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한 悔恨4
* * *
황무지를 따라 멀어지는 무적의 모습이 지평선너머로 사라진다.
그리고 더이상 무적의 뒷등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돌려 서로를 보는 도당옥과 군자명.
"군자명.... 아니지 설자명이라고 불러야 하겠지?"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도당옥의 입이 열리고....
"어떻게 알았소?"
군자명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묻는다.
"그 물건을 봤네. 다시 한 번 볼 수 있겠나?"
마치 친밀한 후배를 대하는 것 같은 도당옥의 말에 군자명이 왼손을 들어올린다.
그리고....
살짝 내려가는 옷자락 사이로 두터운 쇠뭉치가 그 모습을 보이고....
휘익!
휘파람 같은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밝은 빛이 반짝인다.
"아....!"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기운에 도당옥과 두 노인이 신음 같은 탄성을 발하고....
착!
허공을 향해 솟구쳤던 밝은 빛이 다시 군자명의 왼손으로 돌아온다.
"정말 섬광이군...."
"그렇소. 당신들이 그토록 탐내던 섬광이요."
"미안하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는 도당옥의 말에 군자명이 흠칫 놀란다.
한 가문을 개미새끼 한마리 남기지 않고 도륙하던 저 자들의 입에서 미안하다고....?
"무슨 소리요?"
"무슨 소리라니....? 미안하다고 용서를 구하는 말도 이해하지 못하는가?"
"용서를 구한다고? 당신들이 이제와서....?"
"그래.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지. 하지만 어쩌겠나.... 그 옛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도.... 또 그 탐욕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로 이제는 모두 죽고 없지만 한 번쯤은 용서를 구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당신들이 용서를 구하면 내가 용서해 줄거라 믿고 이렇게 세 사람만 온 것이요?"
"우리가 부탁하면 용서해줄 건가?"
또다시 나오는 예상 밖의 말에 군자명이 멍해진다.
용서해줄 거냐니....?
이 자들 도대체 무슨 수작인가?
말도 못하고 멍하니 자신을 보는 군자명을 향해 도당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용서해주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아무리 자네가 설씨의 후예라 할지라도 어차피 당사자가 아닌 자네에게는 용서해 줄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있네. 하지만 어쩌겠나? 용서를 해주던 해주지않던 한 번쯤은 우리도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라도 해야 우리도 자네에게 빚을 받을 수 있지 않겠나?"
"빚....?"
"그래.... 내 아들과 우리 제자들의 목숨 빚."
당당하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차갑고 오만하게 들리는 도당옥의 말이 나오고 군자명의 얼굴이 꿈틀거린다.
"그 말은.... 당신들의 빚은 꼭 갚아야하고 당신들의 잘못은 단지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끝난다는 것인가?"
"아니지.... 그런 뜻이 아니야. 내가 하는 말은 적어도 과거의 그 일이 우리가 저지른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지.... 오히려 오래전 선조들의 은원을 잊지 못하고 아직도 가지고 있는 자네가 더 꽉 막힌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과거의 은원은 잊고 이제부터는 오히려 내게 당신 자식의 빚을 갚겠다고?"
"결국은 그렇게 되는 것이겠지...."
격앙된 군자명의 말에 도당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습군.... 내가 두려워.... 아니지 광마가 두려워 도망가겠다고까지 말했던 당신들이.... 비겁한 당신들이 내게 빚을 받을 자격이 있기는 할까?"
어느새 도당옥을 향하는 군마명의 말이 차가운 하대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설씨의 아이야.... 너는 뭔가를 잘못 알고 있구나. 설마하니 우리가 정말로 저 피에 미친 광마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느냐? 원래가 사자라는 맹수는 한 번에 두 마리의 토끼를 쫒지는 않는 법이란다."
군자명의 하대가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 것처럼 도당옥의 입에서는 여전히 차분한 말이 나온다.
그리고....
도당옥의 말과 함께 천천히 움직이며 군자명을 품자형으로 둘러싸는 다른 두 명의 노인.
촤르륵....!
쇠사슬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군자명을 둘러싼 도당옥과 두 노인의 양팔목을 타고 쇠사슬이 달린 비수가 흘러내리고....
"이제 그만 끝내자꾸나!"
싸늘한 도당옥의 말과 함께 여섯 자루의 비수가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으로 떠오른다.
웃....!
도당옥과 두 노인의 손에 들린 비수를 통해 자신을 향하는 싸늘한 기운에 군자명이 움찔하고....
피잉!
피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여섯자루의 비수가 군자명을 향한다.
삼면을 둘러싸고 날아오는 파릿한 비수를 향해 군자명의 검이 움직이고....
창!
창!
자신의 상하좌우를 모두 휘감아오는 비수를 군자명의 검이 쳐낸다.
하지만....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허공에서 방향을 틀며 다시 군자명을 향하는 비수가 보이고....
흥!
싸늘한 콧웃음과 함께 군자명의 검이 나비처럼 가볍게 한자루의 비수끝에 달린 쇠사슬 위에 얹힌다.
그리고...
촤르륵....!
비수 끝에 달린 쇠사슬을 따라 비수를 쥔 상대를 향해 미끌어져 들어가는 군자명의 검과....
피융!
허공에서 꿈틀거리며 빠르게 방향을 바꿔 군자명의 손목을 향해 날아오는 한 자루의 비수.
쳇!
자신의 손목과 검을 낚아챌 듯 날아오는 비수와 쇠사슬이 눈에 들어오고....
군자명이 강하게 자신의 검 아래에 붙어 있는 쇠사슬을 때린다.
땅!
그리고....
빠르게 검을 돌려 날아오는 비수를 향하고....
