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그 놈을 잡는 것이야 문제가 아니지만 그 벽창호를 잡아도 그의 아버지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금군과 구문제독부의 모든 무장들.... 그리고 국경수비대의 모든 무장들까지....
천하군문의 모든 무장들이 정신적 스승으로 떠받드는 그 무서운 인물이....
아니....황제조차도 스승으로 모시고 수시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엄청난 자가....
백만 군문의 검이 자신의 몸을 갈기갈기 짲어놓은 장면이 보인다.
아우....! 돌아버리겠네....
재수없게도 태감의 희생양으로 찍혀버리다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 * * * *
저만치에 높다란 아미산의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눈으로 보기에는 금방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막상 가려고 하면 성인 남자의 걸음으로도 한참을 가야하는 것이 저렇게 가까이 보이는 산의 실체다.
커다란 산은 가까이 보이기만 할뿐....
그렇게 저만치 보이는 아미산을 보며 당 풍호가 중얼거린다.
"곧바로 올라갈까?"
당 풍호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가 종덕과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군 자명.
군 자명의 눈에 노을 빛을 받은 하늘의 구름이 피를 뒤짚어쓴 조 무적의 모습처럼 보인다.
당 풍호의 어깨에 걸머진 봇짐속에 들어있는 두 개의 위패를 어떻게 그에게 전해야 하는가?
그를 잡자고 시작한 강호행이 이제는 저 무거운 짐을 전해줘야만 하는 일로 변해버린 것 같다.
후우....!
세상일이란 것이....
답답한 마음에 한 숨을 쉬는 군 자명을 당 풍호가 슬쩍 훔쳐봤다.
초혼산에서 겪은 그 일이 군 자명에게는 커다란 의미로 다가온 것인가?
하긴....
군 자명으로서는 생각조차 못해본 죽음일테니....
"서둘러 가봤자 어차피 오늘은 도착 못해. 그리고 늦은 시간에 찾아가는 것도 별로 환영받지는 못할 텐데 저녁이나 먹고 내일이나 모레 점심경에나 올라가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가 종덕의 말에 당 풍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군 교두, 식사나 하시지요?"
* * *
캬아!
독한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군 자명이 잔을 내린다.
셋이서 한 마디 말도 없이 마신 술이 어느듯 스무 병이 넘은 것 같다.
취기가 오를만도 하건만....
아니.... 벌써 취한 건가?
음.... 술잔속의 얼굴이 여러 개로 보이는 것을 보면....
큭큭큭....
괴상한 웃음과 함께 군 자명이 두 사람을 돌아봤다.
평소 그 말많던 저 두 인간들이 오늘은 말 한마디도 없이 술만 마시네....?
나도.... 나도 저들처럼 쉽게 잊을 수 있는 성격이라면 좋으련만....
나도 저들처럼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면 좋으련만....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무적오식의 검법과 함께 여러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사람의 도리를 잊지말라는 말과 함께 건네주던 그많은 서책들....
그렇게 배운 인仁과 의義.... 그리고 예법.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라 들어간 군문에서 본 것은....
의와 예도 모르고 인이라는 글자는 어딘가에 팔아먹어버린지도 모를 쓰레기 같은 인간군상뿐이었다.
친구를 위해 대신 희생하는 의를 이야기하는 자신에게 동료들은 바보라고 불렀다.
자기 살기도 바쁜데 친구가 왠 말이냐며....
그리고 춥고 배고픈 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옷을 벗어주는 자신에게는 멍청이라고 했다.
저들로부터 빼앗지는 못할망정 왜 뺏기는 거냐며....
그때부터였다.
자신은 타인의 말을 듣지도.... 믿지도 않고 무시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틀렸다고....
내가 옳다고....
세상에는 너희들 같은 쓰레기들보다 의와 인을 알고 행하는 자들이 더 많다고....
그렇게 책에서 본 이야기를 하고 그런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는 자신에게 사람들은 꽉막힌 벽창호라고 했다.
원칙을 지키고 편법을 멀리하는 자신에게는 고집불통이라고....
하지만 나는 믿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영웅이나 협객이라 불릴수 있는 자들이 있어 주군을 위해.... 동료를 위해.... 그리고 힘없고 불쌍한 자들을 위해 대신 죽어줄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그 초라한 모습의 두 남녀가....
