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회
"그래.... 개방주가 사람이 필요하다는 구나."
"어떤 사람이 필요하기에 저를....?"
"지모가 뛰어나고 사천지리에 밝은 사람."
"제가 지모가 뛰어나요?"
"바보수준은 겨우 벗어났지."
망할....
"그럼 제가 사천지리에 밝아요?"
"집 나가 빨빨 거리고 돌아다닌 시간이 이십 년인데 조금 알긴 하겠지...."
"그런데도 저를 보내시려고요?"
"그렇다고 내가 갈 수는 없지 않느냐?"
당연하다는 듯이 뱉어내는 당 천기의 말에 당 풍호가 한숨을 쉰다.
휴우....!
"왜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요?"
"몰라.... 여인을 하나 찾는데 개방의 일반제자들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가 없다고 하더구나."
"여인....? 개방주가 드디어 노망이 났네요. 늙어 죽지도 않는다고 개방제자들의 원성을 그렇게나 사더니 이제는 그 나이에 여인이라니....?"
마음대로 뱉어내는 당 풍호의 말에 당 천기의 얼굴이 구겨진다.
"장난칠래?"
"찾는다는 여인이 누군데요?"
차가운 당 천기의 말에 당 풍호의 얼굴에 어린 장난스런 표정이 사라지며 공손하게 물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고 천축의 무슨 신녀라고 하더구나...."
신녀?
갑자기 당 풍호의 뇌리에 장님 훙내를 내는 괴상한 늙은이와 신기를 풀풀 날리던 한 여인이 떠오른다.
"왜 찾는다고 하는데요?"
"네놈이 가서 물어봐!"
버럭 고함을 지르는 당 천기의 말에 당 풍호가 발딱 일어선다.
그리고....
"다녀올게요."
"야 이놈아! 밥은 마저 먹고...."
"다녀와서 먹을게요."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리는 당 풍호의 목소리.
먹다만 식탁위의 음식만이 눈에 들어오고 언제 사라졌는지 당 풍호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다.
도대체가 내 자식이지만 저놈은....
* * * * *
하루종일 마차를 몰았다.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도 즐겁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단지....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산다는 생각.
산다는 것이 별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끼 밥먹고 일하고.... 마지막으로 지친 몸을 누이며 하루를 마친다.
이 단순하고 의미 없는 일상의 반복이 삶일까?
과연 그런가?
마차와 수레 옆으로 건들거리며 움직이는 저 표사들도....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걷고 있는 저 짐꾼들까지도....
이런 것이 삶이라면 나는 왜 신녀의 다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했을까?
인간의 본능인가?
아니면 나의 삶은 저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일까....?
어린시절 살기위해서 버려진 음식을 먹고....
그나마 마련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죽음과 복수라는 이름으로 행한 그 많은 살육.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휴우....!
가벼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무적의 귀에 장 표두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저 산을 넘기 전에 오늘은 여기서 노숙을 한다. 모두들 야영 준비를 해라!"
장 표두의 고함소리에 움직이던 마차와 수레가 멈추고....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던 짐꾼들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오른다.
하루종일 힘들게 걸어야했던 지친 몸을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짐꾼들이 등짐을 내리고....
빠르게 마차와 수레에 실린 천막을 내리고 솥을 걸며 요란스러운 야영준비와 함께 장작에 불을 붙인다.
"몸도 불편해보이는데 좀 쉬게나...."
몇 가지 물건을 내리는 것을 도와주는 무적의 뒤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리고....
무적이 잔잔한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세파에 찌든 늙은 얼굴 하나가 눈에 보인다.
"괜찮습니다."
"보고있는 우리가 괜찮치 않네."
"네....?"
"부담가지지 마시고 좀 쉬도록 하시오."
부산하게 움직이는 짐꾼들 중 누군가가 자신에게 한마디를 던지고.... 노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무적이 야영을 위해 불을 붙여놓은 장작앞에 주저앉으며 준비해둔 잔가지를 던져 넣어 불길을 살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그렇게 불 앞에 앉아 있었을까?
갑자기 무적의 귀를 자극하는 째지는듯한 고함소리가 들리고....
"야! 이 새끼야!"
신경질적인 고함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고통스럽게 바닥에 쓰러져있는 짐꾼과 씩씩거리는 표사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응....?
그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표사가 쓰러진 짐꾼을 향해 침을 뱉으며 퍼붓는 욕설.
"이 새끼야! 천막부터 먼저 치라는데 무슨 말을 묶어둔다고 말대꾸야! 말대꾸가! 야! 너희들도 하던 것 멈추고 당장 천막부터 치지 못해!"
표사가 아니라 상전인가?
아무리 짐꾼들이라지만 함부로 하는 표사의 모습에....
무적이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킨다.
"안되네!"
한발을 떼려는 순간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노인의 얼굴이 보인다.
말없이 노인을 보자 서글픈 얼굴로 고개를 흔드는 노인의 모습이 왠지 애처롭게 다가왔다.
"지금 나서면 자네만 봉변을 당한다네...."
무적이 다시 표사가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천막을 세우기위해 황급히 몰려온 짐꾼들이 보인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감시하듯이 보고 있는 몇 몇 표사들.
"원래 표사들은 저렇습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세."
* * *
천막 안에서 떠드는 소리가 나즈막한 야산의 빈 공터를 울린다.
몇 몇 상인들과 함께 술자리를 하는 표사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
"왜 다른 사람들은 놔두고 저들 상인들만 천막 안으로 들인 것입니까?"
"저들이 필요했겠지...."
"예....?"
"자네는 이름이 뭔가?"
