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한 悔恨5
우웅!
무겁게 공기를 울리며 도당옥을 향해 내려오는 군자명의 검과....
촤르륵!
쇠사슬이 부딛치는 소리와 함께 도당옥의 머리위에서 서로 얽히는 세 사람의 손에 들린 비혈삭 飛血索.
도당옥과 두 노인의 손을 떠난 쇠사슬이 마치 바둑판이라도 만들려는 것처럼 서로 종으로 횡으로 얽히며 사각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바둑판의 돌을 놓는 점처럼 쇠사슬이 서로 교차된 지점에서 강한 기운이 올라온다.
그리고....
투웅!
가볍게 북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튕겨 올라가는 군자명.
쇠사슬의 기운에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간 군자명이 재주를 넘는 것처럼 몇 바퀴 몸을 돌린 후 바닥으로 내려서고....
울컥....!
한 웅큼의 각혈을 토해내며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버린다.
이건....?
강동에서 만났던 용조와 같은 힘.
분명히 당시에도 용조는 자신의 압경을 튕겨냈었다.
자신이 뿜어내는 힘과 같은 힘으로 자신을 밀어내던 등무결의 조법.
그리고 지금 도당옥과 저 두 노인도 용조만큼 강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강한 압력을 뿜어내며 자신의 중검을 튕겨냈다.
압경이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것이었던가....?
아니.... 그것보다....
이제 어떻게....
섬광도 잡히고.... 검왕의 검도 통하지 않는 지금.... 이제 어떤 식으로 저들을 상대해야 하는가?
눈앞에서 비웃듯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가문의 원수를 보고도....
한 가문을 멸문시킨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비웃는 저 인면수심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당장 일어나 상대를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든다.
깊은 절망과도 같은 좌절감이 전신을 두드리는 바로 그 순간....
아....!
문득 절망속에서 떠오르는 야릇한 기억 하나.
군자명은 아득한 좌절감속에서 그동안 단 한 번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야릇한 기억 하나가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가슴을 울리는 내상의 충격보다 자신의 검이 꺽였다는 것에 더 깊은 좌절을 느끼고 있던 군자명과는 다르게....
촤르륵....!
바둑판처럼 얽혀있던 비혈삭을 거두는 도당옥은 약간은 흥분된 얼굴로 주저앉아있는 군자명을 바라봤다.
원래가 붉은 얼굴이 무엇인가에 고무된 것처럼 더 붉어진 것 같고....
미약하게 뱉어내는 숨결도.... 자세히 들어보면 들을 수 있을만큼 약간은 거칠게 나온다.
드디어.... 드디어 그의 검을 꺽었다.
삼백 년전 자신들이 스스로 종을 자처하게 만들었던 그의 검만은 못할지 몰라도.... 전설속의 절대검왕 絶代劍王의 검을 꺽었다.
우리는 무능하지 않다.
적어도 우리 여섯 가문은 세상의 다른 열두 가문보다 못하지 않다!
그리고....
격앙된 마음을 어느정도 가라앉힌 도당옥이 봉분처럼 수북히 바닥에 쌓여있는 쇠사슬을 힐끗 돌아보며 나즈막하게 입을 연다.
"설씨의 아이야.... 이제 더 이상 네게 남아있는 수는 없는 것 같구나. 우리는 지난 삼백 년 기나긴 세월동안 너희들 설씨의 섬광을 막기위해 저 금망 禁網을 만들었단다. 그리고 이제 그 결실을 봐서 오늘 너의 섬광을 막았고.... 그리고 너의 검왕삼검!"
도당옥이 아직도 격한 흥분이 가시지 않는지 잠시 숨을 몰아쉬고....
