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死商
* * * * *
크고 넓은 식탁에도 불구하고 단촐한 몇 가지 음식만이 차려져있다.
그리고....
그 조촐한 음식을 마치 산해진미라도 되는 것인양 즐겁게 먹고있는 세 사람.
나이를 짐작키 어려워 보이는 노인이 채소 몇 점을 집어서 함께 식사를 하는 청년의 그릇에 올려준다.
"홍두야.... 이 채소도 좀 먹어보거라."
"예. 아버님."
이십 초반으로 보이는 잘생긴 청년이 공손히 노인이 건네는 채소를 그릇으로 받은 후 입으로 가져간다.
"부인께서 직접 그 아이를 잡겠다고요?"
청년에게 채소를 건넨 노인의 말에 조용히 음식을 먹던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화려함.
사람의 얼굴을 보고 화려하다고 하는 것이 적당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인의 얼굴은 정말로 화려했다.
사십이 조금 넘어보이는 여인의 얼굴은 큰 눈과 티하나 없는 하얀피부.
그리고 붉은 입술이 조화를 이루며 얼굴 중앙의 반듯하고 중심 잡힌 코와 함께 화려하다는 느낌이 저절로 생겨나게 한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어차피 그 아이는 천산을 넘으려하지 않는데 굳이 힘들게 잡을 필요가 있겠소? 이제는 그 아이의 행적도 알고 쫒는 것도 힘들지 않은데.... 차라리 그 아이가 그것을 찾을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중년의 아름다운 미부가 젓가락을 내리며 노인의 말을 자른다.
"저는 당신과 생각이 달라요. 그 아이가 천축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가 그것을 찾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 아이가 그것을 찾았다고....?"
항상 표정의 변화가 없었던 노인이 살짝 놀란다.
그리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여인.
정말.... 정말 찾았는가?
우리의 천년 숙원인 그것을....
"언제 떠날것이요?"
"가지 않아도 되요."
"가지 않다니요? 설마.... 여기서 마안을 쓰려고 하는 거요?"
"네. 환희불이 움직였다고하니.... 저도 이번 기회에 전력을 다해서 그 아이를 한 번 상대해볼까 해요."
중년미부의 담담한 말에 오히려 노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다.
"멀리 떨어져있는 그 아이에게 부인이 마안을 펼치는 것 보다 차라리 혈영을 움직이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
여인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노인을 본다.
그리고....
"당신.... 혈영은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못한다는 것을 잊었나요?"
하긴....
그 망할 놈의 신기라는 것이....
"홍두야! 환술과 주술에는 진전이 좀 있느냐?"
노인이 화제를 바꾸려는 듯 청년을 향해 말을 꺼낸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 네 한몸에 혈뇌와 마안이 모두 모이는구나. 힘들어도 천천히 모두 익혀야 한다."
"예. 아버님."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는 청년의 모습에 그동안 단 한 번도 표정을 보이지않던....
노인의 얼굴이 야릇하게 변하며 믿기 힘든 자애로운 미소가 노인의 얼굴에 떠올랐다.
내가 안되면.... 내 아들이....
그리고....
노인과는 다르게 약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청년을 보고 있는 여인의 눈길.
* * * * *
"어떡하지....? 들어가볼까?"
굳게 닫힌 대문을 보며 가 종덕이 당 풍호에게 묻고....
"들어가서 뭐라고 할건데? 개방의 선풍개가 왔으니 반 봉옥인지 뭔지 하는 놈은 나와봐라! 이럴거야?"
퉁명스런 당 풍호의 말에 가 종덕이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져버린다.
이 여우새끼는 꼭 말을 해도....
막씨세가의 대문을 보며 두 사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중에....
"그럼 어떻게 하지요?"
얼떨결에 두 사람의 손에 끌려온 마 호길이 물었다.
"일단 좀 지켜보자."
"어디서?"
가 종덕의 말에 당 풍호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저곳!"
가 종덕이 당 풍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길 건너 작은 골목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골목에서....?
