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불동 萬佛洞5
홍혜령의 손에 들린 금침이 제갈식의 인중을 찌르고....
제갈식의 두 다리가 튀어오를 듯 움찔거린다.
동시에 군자명의 두 손에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제갈식의 양발목을 눌렀다.
큭....!
괴상한 신음소리가 제갈식의 입에서 튀어나오고 양다리가 눌린 제갈식의 상체가 마치 강시처럼 벌떡 일어난다.
끄으윽....!
두 눈을 감고있는 제갈식이 괴로운 듯 상체를 조금 떨더니 다시 뒤로 넘어지고 홍혜령이 재빨리 제갈식의 몸을 받치며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제갈식의 하체를 따라 전신을 도는 군자명의 기운.
"대협...."
홍혜령이 이번에는 무적을 돌아보고....
무적의 두 손이 제갈식의 무릎에 닿는다.
그리고 무릎을 시작으로 제갈식의 전신을 주무르기 시작하는 무적.
얼마나 제갈식의 몸을 주물렀을까?
무적과 군자명의 이마에 옅은 땀방울이 베어나오고....
홍혜령이 제갈식의 인중에 꽂아둔 금침을 뽑아낸다.
쿨럭....!
격한 기침과 함께 한 덩어리의 피를 토해내고....
한웅큼의 울혈과 함께 전신의 혈류가 다시 돌기 시작하는 듯 제갈식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며 살며시 눈을 뜬다.
"혜령아.... 내가 또 너를 번거롭게 했구나...."
홍혜령을 보며 중얼거리는 제갈식의 말에 그녀의 눈에 옅은 물기가 고였다.
어린시절 우연히 자신의 가문을 찾아온 제갈식.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자신의 집을 찾은 이 어린 천재는 자신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자신과 보광장만이 천하에서 제일인줄 알고있었던 오만한 어린 여자아이의 눈을 뜨게 해주었던 천재.
"뭐야? 이글도 못 읽어?"
자신은 밤을 새워 낑낑거려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그 어려운 의서를 지나가는 눈길로 한 번 보고는 해석해주던 이 병든 천재는 그날이후 자신의 우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우상이.... 어린 여아의 방심을 흔들어놓은 그 우상이 죽어간다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 얼마나 울었던가?
그렇게 몇 날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후....
정말로 모든 즐거움도 잠도 잊고 의술을 익혔건만 아직도 자신은 그 우상을 살려낼 방법이 없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진 우상에 대한 그 애처러움은 결국 상대에 대한 사랑으로 변해버렸고....
아직 자신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저렇게 한 번씩 죽다 살아날 때마다 정말이지....
"이번에는 두 분 대협께서 오라버니를 살려 주셨어요."
애써 무감정하게 말하는 홍혜령의 말에 제갈식이 살짝 놀란다.
추궁과혈 推躬過血....?
주섬주섬 작은 상자에 다시 넣는 금침의 모습에서 홍혜령이 홍씨세가의 비전이라는 환혼침 還魂針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자신을 살려줬다면....?
저 두사람이 이미 자신의 조부를 능가하는 경지라는 말인가?
아무리 와룡과 보광의 무공이 다른 가문에 비해서 반 수 가량 밀린다고는 하지만....
아니.... 그보다 이제는 환혼침만으로는 깨어날 수도 없을만큼 혈맥이 굳어버렸구나....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포권하는 제갈식의 모습에 군자명은 담담한 얼굴로....
무적은 차가운 얼굴로 그를 본다.
그리고....
"괜찮은가?"
차가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조금은 걱정스러운 무적의 음성에 세 사람의 얼굴에 의외라는 듯 살짝 놀라는 표정이 떠오른다.
저 차갑고 잔인한 자가....?
"예. 원래 제가 몸이 조금 약해서요. 두 분 대협께서 손을 써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억지로 밝은 웃음을 지어보이는 제갈식의 모습에 무적의 차가운 얼굴이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빌어먹을....