"아이야.... 너는 왜 우리가 신주십팔대세가 神州十八大世家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버리고 귀주에 웅크린 채 마도육문이 돼버렸는지 벌써 잊어버린 것이더냐? 그분은 너희들 설씨에게는 검왕삼검을.... 그리고 우리 여섯 가문에는 자신의 삼검을 막을 수 있는 파훼식을 전해주었단다. 그분은 공평하게도 너희들에게 전해진 그 검식에 우리가 죽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단다. 삼검이 꺽인 지금.... 이제 너는 무슨 수로 우리들의 비혈삭을 막을 것이냐?"
"도당옥! 내 나이도 내일 모레면 마흔이다! 자꾸 아이라고 할래!"
자랑하듯이 나오는 도당옥의 말에 군자명이 갑자기 빽 하고 고함을 지르며 일어선다.
그리고 똑바로 허리를 펴고 검을 들어올리는 군자명.
"무슨 수가 있는지 다시 한 번 해보자!"
갑자기 당찬 기세와 함께 똑바로 일어서는 군자명의 모습에 두 노인이 멍해진 얼굴로 도당옥을 돌아보고....
"푸하하핫!"
도당옥과 두 노인이 하늘이 떠나갈 듯 통쾌하게 웃는다.
"그래! 그래야지.... 우리 여섯 가문에 이빨을 내보이던 설씨의 후예가 그렇게 맥없이 쓰러져서는 안되지. 암 그렇고 말고...."
도당옥이 마치 잘 자란 제자가 자랑스럽다는 것처럼 흐뭇하게 말하며 손안의 비수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피융!
피융!
도당옥의 비수가 군자명을 향하는 것과 동시에 두 노인의 손에서도 비수가 떠나고....
스윽....!
휘익....!
날아오는 비수와 쇠사슬 속에서 군자명이 가볍게 고개를 돌리고 살짝 살짝 발을 움직이며 자신을 향하는 비혈삭을 피해낸다.
응....?
검으로 비수를 막지도 않고....
크게 몸을 움직이지도 않으며 자신들의 비혈삭을 피하는 군자명의 모습에 도당옥이 살짝 얼굴을 붉히고....
도당옥의 눈짓에 두 노인이 빠르게 군자명을 향해 날아간다.
스윽....
갑자기 빠르게 눈앞으로 다가온 노인의 모습에 군자명이 유령처럼 뒤로 물러나고....
언제 왔는지 물러서는 자신의 옆으로 바짝 다가오는 또다른 노인의 모습에....
탁....!
가볍게 바닥을 찍으며 또 한쪽으로 밀려간다.
"반신영 反身影....?"
바람에 날리는 깃털 같은 군자명의 움직임에 도당옥이 흠칫 놀라고....
슈욱!
빠르게 몸을 날려 군자명의 머리를 넘어 등뒤로 내려선다.
그리고....
피융!
군자명의 등을 향해 강하게 일직선으로 찔러가는 비혈삭.
가볍게 움직이는 등뒤로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고....
군자명의 몸이 살짝 비틀린다.
피융!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군자명의 옆구리를 스쳐지나가는 비수와....
살짝 비틀린 몸을 향해 날아오는 또 다른 비수.
눈앞으로 나타나는 파릿한 비수의 검광을 보자 이번에는 군자명의 고개가 살짝 움직이고....
또다시 자신의 코앞으로 날카로운 비수가 지나간다.
피융!
얼굴 앞으로 스치듯 지나가는 비수의 차가운 기운에 정신이 번쩍 든다.
비수와 함께 쇠사슬을 휘감으며 끌려가듯 지나가는 공기의 파동이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하고....
단 한 번이라도 저 비수에 맞으면 끝이라는 공포가 전신에 엄습한다.
하지만....
군자명은 여전히 냉정하게....
전신을 엄습하는 공포속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뎦쳐오는 비수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그리고....
* * *
--- 내 친구 설소평에게 이 한 권의 책을 남긴다.
소평 보게나.... 내 자신이 스스로 원하지는 않았지만 의도치 않게 세상에 나와 세 명의 소중한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네. 그 중 두 명의 친구들에게는 서로 깊은 정을 나누고 각자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머지 한 친구.... 소평, 자네에게는 오히려 자네의 뜻을 꺽어버린 것 같아 항상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네. 그래서 이제 세상을 떠나 영원히 몸을 숨기고자 마음 먹은 이 순간 이 한권의 검급을 남겨 자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고자 한다네.
