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한 悔恨2
약간은 초췌해진듯한 신녀의 모습에 무적이 열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돌리고....
신녀를 뒤따라 나오던 홍혜령이 야릇한 눈으로 무적을 본다.
그리고....
"이곳에서 조 대협의 건강한 모습을 보게 되네요. 그리고 군 대협도 반갑습니다."
신녀가 맑은 음성으로 무적과 군자명을 향해 입을 열고....
말을 해....?
천상의 옥음같은 신녀의 음성에 군자명이 멍한 얼굴로 신녀의 얼글을 본다.
벙어리처럼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하고 수화를 통해 맹노와 이야기를 나누던 신녀가 말을 한다.
그것도 저런 아름다운 목소리로....
기가 막혀서....
"궁주님.... 괜찮으세요?"
다시 신녀가 타말을 향해 묻고 타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예. 저는 괜찮습니다."
자신을 향해 답하는 타말의 모습에 신녀의 눈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안타까움과 미안함....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는 야릇한 눈빛.
"제게 더 묻고 싶은 것이 없으시면 그만 나가죠?"
네 사람을 돌아보며 입을 여는 신녀의 말에 무적이 먼저 등을 돌리고....
제갈식이 석벽의 한곳을 누른다.
드르륵....!
다시 열리는 천정과 함께 무적의 일행이 지하를 빠져나오고....
와불이 있는 커다란 식실의 옆으로 보이는 작은 석실에 자기집 안방인 듯 편하게 누워있는 당풍호와 가종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 저런 인간들이....
제갈식이 기가 막힌 얼굴로 누워있는 두 사람을 보고....
서로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두 사람의 주위로 바쁘게 움직이는 곡도혼과 주작단의 살수들.
"저들은 어쩔거요?"
무적이 군자명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묻고....
군자명이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저들은 황궁의 사람들이라....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군자명의 앞으로 제갈식이 불쑥 나선다.
그리고....
"그냥 놔두고 가요!"
심통맞게 말하며 당풍호와 가종덕을 한 번 돌아본후 제갈식이 앞서 나가고 무적이 잠시 두 사람의 모습을 본후 일행의 뒤를 따른다.
몇 개의 석실을 지나고 동굴을 나온 일행의 눈에 입구에 덩그러니 묶여있는 구민차가 보이고....
"....!"
알 수 없는 괴상한 주문과 함께 제갈식이 동굴입구의 마니차를 한바퀴 돌린다.
기둥처럼 세워진 마니차를 한바퀴 돌리면 불경을 한 번 읽은 것과 같다는 마니차.
마니차를 한 바퀴 돌린 제갈식이 일행을 돌아보며 밝게 웃는다.
"반나절 정도만 지나면 저들도 나올 수 있을 거에요...."
마치 개구쟁이 같은 제갈식의 모습에 신녀는 가벼운 웃음으로....
무적은 뚱한 얼굴로 쳐다봤다.
저 살벌한 진을 고작 저 마니차 하나로 통제하고 움직인다니....
* * * * *
제법 깨끗하게 정리된 방.
그리고 그 방의 한쪽에서 반듯한 외관에 단정한 모습을 한 청년이 시체처럼 미동도 없이 침상에 누워있는 여인을 안스럽게 쳐다보고있다.
용모를 분간하기 힘들만큼 수많은 주름으로 덮여있는 초췌한 얼굴.
하지만 이 늙어버린 얼굴이 바로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얼굴이다.
아니.... 불과 얼마전까지 자신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보여주던 아름다운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도대체 이 깊은 주름으로 뒤덮혀있는 얼굴의 어디에서 그 아름답던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해 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어머니...."
주름으로 가득한 여인을 향해 청년이 나즈막히 입을 열고....
두 손을 뻗어 이불 밖으로 나와있는 여인의 손을 살며시 잡아본다.
차갑다.
마치 얼음물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차가운 어머니의 손.
여인의 손을 소중하게 보듬으며 청년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양볼에 여인의 차가운 손을 비벼본다.
어린시절 자신의 뺨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어주던 그 따스했던 손이 지금은 얼음처럼 차갑다.
아니.... 이제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는 듯 그 따스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만져주지도 못한다.
청년의 두 눈에 옅은 물기가 고이며 자신의 손안에 있는 여인의 손을 소중한 보물처럼 더 힘껏 보듬으며 뺨에 비빈다.
그리고....
"아르.... 마르함!"