왜 다들....
처음으로 타인이 몸속에 자신의 진기를 넣어봤다.
자신이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야릇한 기분도 잠시....
마치 딱딱하게 굳어버린 황토흙처럼 진기가 움직이기도 힘든 제갈식의 경맥이 느껴졌다.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운 혈맥을 뚫고 억지로 진기를 밀어넣으며 제갈식의 경맥을 뚫어보지만....
금방 다시 굳어버리고 막히는 경맥.
온몬의 혈행이 원활하지 못하면 전신의 경맥과 혈맥은 물론이고 근육마저도 굳어버린다고 듣기는 했지만 어떻게 저 몸으로....
단지 사막에서 자신을 구해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라도....
당장 심장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을 저 엉망인 몸으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웃어보이는 이 수다스러운 인간의 모습에서 자신을 위해 희생한 아내와 동생들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그리고 길평....
"무적! 내가 생각하는 친구는 친구를 위해 대신 죽어줄 수 있는 그런 사이다. 우리는 친구지? 그렇지 무적?"
살을 에는 추위에 몸을 떨고 주린 배를 움켜쥐던 어린시절....
오물찌꺼기 속에서 건져 올린 얼어붙은 한조각의 만두를 깨서 나눠주는 자신을 향해 다짐하듯이 물어오던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애절한 눈빛.
험하고 두려운 세상에서 의지할 곳 없는 천애고아가 또다른 고아에게 기대며 의지한다.
그래.... 친구.
우리는 대신 죽어줄 수 있는 사이다.
"움직일 수 있겠소?"
갑작스런 군자명의 말에 무적이 짧은 상념을 끊고 제갈식을 돌아봤다.
"예. 한 번씩 쓰러졌다 일어나면 한동안은 괜찮습니다. 그럼 가볼까요?"
방긋이 웃으며 등을 돌려 앞장서는 제갈식의 모습에 무적의 얼굴이 다시 굳어진다.
수다스러운 인간.
하지만....
* * * * *
크아악~~!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요!"
으아악~~!
온산을 울리며 자신의 귀를 자극하는 고통스런 비명소리에도 불구하고 초일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허술한 모옥안을 둘러봤다.
굵은 통나무를 잘라 기둥을 세우고 칡넝쿨로 묶어 벽을 만들어 고정시킨 후.... 온갖 나뭇잎으로 지붕을 덮어놓은 초라한 모옥.
그리고 그 모옥의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나무침상 하나.
엉성하게 만든 침상위로 짐승의 가죽인듯한 것이 깔려있고....
침상의 중앙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움푹 꺼져있는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침상의 곁으로 마치 벽이라도 만든 것처럼 천정에서부터 내려오는 짐승가죽과 한쪽으로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차일 같은 문이 보인다.
초일이 천천히 차일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자....
첫번째 방과 마찬가지로 침상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작은 방이 하나 나타난다.
초일이 작은 침상위에 깔려있는 가죽을 살펴보고....
돌아서 나와 입구에 있는 방의 침상도 다시 한 번 살펴본다.
이곳에 있었던가....?
작은 침상의 기다랗게 눌린 자국으로 봐서 작은 방의 침상에는 신녀라는 그 여인이 누워있었고 이 입구의 큰 방에는 법륜궁주라는 그 자가 신녀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없다.
그렇다면 움직였다는 것인데.... 과연 어디로 갔을까?
으아악~~!
신녀의 행방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초일의 귀에 다시 째지는 것 같은 비명이 들리고....
모옥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온다.
"이곳이 확실한가?"
모옥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온 음부경이 초일에게 묻고....
"여기 있었던 것이 맞는 것 같네. 그런데 저들에게서는 필요한 것을 알아냈는가?"
얼음장 같은 음부경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떠오르고....
"저들은 아무것도 모르네."
"모르다니....?"
초일이 의아한 눈으로 음부경을 봤다.
"저들은 신녀라는 여인을 본 적도.... 아니 이곳에 이 허름한 모옥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네."
