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무곡
* * *
복호사에서 마련해준 객방에 홀로 앉아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본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꿈 같은 경험을 했다.
자신의 딸.... 얼굴도 모르던 딸을 만났다.
내게도 딸이 있다.
자신이 세상에 머물렀다는 흔적과도 같은 사랑스러운 딸이....
스스로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무적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떠오른다.
법당에서는 내색도 하지 못한 희열이....
그렇게 바보처럼 히죽히죽 웃으며 천정을 올려다보던 무적의 얼굴색이 변한다.
인기척....?
누군가 객방을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진다.
두 사람....?
사람이 머무는 절에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이 무에 대수일까?
하지만....
익숙한 해공의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투박하고 불안정한 또 다른 누군가의 발걸음이 느껴진다.
누가....?
"시주.... 손님이 한 분 오셨습니다."
온화한 해공의 음성에 무적이 조심스럽게 객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장 오....?
드디어 기다리던 인물이 자신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모습이 보인다.
* * *
태초에 조화옹이 잘라 놓기라도 한 것처럼 한쪽면이 반듯하게 잘려진 높다란 산.
마치 바닷가에 만들어 놓은 모래성을 반으로 잘라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잘려져나간 절벽을 따라 올라가는 산길의 중간 중간에서 수도 없이 만나게 되는 무너진 벼랑과....
무저갱처럼 입을 벌린 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안개.
그 악마의 주둥이처럼 벌어진 수많은 구멍으로부터 올라오는 알 수 없는 안개가 기이하게 잘려져 반밖에 남아있지 않은 산을 가득 매우고 있다.
무적은 이 무서우리만치 장엄한 산의 모습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의 힘.
다 무너지지도 그렇다고 온전하지도 않은 부조화가 가져다주는 가슴 떨리는 경외감.
하지만....
이곳은 사람이 머물만한 곳이 못된다.
이 험한 곳에 해골귀신이 있다고....?
"여기는 어딘가?"
힘들게 산길을 오르던 장 오가 무적의 말에 멈춰선다.
"여기는 귀무곡이라는 곳 입니다."
"귀무곡....?"
"원래는 감악산과 연결된 봉무산의 한 봉우리였는데.... 오랜 옛날 지진으로 봉우리의 절반이 깍여져나가 지금은 이런 모습으로...."
하긴 절벽을 따라 이어진 길이 계곡이라 부를만도 하다.
한참을 정상을 향해 올라가던 산길이 급격하게 아래를 향하더니 다시 까마득한 정상으로 이어지는 모양이....
무적의 눈길이 안개 속에 가려진 산 정상을 향한다.
"이곳에 그자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나?'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적의 목소리에 장 오가 떠듬거린다.
"그게.... 그게...."
표정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무적의 맑은 눈이 보인다.
유리처럼 맑게 빛나는 차가운 눈동자.
자신의 밑바닥까지 꿰둟어보는 것 같은 상대의 눈길에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 느껴진다.
빌어먹을....
장 오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린다.
"죄송합니다.... 저는...."
함정인가?
우습다.
떠듬거리는 장 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정말이지 이놈의 세상은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죽음이 두려워 나를 그들의 덪으로 끌고 온 건가?"
죽음이 두려워....?
장 오가 멍한 눈으로 무적을 봤다.
그리고....
부욱!
거칠게 찢겨나가는 상의와 함께 온 가슴을 가득 매운 상처가 무적의 눈에 들어왔다.
수 백.... 아니 수 천 마리의 가는 실지렁이가 전신을 감고 있는 것 같은 상처.
무적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진다.
저만한 상처를 입으려면....
아니.... 저 상처가 몸에 새겨질 동안 장 오가 겪었을 고통은....?
"죽음이 두렵냐고....? 그렇소. 나는 죽는 것이 두려웠소. 잔인한 당신의 손에 죽는 것이.... 그래서 당신의 뜻대로 문주의 행적을 쫒았소. 하지만.... 하지만 이 고통은.... 왜 당신들의 싸움에 나를.... 왜 죄없는 나를 끼어넣는 것이요? 내가 당신들에게 무엇을...."
턱!
갑자기 절규하는 장 오를 밀쳐내며 허공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무적.
삐윳!
쩡!
무거운 쇠가 서로 부딛치는 소리와 함께 무적의 손에 들린 카칼이 부르르 떨린다.
그리고 허공으로 튕겨 날아가는 화살하나.
활....?
자신의 칼에 충격을 줄 수 있는 활이라니....?
무적이 당혹스런 마음으로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융!
다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짙은 안개를 뚫으며 자신을 향하는 한 발의 화살.
삐윳!
또 다시 무적의 도가 허공을 가른다.
쩡!
둔탁한 소리와 함께 튕겨 날아가는 화살.
그리고....
피융! 피융! 피융!
안개속의 상대가 연사로 활을 쏘는지 몇 차례의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자신을 향하는 날카로운 기운.
