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웅조우 雙雄遭遇2
* * * * *
"고 노인이라고 했소?"
"예."
남궁 일평은 자신의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노인을 봐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니.... 남궁 일평의 머리속에는 온통 한 사람의 모습만이 일렁거린다.
광마라니....
"그날 고 노인은 어디에 계셨소?"
"저희들은 객점에서 말에 건초를 먹인 후 쉬고 있었습니다."
"장 평.... 그러니까 장 국주가 죽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막씨세가로 간거요?"
"막가장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장주님을 모셔가라고...."
"뭐라고 하던가요? 죽었다고 하면서 데려가라고 하던가요?"
"아닙니다. 그냥 데리고 가라고만.... 그래서 가보니 이미...."
"죽어있었소?"
남궁 일평은 장 평에 대한 자신의 표현이 약간은 이상했던지 여인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다.
"예."
"장 국주의 시체를 모셔올때 그곳에서 혹시 다른 자는 보지 못했소? 가령 다리를 저는 자라던지...."
고 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 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알겠소. 나가보시고.... 다른 사람에게 들어오라고 해 주시겠소?"
"예. 나으리."
고 노인이 나가고 다음 사람이 들어오고....
처음과 같은 질문에 같은 답변.
두 번째 사람이 나가고 세 번째 사람이 들어왔다.
또 같은 질문에 같은 답변.
그리고....
네 번째 사람이 들어왔다.
남궁 일평은 이번에도 기계적으로 같은 질문을 했고 네 번째 하인도 앞선 사람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답변을 했다.
"그만 나가보시고.... 다음 사람에게 들어오라고 해 주시겠소?"
이미 무적이 흉수라고 마음을 굳힌 남궁 일평에게는 여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런 요식행위가 지겨워졌다.
빨리 나머지 한 사람에게도 의미없는 질문을 하고 광마를 찾아나선다.
지금 남궁 일평의 마음속에는 무적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저.... 그런데...."
일어나려던 하인이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왜 그러시오?"
하인이 남궁 일평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여인을 돌아봤다.
"뭔데 그러느냐?"
여인의 입이 열리고....
"마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무슨 소리냐?"
뜬금없는 하인의 말에 여인의 입에서 큰 소리가 나오고....
하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바닥에 엎드린다.
"사실 저희들은 장주님의 시신을 모셔오지 못했습니다."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남궁 일평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저희들은 그날 술에 취해서 객점에 쓰러져 잠들었습니다. 도대체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취했던 건지.... 일어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저녁이 되어서야 우리들이 깼는데.... 그때는 이미 장주님과 표사들의 시신이 실린 마차가 객점에 와 있었습니다."
"너희들이 가지 않았다면 장주님의 시신은 누가 모셔온 거냐?"
여인의 음성이 갑자기 차가워진다.
"고 영감이 우리가 자는 동안 혼자서 모셔왔다고.... 아무리 깨워도 술에 취한 우리가 일어나지를 않는다며.... 마님! 정말 술은 몇 잔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고 노인 말고는 아무도 잠에서 깨지 못했나?"
남궁 일평이 황급히 끼어들며 물었다.
"예. 고 영감만 혼자만 술을 마시지 않아서...."
"그런데 왜 함께 가서 모셔왔다고 한 건가?"
남궁 일평의 말에 사색이 된 하인이 바닥에 더욱 깊이 엎드리며....
"고 영감이 그렇게 말하라고.... 그래야 저희들이 화를 당하지 않는다고.... 만약 술에 취해서 장주님의 시신을 모셔오지 못했다고 한다면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죄송합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요. 마님!"
"잠깐 고개를 들어보시오."
남궁 일평이 하인의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하인의 두눈을 까짚어봤다.
보통 사람의 눈과는 다르게 눈꺼풀 안쪽으로 끼어있는 하얀 백태가 잔뜩 보인다.
미혼약....?
눈안쪽으로 잔뜩 끼어있는 백태가 미혼약의 기운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미혼약에 취해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고 노인이라는 자는 잠이 들지 않았다.
이건....?
