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록-66화 (66/158)

구원舊怨3

* * * * *

군 자명이 괴상한 표정으로 눈앞의 낡은 비석을 쳐다봤다.

군데군데 부서지고 이끼가 낀 오래된 비석.

주공천하 섬서경.

누가 언제 만들어 이곳에 세워둔 것인지는 몰라도 그 옛날 주공이 주나라를 세운 곳이 바로 이곳 섬서성의 서안 인근이라 섬서의 경계에 들게되면 간혹 그 모습을 보게되는 주공비周公碑.

한중에 들었구나....!

비석을 보는 군 자명이 묘한 감회에 젖는다.

자신들의 선조가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던 한중 땅.

삼백 년 전 깊은 한을 품은채로 이곳을 떠나야 했던 자신의 조상이 흘린 피눈물이....

하아....!

삼백 년이나 지났건만....

여전히 그 한은 면면히 자신의 핏줄을 타고 흐른다.

슬며시 비석을 한 번 만지고 발길을 떼던 군 자명이 몸을 멈춰 세운다.

자신을 보고 있는 한 사람.

깔끔한 무복에 여유롭게 뒷짐을 진채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젊은 청년이 한 명 눈에 들어왔다.

삼십은 되었을까....?

한눈에 봐도 오연한 기상과 정제된 기품.

명가의 자손....?

군 자명이 아무런 말도 없이 젊은 청년을 보고만 있자 상대가 방긋이 웃으며 포권을 한다.

"반갑소."

"나를 아시오?"

"아니요. 나는 오늘 당신을 처음 보는 거요."

"그런데....?"

"형장에게 한 가지 받을 것이 있어서 이렇게 기다렸소."

"내게....?"

되묻는 군 자명의 말에 상대가 고개를 끄덕인다.

누구지....?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군 자명이오. 장부가 빛을 졌다면 당연히 갚아야 하는 법. 그 받을 것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요?"

응....?

포권하며 장황한 인사를 하는 자신의 앞에....

움직이지도 않는 것 같던 상대가 갑자기 자신의 코 앞에 다가와 있다.

살짝 얼굴을 찌푸리는 군 자명.

빠르다....!

세상 사람들은 흑우의 검만 무서운 줄 알지 흑우가 얼마나 빠른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 빠름의 일부라도 물려받은 자신이 얼마나 빠른지도....

그런데....

이 어린 놈은 정말 빠르다.

자신과 비교해도 절대로 밀리지않을 것 같은 빠른 속도라니....

젊은 청년은 공격의 의사는 없는지 군 자명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도 명기라고 하오. 형장께서 내 물건애 손을 댔기에 그 빛을 받으려는 것이요."

"귀하의 물건....?"

"따라오겠소?"

"앞서시오."

파앗!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을 날리는 도 명기의 모습에 군 자명이 감탄한다.

잘못 본 게 아니다.

저 정도의 경신술이라면 다른 것은 보지 않아도....

이미 상당한 고련을 거친 자라는 것이 저절로 느껴진다.

생각과 함께 빠르게 앞서가는 도 명기의 뒤를 군 자명이 말없이 따르고....

그렇게 한참 동안 숲속을 날아가던 중에....

피윳!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군 자명을 향해 날아오는 비수.

흥!

싸늘한 콧웃음과 함께 군 자명이 날아오는 비수를 피하자....

이번에는 덮치듯이 뒤를 잇는 수많은 비수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쏫아지는 소낙비처럼 전신을 덮치는 비수를 보는 군 자명의 얼굴에 옅은 비웃음이 살짝 떠오른다.

고작 이 따위로....

군 자명이 살짝 몸을 비틀며 쏫아지는 비수를 가볍게 피하고....

스치듯 자신의 몸을 비켜가는 비수와.... 비수의 끝에 달려있는 가느다란 쇠사슬이 보인다.

그리고....

다시 숲속에서 날아오는 비수와....

자신을 스치듯 날아갔던 비수가 회선하며 다시 되돌아온다.

뭐야....?

사방에서 몰려오는 비수를 살짝 피하자 비수의 손잡이에 달려있는 쇠사슬이 자신의 몸을 중심으로 감겨오는 것이 느껴지고....

어느새 회선하며 돌아오는 비수와 함께 자신의 몸을 옭아매버리는 쇠사슬.

그렇게 자신을 스쳐지나가던 비수가 회선하며 비수끝의 쇠사슬이 눈깜빡할 사이에 자신의 몸을 감싸버렸다.

이건....?

손도 꼼짝할 수 없도록 자신의 몸을 옭아맨 쇠사슬.

그리고 팽팽하게 당겨진 쇠사슬의 끝을 쥐고 있는 무인들이 나무 뒤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매복이라....?

저만한 인물이 이따위 치졸한 짓을....

별로 놀라지도 않고 도 명기를 보는 군 자명과 돌아서서 기쁘게 웃고 있는 도 명기.

"군 자명이라고 했던가? 남의 물건에 손을 댈 때는 주인이 누군지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가 알아들을 수가 없군. 내가 언제 그대의 물건에 손을 댔다는 말인가?"

"남경에서 내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는가?"

"나는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데....?"

"보기보다 둔하군.... 남경에서 내가 아끼는 아이의 얼굴을 망가뜨려 놓은 것을 잊었나?"