"장 오! 너는....!"
도망가라는 말이 다 나오기도 전에 장 오의 머리가 터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수박처럼 터져나가는 장 오의 머리를 뚫고 날아가는 한 발의 화살.
치잇....!
무적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리며 손안의 칼이 움직인다.
삐윳!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적의 전신을 감싸는 둥근 원.
칼의 그림자가 마치 둥근 공처럼 무적의 전신을 감싼다.
탕! 탕! 탕!
그리고 이번에도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튕겨 날아가는 몇 발의 화살과....
살짝 구부렸다 펴지는 무적의 무릎.
탁!
땅을 박차는 약한 소리가 들리고....
빠르게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쏘아져 나가는 무적의 몸.
피융!
삐윳!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얇은 칼이 허공을 찢어놓는 소리가 동시에 들린다.
그리고....
쩡! 쩡! 쩡!
쇳소리와 함께 튕겨 날아가는 화살 너머로 저 멀리 세 개의 인영이 보인다.
그리고 흩어지는 안개 속에서 자신을 향해 활을 겨누는 해골의 모습도....
그곳에 숨어 있었나....
칼이 만드는 기운에 화살은 물론이고 주변의 안개까지 모두 밀려나간다.
칼바람이 일으키는 풍압이 저 정도까지....?
초 일의 눈에 살짝 이채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죽은 것이 우연이 아닌가?
그리고 분명히 이름난 보도寶刀는 아니라고 했는데 고루궁을 견뎌낸다.
재미있군....
후우....!
긴 숨을 몰아쉰 동 태기가 힘껏 활을 당긴다.
응....?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음 부경의 눈에 야릇한 빛이 살짝 떠올랐다.
왼팔을 앞으로 뻗어 지탱하고 있는 활대가 엿가락처럼 구부러지는 모습.
활의 시위만 팽팽히 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로 접혀지기라도 할 것처럼 구부러지는 활대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목수의 자가 접혀지는 것처럼 접혀지는 활대에 양각된 고루의 형상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인다.
마치 동 태기의 팔뚝을 물어뜯기위해 입을 벌리는 짐승의 그것처럼 바짝 다가오는 고루의 형상.
동시에 활시위를 당긴 동 태기의 손가락이 살짝 떨어지고....
팡!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한 발의 화살이 시위를 떠난다.
웃....!
음 부경이 흠칫 놀라 뒤로 한발 물러선다.
날아가는 화살을 따라 빨려가듯이 뒤를 쫒는 주변의 공기.
우웅!
지금까지와는 다른.... 화살이 날아간다고는 믿기 힘든 기괴한 소리가 온 산을 울린다.
응....?
빠르게 몸을 날리던 무적이 갑자기 멈춰 선다.
아니.... 멈춰 섰다고 느낀 순간, 팽이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무적의 몸.
삐윳! 삐윳!
팔을 움직여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력에 몸과 함께 칼이 움직인다.
그리고 팽이처럼 돌아가는 무적의 몸을 따라 회선하는 주변의 대기가....
바람 한점 없던 산속에서 갑자기 커다란 회오리바람이 일어난다.
그리고 커다랗게 돌아가는 회오리바람 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투명한 원하나.
무적의 칼이 만든 둥근 원이 회오리바람을 빠져나와 날아오는 화살을 향한다.
그리고....
정확히 원의 중심을 꿰뚫어버리는 화살.
쩌르릉....!
뇌성 같은 소리와 함께 원을 뚫고 들어온 화살이 무적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고....
갑자기 무엇인가에 걸린 것처럼 무적의 한치 앞에서 멈춰선다.
그리고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허공에 떠있는 화살.
주춤....! 주춤....!
누군가가 뒤에서 당기는 것처럼 주춤거리는 화살과 더욱 거세어지는 회오리바람.
그렇게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퍼엉!
커다란 폭음과 함께 뒤로 밀려나는 회오리와 튕겨 하늘로 솟구치는 화살하나.
퍽....!
허공으로 솟구쳤던 화살이 바닥으로 떨어져 꽂이고 뒤로 밀려난 회오리바람이 잦아든다.
그리고.... 칼에 의지한 체 서 있는 무적의 모습이 나타난다.
웩!
한웅큼의 피를 토하며 동 태기가 주저앉고....
힘없이 손에서 떨어지는 고루궁과 찡그린 얼굴.
"초 일...."
쉰 것처럼 힙겹게 나오는 동 태기의 음성에 초 일이 살짝 놀란다.
사자보를 만들고.... 군마맹을 결성한 후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직접 부른 적이 없던 동 태기가 이름을 불렀다.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내가 벌인 일.... 내가 해결한다...."
파앗!
끊어질 듯 뱉어내는 말과 함께 튕기듯이 무적을 향해 몸을 날리는 동 태기.
아....!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었을 건데....
말려야 한다.
분명히 이성은 말려애 한다고 외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은 열리지 않는다.
동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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