"저 산적들이 자신들의 산채안에 있는 모옥도 모른다고....?"
"그렇네. 저들 중 아무도 이 모옥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네."
무슨 소리야....?
자신들의 산채안에 이렇게 버젓이 있는 모옥을 보지도 못했다고....?
설마....?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보는 초일을 향해 음부경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아마 절정의 섭혼술인 것 같네."
"섭혼술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저 많은 산적들이 똑같이 섭혼술에 걸려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수가 있는가?
아니.... 도대체가 어떤 섭혼술이기에 바로 눈앞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한다는 것인가?
"그럼 저들은...."
"그렇네. 분명히 저들이 이 모옥을 만들고 신녀를 보호 한 것은 맞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네."
미칠 노릇이군....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나....
신녀를 찾기위해 기련산의 구석구석을 뒤졎고 결국 이 동봉 東峰에서 그 흔적을 찾았다.
그런데....
이곳을 떠났다면 어디로 갔을까?
아직도 이 기련산맥의 어느 곳에 숨어있을까?
아니면....주인의 말처럼 하서회랑을 거쳐 천산을 지났을까?
"부경...."
나즈막한 초일의 음성에 음부경의 눈에 반짝하는 빛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왜?"
"부탁하나만 하자. 오색검기중 하나를 데리고.... 아니 황검기 黃劍旗의 인원을 모두 데리고 하서회랑으로 좀 가주겠나?"
"하서회랑?"
의아한 듯 되묻는 음부경의 말에 초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하서회랑에서 그 여인의 흔적을 발견한다면 내가 갈 때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그녀의 발길을 막아주게. 하지만 그녀가 천산을 지나 천축으로 들어갔다면.... 그때는 더 이상 쫒지말고 돌아오게."
"알겠네."
음부경이 단 한마디의 반문도 없이 곧바로 등을 돌렸다.
초일이 부탁이던 지시던 자신에게 어떤 것을 요구한다면 음부경은 항상 망설이지 않고 그자리에서 행동으로 옮긴다.
친구이기에.... 또 자신이 모시는 보주이기에....
그렇게 음부경은 초일의 지시를 따라 곧바로 움직였다.
그리고....
문을 열고 모옥을 나서는 음부경의 뒤를 따라 초일이 밖으로 나왔다.
으아악~~!
밖으로 나오는 초일의 눈에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고기처럼 나무에 주렁주렁 걸린 채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는 산적들의 모습이 들어오고....
"청검기주 靑劍旗主!"
"예!"
초일의 외침에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와 허리를 숙인다.
"이 산채 주위의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정리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봉 西峯으로 이동한다."
"예. 보주님!"
서둘러 움직이는 청검기주의 등뒤로 초일이 고개를 돌려 멀리 보이는 기련의 설산을 올려다봤다.
설령 저 얼음속에 몸을 숨겼더라도 반드시 찾아낸다.
* * * * *
석실에서 석실로....
아직도 작은 통로처럼 이어진 수많은 석실을 지나자 이번에는 제법 넓은 석실이 하나 나타난다.
그리고....
넓은 석실안을 가득 채운 채 외롭게 누워있는 불상하나.
드물게 보이는 누워있는 와불상 臥佛像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왼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다리를 꼰 채 빈듯이 누워있는 와불의 모습에 일행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
살면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이 괴상한 모습의 불상에 놀라는 세 사람을 돌아보며 입을 여는 제갈식.
"다 왔습니다. 여기에요."
"여기라고....?"
넓은 석실안을 가득 채운채로 누워있는 기묘한 와불.
하지만....
그게 전부다.
불상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넓은 석실.
그 어디에도 맹노도.... 신녀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을 가득 담은 세 사람의 눈길이 제갈식에게로 모이고....
제갈식이 방긋이 웃으며 와불의 커다란 귀를 살짝 건드린다.
그리고....
그르릉....!
마치 커다란 돌이 밀려나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와불의 등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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