청년의 입에서 내용을 알 수 없는 괴이한 주문이 나오고....
청년.... 운명이 홍두라는 이름을 준 청년의 전신에서 먹처럼 검은 기운이 올라온다.
홍두의 몸에서 올라온 기운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동안 그의 주위를 맴돌더니....
조심스럽게 여인의 전신을 감싸안는다.
".... 마르함!"
다시 한 번 홍두의 입에서 짧은 주문이 나오고 여인의 몸을 감싼 짙은 기운이 여인의 몸 이곳저곳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한다.
자신을 두드리는 검은 기운의 힘에 누워있는 여인의 몸이 몇 차례 꿈틀거리지만....
일어나지도.... 눈을 뜨지도 못하는 여인.
그리고....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여인의 몸을 건드리던 짙은 기운이 다시 홍두의 몸으로 돌아오고....
홍두가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여인의 손을 놓으며 이불아래로 넣어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어머니의 몸 속에서 단 한점의 마기도 느낄 수가 없는 것일까?
도대체가 어떤 일이 있었기에....
마술 같은 환술 幻術로 무장한 마안의 마기가 단 한점도 남아있지 못하고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라는 말인가?
답답한 한숨과 함께 늙어버린 마안의 얼굴을 보는 홍두의 귀에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나이를 짐작키 어려운 노인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아버님...."
홍두가 일어나 조심스럽게 노인에게 허리를 숙이고....
가볍게 방안을 둘러본 노인이 홍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있을테니 너는 좀 쉬도록 하거라."
"예...."
홍두가 공손하게 대답하며 등을 돌려 방을 나가고....
"그런데 홍두야...."
"네?"
방문을 열던 홍두가 멈춰서며 고개를 돌려 노인을 쳐다본다.
"내가 찿으라고 했던 것.... 혹시 찾았느냐?"
"아직...."
홍두가 살짝 말을 흐리며 노인을 봤다.
무언가 할말이 있지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빛이 가득한 홍두의 얼굴이 보이고....
노인이 그런 홍두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하고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저.... 한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뭔지 말해보거라."
"제가 찾아야 하는 그 여인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홍두가 심각한 얼굴로 노인을 향해 묻고....
노인의 눈에 반짝하는 빛이 스쳐지나갔다.
이제 이 아이에게도 모든 이야기해줄 때가 온 것인가....?
홍두를 쳐다보던 노인의 눈길이 침상의 여인에게로 향하고 조심스럽게 입이 열린다.
"그녀는 천축의 신녀라는 여인이다. 그리고 우리의 오랜 숙원을 풀어줄 수 있는 열쇠다."
열쇠....?
홍두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오르고 노인이 손짓으로 홍두에게 자리를 권했다.
언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 혈마가 이땅에 나나타났고 혈마에게는 그를 따르는 두 명의 종이 있었다.
바로 혈뇌와 마안.
그렇게 혈마는 자신을 따르는 혈뇌와 마안에게 자신의 영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만한 인간을 찾으라고 명했고....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육신이 없었던 혈마는 자신의 영을 희생해 백 명의 혈영을 만든 후 그들을 통해서 한 번씩 세상에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혈영은 죽음을 부르는 마물일 뿐 혈마를 담을 그릇은 아니었다.
결국 자신의 영을 담을 그릇을 찾을 수 없었던 혈마는 또 다른 한명의 혈영을 만들어 혈왕이라고 부르며 그 혈왕의 몸에 자신의 영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게 혈왕의 몸을 통해 천하를 보던 혈마가 천 년전 갑자기 세상을 피로 씻고 죽은 자들의 세상을 만들겠다며 피의 행보를 시작했고....
천하혈세의 뜻을 이루기 직전 정존이라는 절대의 영웅이 등장해 결국 혈마는 정존의 손에 육신이 죽고 그 영은 다시 혈지라는 결계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그 후 천 년.... 그 오랜 시간동안 혈마는 다시는 세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혈마의 영도 혈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혈마가 그 혈지를 벗어날 방법은 오직 하나.
혈마의 두 종중에 한 명인 혈뇌가 혈마의 영이 들어갈 육신을 구한 후 주술로 혈마를 깨워야 하는데 그 혈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혈마를 깨울 수 있다는 혈뇌도.... 천하의 구석구석을 모두 볼 수 있다는 마안도.... 아니 그들이 아닌 천하의 누구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넓은 천하에서 단 한 사람.