가 종덕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당 풍호를 돌아본다.
그리고....
손을 들어 당 풍호가 가리킨 골목길을 가리키며....
"저기서?"
"그래."
가 종덕의 물음에 짧게 답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골목길의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는 당 풍호.
돌겠네....
내가 아니라 저 새끼가 진짜 거지지....
가 종덕이 중얼거리며 당 풍호의 곁으로 가 말없이 쪼그리고 앉는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은 체 무릎을 양손으로 껴안고....
무릎위에 턱을 괜채로 막씨세가를 향해 눈길을 고정시키는 두 사람.
기가 막혀서....
정말 이사람들이....
절정을 바라보는 초일류고수라는 사천의 표풍수와 하늘을 날으는 호랑이라는 철각선풍개가 맞는가?
마 호길은 황당한 두 사람의 모습에 내색은 못하고 엉거주춤하니 골목길로 걸어가 두 사람의 뒤쪽에 선다.
그리고.... 뚫어질듯이 막씨세가의 정문을 노려보는 세 사람.
* * * * *
"여기군요...."
백리 단의 말에 남궁 일평이 가만히 장원을 둘러봤다.
높고 넓게 이어진 담벼락과 커다란 대문.
제법 위세가 있는 가문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자신과 한 개 검조의 검객 열 명.
이정도 전력이라면 시시한 문파 하나정도는 당과 부숴먹듯이 쉽게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장 평의 동생이라는.... 의식을 잃고 누워있던 장 표두의 상태가 자꾸 신경을 건드린다.
분명히 머리를 맞았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머리에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런 상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장 평의 동생은 의식을 잃고 깨어니지도 못하고 있다.
깨어날 수 있을까?
아니.... 깨어나더라도 아마 백치가 될 것이다.
수박을 때리면 수박은 껍질부터 깨지는 것이 당연하다.
아니 간혹 껍질이 깨지지 않더라도 흔적은 분명히 남는다.
그런데 수박의 껍질은 멀쩡하고 속만 상하게 하려면....
남궁 일평이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분명히 상당한 경지의 내가기공 內家氣功이다.
정말 저안에 누가 있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일까?
"알릴까요?"
검객 한명이 남궁 일평을 돌아보며 물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이 왔다는 것을 알리고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간다.
지난 천 년간 자신들 무애장이 마주하는 적을 상대해왔던 단 하나의 방법.
비겁한 암수도.... 방심을 틈 탄 기습도 하지 않는다.
"이미 알고있는 것 같은데....?"
나직한 남궁 일평의 말에 검객들이 막가장의 정문을 돌아보고....
끼이익....!
힘겹게 열리는 대문과 함께 지팡이 하나가 바닥을 짚는다.
딱!
* * *
"그런데 저놈들은 뭐야?"
갑작스럽게 등장한 남궁 일평과 백리 단 검조의 모습에 당 풍호가 짜증스럽게 묻고....
"무애장의 검객들 같은데....?"
가 종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린다.
"무애장....? 남창에 있는 남궁세가가 왜 이곳에?"
"몰라...."
떨뜨름하기는 가 종덕도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 강남에 있어야 할 무애장의 검객들이 이곳에는 왜 온 것인가?
그리고....
살짝 열리는 장원의 문과 함께....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자가 한명 나온다.
"저 자 입니다!"
긴장한 음성으로 입을 여는 마 호길과 죽었던 조상이라도 본 것처럼 벌떡 일어나는 당 풍호.
응....?
그리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당 풍호를 놀라서 올려다보는 가 종덕.
"왜 그래?"
가 종덕이 아무 생각없이 묻고....
"조.... 무적?"
떠듬거리는 당 풍호의 말에 튕기듯이 가 종덕이 일어난다.
* * *
천천히 대문을 닫고 무적이 남궁 일평의 일행을 돌아본다.
"예상 밖인데....? 정말로 무애장이 올 줄이야...."
나즈막한 무적의 음성에 남궁 일평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이 자 인가....?