남궁 일평이 여인을 한 번 돌아본 후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대청아래 모여있는 하인들의 앞으로 가서 하나하나 눈꺼풀을 뒤짚어본다.
역시....
모여있는 하인들의 눈에 아직도 미혼약의 기운이 남아있다.
남궁 일평이 몸을 돌려 마지막으로 고 노인의 눈을 까짚어보고....
백태가 끼지 않은 맑은 눈동자가 나타난다.
"무림의 열두 가문 중에는 보광장이라는 곳이 있소."
고 노인의 얼굴에서 손을 떼며 뜬금없는 말이 남궁 일평의 입에서 나온다.
"천하에 못 고치는 병이 드물고 못 만드는 약이 없다는 이 보광장의 가주가 언젠가 열두 가문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소. 잠을 자도 편치 않고 뭔가 기억이 날듯 말듯 한데도 불구하고 기억이 흐리다면 먼저 미혼약에 중독된 것을 의심하라고...."
어리둥절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고 노인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었소. 미혼약에 중독되면 그 순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잠들 게 되는데 굳이 그것을 확인할 시간이 있느냐고.... 그리고 자신들은 미혼약 정도에는 중독도 되지않는다고.... 그러자 보광장의 가주께서 그런 말을 했소. 제자들은 중독될 수도 있지 않느냐고.... 이해하기 힘든 그런 일이 생겼을때는 우선 미혼약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광장의 가주께서 말하기를 미혼약에 중독되면 오랫동안 눈안에 백태가 남으니 그걸로 의혹을 풀 수도 있지 않느냐며.... 그렇게 말씀하셨소. 고 노인.... 당신이 같이 간 사람들을 미혼약으로 재우고 장 국주와 사람들을 죽인거요?"
인상을 찡그리며 남궁 일평의 말을 듣고 있던 고 노인이 화들짝 놀란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이들에게 미혼약을 먹여 잠재운 후 막가장으로 가서 사람들을 죽였느냐 그 말이오?"
"마님! 저는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그런 천벌을 받을 짓을 한다는 말입니까?"
고 노인이 여인을 향해 억울하다는 듯 하소연을 하며 바닥에 엎드린다.
그리고 천천히 노인을 향해 다가가는 여인.
"고 영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이야기 해주세요."
여인이 고 노인의 앞에까지 와서 묻자 고 노인의 고개가 들린다.
"마님.... 저는...."
"예. 말해보세요."
"저는...."
울먹이는 것처럼 여인을 보던 노인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하고....
"이 요망한 년! 죽어라!"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여인을 향해 왼손을 뻗어낸다.
파앗!
빠르게 뻗어나가는 왼손에서 파릿한 빛이 반짝이고....
서걱!
무엇인가를 자르는 소리와 함께....
으아악!
고통에 찬 고 노인의 비명이 들린다.
그리고....
잘려져 나온 고 노인의 왼손에 쥐어져있는 작은 비수와 뿜어져 나오는 강한 핏줄기.
"왜....? 왜 이 요망한 년을...."
원독에 가득 찬 눈으로 검을 들고있는 남궁 일평을 노려보는 노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독....?
당혹스러워하는 남궁 일평의 눈에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고 노인과 핏물을 뒤짚어쓴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 * * * *
제갈 식이 두 개의 죽그릇을 들고 들어오고....
침상에 기대고 있던 타말이 몸을 일으킨다.
"고맙네."
"아닙니다."
힘겹게 나오는 타말의 말에 제갈 식이 안쓰럽게 타말을 보고....
타말이 한 그릇은 받아서 자신의 침상에 내려놓고 하나만 들고 커다란 발이 쳐져있는 옆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살짝 열리는 커다란 발 사이로 죽은 듯이 누워있는 신녀의 모습이 제갈 식의 눈에 들어온다.
어떡해야하나....
급한대로 두 사람을 데리고 산적들의 산채로 왔다.
그리고 몇 개의 망원진을 겹쳐서 펼치며 산적들에게 자신들을 돌보라는 암시를 걸었고....
이곳에서 두 사람을 치료하고는 있지만....
하아....!