본시 사람들이 흑우라고 부르는 나는 암혼정이라는 한가지 신비로운 기예와 검왕삼검이라는 절세의 검법 하나로 천하제일인이라고 불려졌다네. 하지만 암혼정은 원래가 사천당문의 물건. 반드시 사천에 돌려줘야만 할 것이라네. 그리고 검왕삼검은.... 친구, 사실 나는 검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네. 그렇지만 우연히 인연이 닿았던 공동 도가의 한 도인때문에 이 삼검을 익히고 그의 부탁대로 세상에 나가 이런 검식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된 것일 뿐이라네. 결국 삼검도 공동의 것. 그래서 공동에 돌려주려 하였으나 공동의 선인이 말하기를 인연이 박해서 삼검이 검왕에게 전해졌으니 차후 삼검의 운명 또한 검왕의 몫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항상 자네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나는 이 검급을 만들어 자네에게 검왕삼검이라고 불려지는 이 검식을 전하려 한다네.
그리고 이 검급을 전하기전에 미리 말해둘 것은 나라는 인간은 장난이 아주 심하다는 것이라네. 그 지독한 장난기가 천성인지 아니면 자네들과 어울리며 생긴 버릇인지는 몰라도 이 삼검에도 장난을 조금 쳤다네. 아....! 그렇다고 익히지 못하거나 애를 먹는다거나 하는 그런 것은 아니네. 단지.... 아무튼 내가 치졸한 장난기로 저지른 그 일 때문에 자네나.... 아니면 자네의 후손이 험한 일을 당할까 그것이 염려스러워 삼검 외에 또 다른 두 가지의 검식을 더 넣어 무적오식이라 이름을 붙이고 이제 자네에게 전하려 한다네. 내가 만든 두 가지의 검식은.... 삼검의 앞에 간단한 한 가지 검식을 추가하고 또 마지막에 한 가지 심득을 적어두었다네. 만약에 자네나 자네의 후인이 삼검과 일식을 완전히 익히게 되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마지막 일식도 익히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내 심득 心得을 담은 그 마지막 일식의 검이야말로 무적오식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절대의 검법. 친구.... 미안하네. 오랜시간 자네들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홀로 떠나야하는 나를 용서해주게. 그리고 내가 만든 간단한 일초식의 검법은....
수유일검 水流一劍.
검이라는 것은 본래가 찌르는 병기이다.
물론 베고 자르거나 검면으로 때리는 등 다양한 초식도 있을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검이라는 것은 빠르게 상대의 인후나 신체의 일부를 찌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병기이다.
여기서 내가 생각한 것이 검이라는 병기가 과연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찌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검으로 찌르는 것보다 더 빠르게 상대를 잡거나 때릴 수 있어 오히려 손에 검이 들려있다면 거추장스러울 뿐이나 검을 든 검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빠르게 검을 찌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최대의 관건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다른 무엇보다 빠르게 검을 찌를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또 삼검을 증명해보이는 비무행에서 빠른 쾌검을 쓰는 자들과의 비무에 더욱 많은 신경을 썼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세상의 그 많은 검객들 중 빠르게 찌른다는 기본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검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검호 劍豪 명숙 名宿들이 강하게 상대를 제압하는 검강이나 넓은 범위를 완전히 장악하는 다변의 검에 치중한 나머지 빠르게 찌른다는 기본에는 소홀이 한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었다.
왜 검호 명숙들은 빠르게 찌른다는 가장 단순하지만 또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이것을 소홀이 할까?
그리고 많은 비무와 관찰을 통해서 결국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빠르게 찌른다는 것.
