 얼굴에 미소라고 부르기도 힘들 것 같은 옅은 미소가 어리고....

"그래서 땡중도 내가 비켜주지 않으면 도망갈 건가?"

"노납은 조 대협의 손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다네.... 그리고 도망갈 마음도 없고...."

"그런가? 정말 이 기분나쁜 자갈 밖에 보이지 않는 길에 들어온 후 처음 들어보는 마음에 드는 말이군."

차가운 말과 함께 무적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무적! 잠시만 비켜주겠나?"

조용한 타말의 음성이 무적을 멈춰 세운다.

빌어먹을.....!

"요즘 왜 이렇게 내 칼을 막는 사람이 많은 거요?"

짜증스럽게 입을 열며 타말을 향하는 무적의 눈에....

곧 울어버릴 것 같은 애처러운 얼굴.

도저히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있던 맹노가 아닌 것처럼 처량하고 슬픈 얼굴이 무적의 눈에 들어온다.

뭐야....?

본 적없는 타말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눈길로 신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복잡한 감정을 담고있는 눈으로  타말을 보고있는 신녀의 모습이 보인다.

"크크크.... 그래도 한 가닥 양심은 남아있다는 것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돌아나오는 타말을 향해 환희불이 괴상하게 중얼거리고....

"미안하다.... 그런데 뭘로 할까?"

마치 세상을 다 산 사람 같은 힘없는 타말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뭘로 하자고....? 당연히 네놈의 칼로 해야겠지."

뼈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환희불의 입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말이 나오고....

"내가 줬던 그 칼 잠시만 빌려줄 수 있겠나?"

타말이 무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애처러운 눈빛을 한 얼굴이 자신에게 칼을 빌려달라고 한다.

저 얼굴에게 칼을 주면 안된다고....

절대로 주지 말라고 자신의 이성이 커다랗게 소리치고 있지만....

무적의 손이 허리춤의 칼자루로 향한다.

그리고....

스윽....

무적의 손에서 타말에게로 월광도가 건네진다.

사람의 몸을 빌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인간이라는 존재는 복잡한 인과의 세상에서 살다보면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또 자신의 의지로 해야만 하는 일이 생기는 법이다.

어떤 자는 그 일을 미루고.... 혹자는 피하며.... 또 어떤 자는 견디기 힘든 고난 속에서도 스스로 책임을 다한다.

그리고 무적은 확고한 신넘과도 같이 절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해야만 할일은 피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당연히 타말의 모습에서 자신이 말릴 수 없다는 것을 느꼈고....

그렇게 자신의 이성과 상관없이 타말에게 칼을 건넸다.

가늘게 앞으로 뻗은 도의 끝이 하늘을 향해 올라간 반달모양의 도신을 가진 타말의 월광도.

"무적.... 자네의 도가 능히 팽월장의 그것에 비길만하다고들 하더군. 나도 평생 단 한가지의 도법만을 익혔다네. 옆에서 한 번 봐주겠나?"

말려려야 해....

저 몸으로는 도저히....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천천히 끄덕이는 무적의 고개짓.

"고맙네."

타말이 힘없이 웃어보이고는 환희불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천천히 등을 돌려 빠오를 벗어나는 환희불.

구름 한 점 없는 사막의 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들.

그리고 그 수많은 별들의 바다 사이로 한 줄기 유성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지나간다.

진즉에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등을 돌려 자신을 보는 환희불을 향해 타말이 고개를 끄덕이고....

피윳!

언제 뽑아들었는지 환희불의 손에 들린 한 자루 도가 타말을 향한다.

파릇한 기운을 뿜어내는 도가 얼굴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고....

창!

경쾌한 소리와 함께 타말의 월광도가 환희불의 칼을 막는다.

카르륵!

쇠줄 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타말의 칼이 환희불의 칼을 감으며 상대의 손목을 향하고....

창! 창!

자신의 칼을 감아오는 타말의 칼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빠져나와 월광도를 막아내는 환희불의 도.

창! 창!

일진일퇴.

빠르게 날아오는 타말의 월광도는 환희불의 칼이 막아내고....

강하게 내려치는 환희불의 칼은 타말의 월광도가 막아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환희불과 타말의 손을 따라 조그많게 움직이는 무적의 오른손.

일견 평범해 보이는 두 사람의 도법에서 무적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을 느꼈다.

단지.... 만월도나 둔도만이 도법이 아니다.

짧게 상대의 칼을 막고 그 빈자리를 파고드는 칼.

만월도나 둔도보다 강한 위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꼭 필요한 자리에 나타나는 칼.

막아야 할때는 막고....

쳐내야 할때는 쳐낸다.

자신도 모르게 또 다시 빠져드는 무의 바다.

무적이 또 다시 무의 바다에 빠져들고....

창! 창!

커다란 쇳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떨어지고....

피윳!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타말의 월광도에서 초승달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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