타말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신녀의 등을 받쳐 일으키고 묽게 쓴 죽을 몇 숟가락 떠먹인다.
하지만....
물처럼 묽은 죽 조차도 삼키지 못하고 입안에 물고만 있는 신녀.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먹이게 되면 저작기능 咀嚼機能.... 즉, 입안으로 들어온 음식을 씹을 수 없기 때문에 충분한 침도 생기지않고 제대로 삼킬 수도 없다.
그래서....
탁! 탁!
가볍게 신녀의 등을 두드려 입속의 죽을 삼키게 하고....
적당한 양을 먹었다고 생각되자 다시 신녀를 눕힌다.
그리고 다시 방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
미음처럼 묽은 죽을 마시는 타말의 눈에 궁금증으로 가득 찬 제갈 식의 얼굴이 보인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가?"
타말의 물음에 제갈 식이 슬쩍 주위를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궁금해서요."
"궁금해....? 뭐가 그렇게 궁금한가?"
"그 상처.... 괜찮으십니까?"
타말의 왼쪽 옆구리의 상처를 중심으로 복부를 칭칭 동여맨 두꺼운 천이 눈에 들어왔다.
옆구리의 상처가 걱정된 자신의 응급처치.
그리고 가문에서는 간혹 만사무불통지 萬事無不通知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의학에는 아직 조예가 얕은 자신의 눈에도 이상해 보이는 상처. 도대체가 며칠이 지나도 아물 기미가 보이지를 않는다.
"안 괜찮을거네."
"설마 위험한가요?"
"글쎄...."
타말이 말을 흐렸다.
상처가 낫기는 커녕 더 깊어만 간다.
애초에 타미르의 창을 얕보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니.... 첩혈모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크다.
설마 첩혈모가 자신의 철벽기를 뚫어낼 줄이야....
첩혈모 疊血矛.
아주 오랜 옛날 대영웅을 도왔다는 신장 神匠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이 괴상한 창은 금강불괴의 몸도 뚫을 수 있다는 전설속의 기병이었다.하지만 전설은 전설일뿐 금강불괴라는 것도 전설이 뿐인데....
그리고 첩혈모는 아주 오래전 모습을 보인 후 지금까지 세상에 그 모습을 보이지않아 그렇게 전설속의 물건으로만 회자되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줄 알았던 사악한 창.
그런데.... 타미르가 첩혈모를 가지고 왔다.
금강불괴도 뚫는다는 그 악마의 창을....
과연 전설처럼 금강불괴를 뚫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자신의 철벽기는 뚫어냈다.
그리고....
첩혈모의 악마 같은 마력.
지금도 첩혈모에 당한 상처를 통해서 전신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억지로 공력을 운기해 피가 흐르는 것을 막고는 있지만 결국 이 상처로 인해 자신은 죽을 것이다.
전신의 피를 모두 빨아먹는 마물.
이 상처로 인해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저 말 많은 놈이 어떤 표정이 될까?
"신녀께서도 저렇게 의식이 없으시고.... 대협도 몸이 성치 않으신데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떡하면 되겠나?"
"그걸 제게 물으시면....?"
타말이 제갈 식을 가만히 봤다.
그리고.... 유약해 보이는 제갈 식의 얼굴 위로 무쇠 같은 느낌을 주는 얼굴이 하나 떠오른다.
이제 믿을 놈은 저놈 뿐인가?
눈앞의 이 황당한 놈이 내가 죽기 전에 그를 데려와 줄 수만 있다면....
아니.... 그가 은혜를 잊지 않고 이곳으로 와 준다면....
어쩌면 신녀만이라도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고개를 돌려 발이 쳐진 방을 한 번 돌아본 후....
타말이 입을 열었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부탁....?
제갈 식이 의아한 눈으로 타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하십시요."
"한 사람을 찾아서 데리고 올 수 있겠나?"
타말의 말에 제갈 식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신에게 사람을 찾으라는 것은 자신들을 두고 떠나라는 말인가?
자신을 떼놓고 성치도 않은 몸으로 두 사람이 어떻게 하려고....?
"누구를 찾아드리면 됩니까?"
"그자의 이름은 조 무적이라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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