사실 이것은 모든 검수들이 알고있고 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세상에 빠르게 찌르는 쾌검은 드문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이미 검으로 찌르는 것은 한계에 다달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즉 인간의 힘으로는 더이상 지금보다 빠른 검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경직된 사고가 그 이유였다.
세상의 모든 검식에 찌르기는 항상 들어있고 그 찌르기는 또한 지금 새상에서도 어느 정도는 빠르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한계라고 생각하는 그 빠르다는 것은 사실은 상대적인 것.
두꺼운 도 보다 빠르다고....
무거운 부 斧나 창 보다 빠르다고....
그것을 과연 빠르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그렇게 더 빠른 검을 연구하던 내게 한가지 결정적인 단서를 준 자가 나타났다.
그 자는 내게 대항해 검을 들었던 자.
그 자의 빠른 검에 나는 그를 죽이지 않고 물어봤다.
당신의 검은 지금까지 내가 본 검 중에 가장 빠르다.
어떻게 그런 빠른 검을 익일 수 있었느냐고....
그리고 그 자의 대답은 드디어 나를 만족시켰다.
심즉검 心卽劍.
마음이 곧 검이다.
찌른다는 마음과 동시에 발검이 이루어지고 검이 상대를 찌른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다.
그렇게 심즉검의 경지까지 갔다면 그것이 바로 심검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 자는 내게 자신은 그 경지까지는 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그 심즉검의 경지를 상정해서 쾌검을 연구했다.
하지만....
어느날 나는 내가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그 자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
친구.... 심즉검은 절대의 쾌검이 아니라네.
마음이 일어 검이 나간다는 것은.... 적어도 마음이 일어나는 시간이 필요했다네.
상대를 찌르겠다는 그 찰나의 순간....
마음이 일어나는 그 짧은 찰나의 순간만큼은 검이 멈춰있어야만 한다네.
친구....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네.
쾌검이라는 것은 마음이 일기도 전에 이미 뽑혀 나가야하는 것이라네.
그렇다네.... 마음 이전에 의도 意圖가 필요하다네.
자네는 의도란 것이 마음과 차이가 없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사실 이 두 가지는 다른 것이라네.
마음이라는 것.
즉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라는 것은 오롯이 주관적인 의식의 세계.
하지만 생각이라는 것 이전에 마음이 일도록 할 수 있는 이 의도 意圖라는 것은 무의식의 세계에도 존재한다네.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의도는 할 수 있는 것.
그렇다네.
내가 만든 이 수유일검의 일초 검식은 생각 이전에 의도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네.
흘러가는 물이 흘러가겠다고 생각하고 흘러가겠는가?
아닐세.
단지 흐르겠다는 의도.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기 전에.... 즉 마음 이전에 그저 흘러가겠다는 의도.
그 의도대로 검을 찌르는 것이 가장 빠르게 검을 찌르는 유일한 방법이라네.
다소 평범해 보이는 찌르기 일식의 쾌검일 뿐이지만 절대로 이 수유일식을 소홀히 하지 말고 꼭 익혀주게.
어깨가 빠지고 손의 껍질이 벗겨져 신경이 드러날 정도로 고통스럽겠지만 절대로 소홀히 하지는 말아주게. ---
* * *
촤르륵....!
군자명의 몸을 휘감듯이 둘러싸는 여섯 줄기의 쇠사슬과....
여섯 개의 비수가 서로 얽힌다.
그리고....
탱!
팽팽하게 당겨지는 쇠사슬과 함께 빠르게 군자명을 향해 조여오는 도당옥과 두 노인.
"고작 반신영의 신법하나로 우리에게 버티겠다는 것이냐? 더 할 것은 없느냐?"
비웃는 것 같은 도당옥의 말과 함께....
사방이 막혀 도저히 피할 공간이 없는 쇠사슬 속에서 자신을 향해 비수를 돌려 날아오는 상대의 얼굴이 커다랗게 다가오고....
스윽....
검을 쥔 군자명의 오른 손이 움직이는 듯 멈춘 듯 살짝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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