오로지 대자재천의 종이라는 천축의 신녀만이 그 세 곳의 결계를 모두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천축의 신녀가 지금 이곳 중원에 들어와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다는 혈지를 그 신녀는 어떻게....?"
거짓말 같은 이야기에 홍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인을 쳐다봤다.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처음 혈마가 갇힌 그 결계는 대자재천이 만든 결계라고 했다. 당연히 그 결계를 만든 대자재천의 종도 그곳을 알것이고.... 아무튼 꼭 혈지를 찾고 혈마를 깨워야 할 우리 혈왕궁으로서는 그 신녀라는 여인이 필요하다. 네 어머니가 더 이상 그녀를 쫒을 수 없다면 네가.... 마안을 물려받은 네가 꼭 그녀를 찾아야한다."
"그런데 혈왕궁의 전설에 나오는 혈마는 천년도 더 된 오래전 이야기.... 과연 혈지가.... 아니 혈마가 존재하기는 하겠습니까?"
"오래전 이야기라.... 홍두야 애비가 네게 준 책은 아직 가지고 있느냐?"
"책이요....?"
가지고 있기는 하되 절대로 읽지는 마라!
자신의 아버지가 전해주며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 많은 일기인지 책인지 모를 야릇한 서책.
"예. 가지고 있습니다."
"읽어봤느냐?"
"아직...."
살짝 끝을 흐리는 홍두의 말에 혈뇌의 얼굴에 괴이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분명히 자신의 아들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지만....
독하지가 못하다.
그리고 임기웅변도 부족하다.
보지말란다고 보지 않았다니....
"오늘부터는 그 책을 읽어도 된다."
"예....?"
"그 책을 읽으면 혈마의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 이 애비의 숙원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홍두야! 반드시 그 신녀라는 여인은 찾아야 한다. 이제는 너뿐이다. 네 어머니가 없는 지금 우리는 너 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 알겠느냐?"
"그녀를 찾기만 하면 됩니까?"
"그래. 너는 찾기만 하면 된다. 그녀를 데려오는 것은 내가 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손으로 반드시 혈지를 찾도록 만들어야겠지...."
"알겠습니다."
혈뇌의 말에 단호하게 답하며 홍두가 일어난다.
그리고....
한 발짝을 떼던 홍두가 흠칫 놀라며 멈춰서고....
갑자기 홍두의 머리위로 떠오르는 붉은 눈동자.
마치 맹수의 눈처럼 붉은 핏발이 곤두선 눈동자가 홍두의 머리위로 떠오르며 한 곳을 노려본다.
그리고....
달리는 마차안에 앉은 채 자신을 보고있는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신녀....?"
* * * * *
덜커덩!
덜커덩!
관도를 따라 빠르게 달리는 마차의 옆으로 한쪽은 나즈막한 기련산맥의 얕은 지류가 보이고....
한쪽으로는 마차와 경주라도 하는 것처럼 늘어선 울창한 숲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갑자기 마부석에 앉아서 말을 달리던 무적의 몸이 허공으로 솟아오르고....
피윳!
피윳!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적의 손에 들린 칼이 허공에 몇 개의 사선을 만들어낸다.
크아악!
무적의 움직임과 함께 아무것도 없던 빈 허공에서 울려퍼지는 괴로운 비명과 함께....
마치 하늘이 갈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벌려지며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핏줄기.
그리고....
파앗!
바닥으로 내려서는 무적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땅바닥과...
우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땅을 뚫고 올라오던 자들이 짓눌리듯이 다시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끄으윽....!
괴로운 신음과 함께 바닥을 뒹구는 자들 사이로 허공에서 떨어지 듯 몇 명의 인물이 힘없이 떨어져내리고....
쿵!
바닥을 울리는 묵직한 소리 속에 무적이 고개를 돌려 군자명을 돌아봤다.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 일이요."
차가운 무적의 말에 군자명이 머쓱한 듯 손안의 검을 검집에 넣는다.
"미안하오."
잠시 군자명을 보던 무적이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져있는 자들을 봤다.
분명히 자신이 기다리는 자들은 아니다.
그런데 기련산맥을 벗어나자 벌써 세 번이나 습격을 받았다.
이들은 또 누굴까?
나를 노리는 자들인가?
아니면....
"누군가요?"
"이자들은 살막 殺幕이라는 곳의 살수들입니다."
쓰러진 자들을 살피는 무적의 귀에 신녀와 제갈식의 말이 들리고....
팔랑거리며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반짝이는 얊은 천이 한장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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