"반 봉옥이라고 합니다."
"반 봉옥이라.... 부르기 좋은 이름이군."
띠뜻한 노인의 말에 무적이 빙긋이 웃었다.
"그런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봉옥.... 그런데 자네는 막 공자님과는 어떤 사이인가?"
막 오생과 어떤 사이냐고....?
뭐 별 사이랄 것이 있기는 한가....?
"막 공자께서 곤경에 처한 제게 도움을 베풀어 주시더군요."
"그럴거야.... 막 공자님이 좀 화급한 면은 있어도 정은 많은 사람이니까.... 그리고 저들도...."
노인이 천막을 돌아보며 말끝을 흐린다.
"저들이라뇨?"
"저 상인들 말일세...."
무적도 노인을 따라 고개를 돌려 천막을 봤다.
어느듯 시끄럽던 웃음소리가 이제는 음담패설로 변해서 킥킥 거리는 웃음소리만이 들린다.
표사가 아니라 상인들이라고....?
"상인들이 왜요?"
"자네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가 보군?"
내가 아는 것이 있을 게 뭔가?
무적이 가만히 웃는다.
"예.... 저는 아는 게...."
무적의 웃음에 노인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흠.... 대략 육 년전인가....? 미안하네.... 늙으니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해져서.... 아무튼 그때 저 장 씨들의 가주라는 자가 장주님을 찾아왔다네. 그때부터였지.... 막 씨의 상행에 저들 장 씨의 표사들이 동행하기 시작한 것이...."
"상행에 표사들이 동행하는 것이야 흔한 일이 아닙니까?"
"그렇지.... 보통은 흔하지.... 아무튼 저들은 그렇게 호북으로 가는 상행에 몇 번 동행을 했다네. 서역의 양탄자를 호북에 팔기위해 가는 길에 동행을 했던 거지.... 그런데...."
"그런데요....?"
무적이 관심을 느낀 것처럼 노인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상인들이 배신을 했네.... 아니지.... 상인들이 배신을 한 게 아니라 장 씨가 상인들을 회유했다는 것이 맞겠지...."
무적이 가만히 노인을 봤다.
세상의 나이 든 노인들은 기력이 떨어지고 육체의 활동이 약해질 때가 되면 옛시절의 추억만이 남는다.
아련한 후회라는 감정과 애틋한 삶의 기억.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이 말하는 그 애틋한 삶의 흔적을 들어주고 또 알아준다면.... 노인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그런데....
아무리 추억밖에 남지 않은 노인이라지만....
왜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인가?
"자세히 듣고 싶군요.... 지루해도 괜찮으니 처음부터 이해하기 쉽도록 이야기 해주시면 안될까요?"
"별로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괜찮습니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데 이야기나 듣지요."
"그런가....?"
노인이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나는.... 아니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막 씨 집안의 하인이었네...."
노인의 입에서 나즈막하게 막 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막씨세가.
무림의 이류가문인 막 씨가 언제부터 섬안현에 자리를 잡은 것인지는 막 씨 본인들은 물론이고 인근의 주민들도 이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다만 아주 오래됐을 거라는 짐작만 할뿐....
그리고 대부분의 무림세가들이 그렇듯이 그들도 처음에는 섬안현을 침탈하는 비적들과 지방의 토호들에 맞서 굶주리고 힘없는 지역의 주민들을 지키며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했다.
하지만 세가가 자리잡은 섬안현이 점점 그 규모가 커지고 막씨의 문도 수가 늘어나자 가문을 유지할 수단이 필요했고 그렇게 상단을 꾸리고 세가를 유지할 자금을 충당했다.
그런데 가문을 유지하기위한 수단으로 만든 상회가 점점 그 규모를 불려나가자 급기야 막 씨는 손에 쥔 칼을 놓고 대신에 주판을 들게 되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칼 대신에 주판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서역에 차와 비단을 팔고 그 대금으로 하서회랑의 양탄자와 토산물을 들여와 이문을 남기는 사업으로 그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문과 함께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업은 막씨의 문하제자들에게 무인의 길이 아닌 상인의 길을 가도록 만들었고 그렇게 그들은 무림의 세가에서 상인의 가문으로 탈바꿈하게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칼을 놓고 주판을 들었을망정 초심을 잃지않고 섬안현의 힘없고 배고픈 가난한 주민들을 돌보는 것도 소홀이 하지는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지금의 장주님과 돌아가신 선대의 장주님도 나쁜 분은 아니셨네.... 물론 막 공자님도.... 그리고 그분들은 몰락한 시장의 상인들을 거두어 그들에게 일을 주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었다네. 그렇게 부를 축적하며 계속 커 나갔다면 어쩌면 섬서 십대 상단을 넘볼 수 있는 위치가 됐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때 저들 장 씨가 나타난 거라네."
무적이 시끄러운 천막을 힐끗 돌아봤다.
저 자들이 왜....?
"그들은 처음에 표국을 열었다며 상행에 자신들의 표국을 이용해 줄 것을 부탁했다네. 때마침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사업의 규모 때문에 막 씨가문에서 운영하는 표국만으로는 모든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던 장주님은 혼쾌히 승낙했고....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겼나요?"
"무슨 일이라.... 말했지 않은가? 상인들이 등을 돌렸다고...."
"상인들이 등을 돌렸다는 것은 그들이 이문을 속였다는 것 입니까?"
"아닐세.... 그들이 장 씨에게로 간 거지."
"예....?"
막 씨의 일을 해주던 상인들이 말을 갈아탔다.
그렇다면 그 상인들이 관리하던 기존의 거래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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