우리를 기다리는 자가?
"처음 뵙겠소. 무애장의 남궁 일평이요."
"그래서?"
짧은 무적의 말에 남궁 일평이 흠칫 놀란다.
정중하게 포권하는 자신에게 대뜸 하대라니....?
아니 그것보다 무애장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그래서.... 라고?
"우리가 올줄 알고 기다린 거요?"
"아니 다른 자들이 올줄 알았지...."
남궁 일평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무적이 절룩거리는 걸음걸이로 몇 발자국을 움직인다.
응....?
다리를 절어....?
지팡이에 의지해 절룩거리는 무적의 걸음걸이가 남궁 일평의 기분을 묘하게 한다.
"다른 자들이 누구요?"
무적이 고개를 돌려 길건너편의 골목을 한 번 돌아본 후....
"나도 몰라."
"그렇소....? 그럼 이제 다시 물어보겠소. 당신은 왜 장 평과 남 혼을 죽인거요?"
남궁 일평의 말에 순간적으로 무적의 눈에 야릇한 빛이 반짝였다 사라진다.
"무슨 소리지?"
"이제와서 시치미를 때는 거요?"
"그들이 죽었나?"
"그렇소."
무적이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긴듯 가만히 서있기만 한다.
"왜 그들을 죽인거요?"
"내가 죽이지 않았다면 믿지 않겠지?"
남궁 일평의 눈이 반짝인다.
죽이지 않았다고....?
왜인지는 몰라도 이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이자가 아니면 누굴까 하는 생각과 함께....
눈앞으로 상복을 입고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환영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빌어먹을....
"함께 가 주실 수 있겠소?"
"내가 함께 가야하나?"
"그렇소."
"왜?"
"무애장의 사람이 죽은 일이요. 당연히 우리는 모든 일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요?"
"그래서 내가 너희들을 따라 무애장까지 가야 한다고....?"
남궁 일평의 말에 담담하게 중얼거리며 무적이 자신이 눈앞에 서있는 자들을 천천히 둘러봤디.
반듯하게 고추서있는 허리와 경망되지 않게 신중한 눈길로 자신을 보고있는 자들.
무애장이라....
그날 내게 검을 날린 자가 무애장의 제자였던가?
왠지 장가의 쓰레기들과는 확연이 다른 기운이 느껴지더라니....
그런데 그자가 죽었다고....?
자신은 죽이지 않았는데 도대체 누가 손을 쓴 건가?
설마 자신이 가고 난후 막 오생이....?
아니다.
막 오생은 그렇게 잔혹하지도.... 또 그런 짓을 할 담력도 없는 자다.
그렇다면....
문득 독을 씹고 죽어가던 유 총관의 비릿한 미소가 떠오른다.
뒤에 누가 있었던가?
장 평과 무애장의 검객을 죽여 무애장을 움직이고.... 어떻게해서라도 막씨의 재산을 탐내는 자라....?
아니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막씨에게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비밀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리고.... 무애장까지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도대체 누굴까?
아니.... 막후의 상대보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이 무애장의 인간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더 문제다.
그냥 칼질 몇 번 한다고 겁내서 꼬리를 말 그런 놈들도 아니고....
죽여버릴까?
자신은 무애장이 아니라 열두 가문 전체와 싸운다고 해도 겁날 것이 없다.
비겁하게 등을 돌리느니 싸우다 안된다면 죽으면 그뿐이다.
하지만 막 오생은....
자신과 무애장의 싸움에 막 오생이 치뤄야 할 희생은....
어떡해야 하나....?
"내가 싫다고 한다면?"
"실례를 범해야 하겠지요."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는 당당함.
눈앞의 젊은이에게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가르침을 받은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리고 그 좋은 냄새가 무적을 짜증스럽게 한다.
자신의 친구와 동생들도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더라면....
아니.... 자신이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줬더라면....
고작 흑상 따위나 시키다니....
"그 실례라는 것 한 번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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