얼굴을 망가뜨려....?

문득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한 어린 여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런데 물건이라고....?

"그 여자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 아닌가....?"

"사람이던 무엇이던 일단 내 소유가 됐다면 내 물건임에는 변함없지...."

군 자명이 멍한 얼굴로 도 명기를 봤다.

교활한 눈빛으로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과....

사람을 물건에 비유하다니....!

저만한 기상에 저만한 경지를 가지고도 고작 암습을 하고.... 사람을 물건 취급이나 하는 저급한 자라니....

한 가닥 상대에게 가졌던 호감이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문득 궁금한 것이 하나 떠오른다.

도 씨라는 성을 쓰고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저 경공이라면....?

"흠.... 그런가....? 그런데 불현듯 나도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는데 물어봐도 되겠나?"

"궁금한 것? 말해봐라!"

"잘못듣지 않았다면 자네 이름이 도 명기라고 했던가?"

"그렇다! 네 놈을 죽여주실 분이지.... 설마 그걸 물어보겠다는 것이냐?"

"아니야.... 그건 아니고.... 이제 정말 궁금한 것을 물어보지.... 혹시 너는 귀주에서 온 것인가?"

"하하하하! 군관이라면서 별걸 다 아는구나! 잘 들어라.... 내가 바로 비마각 飛魔閣의 소각주이신 승천기린 도 명기다!"

도 명기의 자랑하는 듯한 고함소리에 군 자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다시 뜬디.

그들이다....

드디어.... 그들을 만났다.

"그런가....? 그렇다면 너를 죽여도 될 이유가 충분한데...."

뭐야....?

도 명기가 눈을 부라렸다.

한철삭에 묶여 있으면서도 전혀 겁내지 않는다.

상대를 충분히 조롱한 후에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려고 했는데....

저 군관이라는 놈은 겁내지도 비굴하게 머리를 숙이지도 않는다.

처음 묶였을때부터 뭔지 모를 알 수 없는 기분에 찜찜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다.

그런데 저 태도는....

좋지 않다!

파앗!

직접 손을 쓰기 위하여 빠르게 몸을 날리는 도 명기의 눈에 군 자명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응....?

떨어지는 검을 군 자명이 살짝 차올리고....

검집을 빠져나온 검이 군 자명의 손에 잡힌다.

그리고....

팽치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군 자명의 몸과 힘없이 당겨져 오는 쇠사슬을 쥔 무인들.

아....!

당혹스러워 하는 도 명기의 눈에....

서걱!

무 자르는 소리와 함께 잘려져 나가는 쇠사슬과....

짙은 핏줄기와 함께 허공으로 솟구치는 무인들의 목이 눈에 들어온다.

한철삭이....?

자신이 몸을 날려 상대의 곁으로 가기도 전에 벌어진 일.

눈깜빡할 사이에 벌이진 일에 놀라서 도 명기가 허공에 뜬 체 자신의 오른발로 왼발등을 밟는다.

턱!

그리고.... 자신의 발등을 밟는 탄력과 함께 날아가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뒤로 몸을 빼는 도 명기와....

슈욱!

검과 함께 도 명기를 향해 몸을 날리는 군 자명.

서걱!

야릇한 소리와 함께 도 명기의 몸을 지나가는 군 자명.

그리고....

날아가는 몸뚱이에서 본래 떨어져있던 물건인 것처럼 흘러내리는 도 명기의 머리와....

머리도 없이 몇 번 더 발을 떼던 도 명기의 목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힘없이 쓰러지는 도 명기의 몸뚱아리.

아....?

살아남은 몇 몇 무인들이 멍한 눈으로 쓰러진 도 명기의 몸을 봤다.

마치 잃어버린 목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닥을 꿈틀거리는 몸과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

검 한 번 휘둘러 자신의 몸을 묶고 있던 한철삭을 끊고 동료들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빠르게 몸을 날리는 도 명기보다 더 빠르게 날아가 도 명기의 목을....

속도도 속도지만.... 원래 검이란 것이 깊게 찌르는 것에 특화된 무기다.

물론 베기도 하고 자르기도 하지만 자르는 것에는 도보다 못하고....

그런데 검 한 번 휘둘러 이렇게....?

"데려가라!"

싸늘한 일갈에 남아있던 무인들이 깜짝 놀라 서로를 돌아본다.

자신들이 지키던 소각주의 시체를 가지고 돌아간다면....

어차피 죽는다.

이빨을 악물며 빠르게 몸을 움직이고....

순식간에 군 자명을 둘러싸는 원형진을 만드는 무인들.

"너희들이 여기서 죽어나 돌아가서 죽어나 죽는 것이 똑 같다면 적어도 누가 저 자를 죽였는지 정도는 알려주고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

움찔....!

군 자명의 말에 비마각의 무인들이 움찔 놀라고....

"내 이름은 군 자명이다. 당분간 이곳 한중에 머물 것이니.... 그렇게 전해라."

싸늘한 말과 함께 군 자명이 몸을 돌린다.

그리고....

주춤주춤 원형진을 풀며 길을 터주는 비마각의 무인들.

기다린다.

어차피 내가 갈 수 없다면 그들이 모두 올때까지....

망할 놈의 흑우지약 黑雨之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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