타앙!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튕겨져 날아가는 싸늘한 비수.
하지만....
군자명의 검에 밀려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던 쇠사슬이 강하게 땅을 때리고....
파악!
그 반동으로 마치 영활한 채찍처럼 올라오며 다시 군자명의 몸을 감아온다.
파앗!
자신을 향하는 비수를 피하며 군자명의 왼손이 앞으로 쭉 뻗아나가고....
휘익!
공기를 가르는 휘파람소리가 허공을 울린다.
그와 동시에....
촤르륵!
괴상한 소리와 함께 도당옥의 손에서 쇠사슬을 엮어 만든 것 같은 그물이 펼쳐지고....
티이잉~~!
무거운 쇠가 진동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그물에 갇힌 물고기처럼 철망 鐵網 속을 요동치는 원반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가가각....!
팽이처럼 강하게 회전하는 원반이 철망의 쇠사슬을 끊기 위해 요동치지만....
그물 속의 잉어처럼 퍼덕 거리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마치 그물 속에 든 물고기라도 잡는 것처럼 도당옥이 쇠그물을 휘둘러 요동치는 원반을 땅으로 내려친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철망과 원반이 황무지의 거친 땅속으로 깊숙이 박혀들어가고....
촤르륵....!
철망의 끝을 잡고 있던 도당옥이 손을 놓아 버리자 무너지듯 쇠사슬이 흘러내리며 원반을 삼킨 바닥을 덮어버린다.
아....!
섬광이 막힌 것에 당혹스러워하는 군자명을 향해 다시 두 노인의 비수가 날아오고....
창! 창! 창!
군자명이 빠르게 검을 휘둘러 자신을 향하는 비수를 막아내며 황급히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마치 원반의 무덤이라도 만든 것처럼 두툼하게 올라온 철망의 봉분을 보며 도당옥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장 성가신 것은 해결했군...."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는 도당옥의 눈에 마치 네 마리의 뱀처럼 군자명의 전신을 노리는 비수와....
비수끝에 달린 쇠사슬 사이를 빠르게 움직이는 군자명의 모습이 보인다.
입가에 걸린 야릇한 미소와 함께 도당옥이 슬쩍 양손을 아래로 내리자....
소매속에서 두 자루의 비수가 흘러내려오며 도당옥의 손에 잡힌다.
그리고....
타앗!
빠르게 군자명을 향해 몸을 날리며 비수를 휘두르는 도당옥.
섬광이 막혔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줄 알았던 가문의 섬광이 허무하게 막혀버렸다.
섬광이 막혔다는 충격과 함께 자신을 덮치는 네 자루의 비수.
자신의 온 몸에 구멍이라도 낼 것처럼 날름거리는 파릿한 비수의 칼날과....
막아서는 바위라도 부술 것 같은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쇠사슬이 자신의 몸을 휘감아오고....
피융!
피융!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전신의 살갖을 자극하는 기운 속에서 군자명이 빠르게 움직인다.
하지만....
또다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두 자루의 비수와....
차가운 도당옥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을 옭아맬듯 휘감는 비수와 쇠사슬의 움직임 속에서 군자명의 검이 빠르게 위로 올라가고....
끼이잉~~!
거친 황무지의 먼지 속을 울리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군자명의 검.
"환검....?"
검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기 힘든 기괴한 검명 劍鳴과 눈부신 빛에 도당옥과 두 노인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나오고....
따앙!
따앙!
커다란 망치질 소리.
황무지를 따라 이어진 관도를 울리는 커다란 망치질 소리가 들렸다.
군자명의 검에서 울려나오는 검명이 들리는 바로 그 순간....
군자명을 옭아맬듯이 휘감고 있던 비수와 쇠사슬이 서로 부딪치고....
망치로 쇳덩이를 내려치는 것 같은 커다란 소리가 울리며 환검의 검명을 삼켜버린다.
그리고....
타타탕!
경쾌한 소리와 함께 군자명의 검을 휘감는 쇠사슬.
여섯 마리의 뱀처럼 비수와 그 끝에 달린 쇠사슬이 서로 부딪쳐 큰 소리를 내며 환검의 섭혼검음 聶魂劍音을 막는다.
그리고 다시 군자명의 검을 휘감아서 섭혼검광 聶魂劍光을 없애버린다.
그렇게 검음과 검광이 사라진 환검은 본래의 위력을 잃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상황에 당황한 군자명이 이번에는 검을 쥔 손에 강하게 공력을 밀어넣는다.
쩌르릉!
마치 뇌성 같은 소리와 함께 쇠사슬에 묶인 검이 진동하고....
따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군마명의 몸이 뒤로 밀려 날아간다.
아....!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나는 몸을 바로 잡는 군자명의 눈에....
정말이지 살아있는 생물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비수의 모습이 보인다.
고개를 든 뱀처럼 허공으로 곤두선 채 작게 진동하는 쇠사슬과 비수의 모습.
마치 자신의 파검처럼 진동하는 비수의 떨림에 군자명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다.
맨 처음 섬광이 막혔다.
그리고 환검이 깨지고.... 이번에는 파검이 밀렸다.
어떻게 해야....
잔뜩 긴장한 채 상대를 주시하는 군자명의 귀에 담담한 도당옥의 음성이 들린다.
"설씨의 아이야.... 더 해볼 것은 없느냐? 혹시 중검은 아직 익히지 못한 것이냐?"
중검....?
환검과 파검도 깨져버렸는데....
"원한다면 중검도 보여주지....!"
파앗!
이빨을 꽉 깨물며 군자명이 도당옥과 두 노인을 향해 빠르게 몸을 날린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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