세차게 고개를 흔드는 군 자명의 눈에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수북한 낙화생 껍질과 몇 개의 커다란 술 항아리.
성인 남자의 머리 두 개는 붙여놔야 될 것 같은 항아리가 다섯 개나 식탁에 올려져있다.
그리고....
술잔도 없이 술독채로 들고 마시는 남자.
벌컥! 벌컥!
마치 무더운 여름날 냉수라도 마시는 것처럼 술독을 비우고 낙화생(땅콩) 하나를 들어 껍질을 깐다.
그리고 입으로....
그렇게 몇 개의 낙화생을 안주로 대신하고 다시 술독을 든다.
벌컥! 벌컥!
다시 낙화생 몇 개....
크크크....
저런 술꾼을 보면 저렇게 술이나 먹으며 인생을 낭비한다고 비웃던 자신이....
자신도 저사람처럼 앞으로는 술에 의지해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눈앞에 앉아있는 이 비범한 두 사람도 갑자기 성가시게 느껴진다.
그만한 지모에 그만한 경륜이라면 그들의 죽음도 예상했어야 하는 것을....
괜히 보기 싫어지는 상대와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짜증난다.
벌떡!
갑자기 군 자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홀로 술을 마시는 남자의 앞으로 걸어가는 군 자명.
"이보시오.... 형장!"
뜬금없이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군 자명을 향해 사내가 무심하게 고개를 들고....
"괜스리 내 일행들이 꼴도 보기싫어 이리로 왔는데 술 한잔 얻어먹을 수 있겠소?"
혼자서 조용히 즐기는 중에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로 와서 술 한잔 달라고 한다면 당연히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그 상대가 비록 아름다운 여인일지라도 이 여자가 왜 이러나 하며 경계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본성일 것인데....
하물며 눈앞에서 말을 거는 자가 허리에 검을 찬 무인이라면 더더욱 경계하게 되는 것이 당연할텐데도 불구하고....
군 자명을 보는 무심한 사내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앉으시오. 주인장! 여기 술 다섯 독만 더 주시오!"
멀리서 온 친구를 맞는 것처럼 자리를 권하고 술을 시킨다.
"오....! 형장, 목소리가 참으로 남자답구려!"
저 인간이 미쳤나....?
갑작스런 군 자명의 행동에 당 풍호가 멍하니 그를 쳐다본다.
도저히 평소에 보여주던 군 자명의 모습이 아니다.
고집불통에 과하게 예를 따지기까지 하던 군 자명이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술을 사달라고 주사를 부린다.
돌겠네....
단순히 술에 취해서 나오는 행동은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초혼산에서 본 두 사람의 죽음이 저 벽창호에게 조금은 충격을 준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죽음을 막지 못한 자신들을.... 원망하는 것인가?
엉뚱하기는....
괜히 말리다가는 저 벽창호의 주사가 고스란히 자신들에게로 향할 것만 같다.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럽게 군 자명의 술주정을 받아야 할 맞은편의 가엾은 남자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불쌍한....
응....?
갑자기 당 풍호의 눈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확연하게 다가오는 상대의 떡하니 벌어진 넓은 어깨.
아니 떡하니 벌어진 정도가 아니라 마주 앉은 군 자명의 어깨보다도 더 넓어 보인다.
군 자명의 어깨도 남들보다 더 넓은 어깨이거늘....
그리고 반듯하게 고추선 허리.
허리.... 즉 척추가 반듯하게 선 것이 뭐 어때서? 라고 묻는다면 딱히 할말은 없다.
하지만 사람의 신체를 똑바로 지탱시켜주는 것이 튼튼한 하체와 허리다.
그 중에서도 허리....
허리가 바로 서지 못한 사람은 다른 일도 잘 할 수가 없다.
물론 잘하지 못한다고 아예 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반듯하지 못하고 굽거나 휘어진 허리는 짜증스럽고.... 일면 고통스럽기까지 한 통증을 유발하게 된다.
그 짜증스럽고 고통스러운 통증과 자세의 불편함이 결국은 많은 일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오래도록 할 수가 없도록 만든다.
그리고....
눈 앞의 사내는 드물게도 그 허리가 반듯하게 서있다.
그와 함께 허리를 포함한 상체를 감싸고 있는 엄청난 근육.
탁자 밑의 하체를 볼 수는 없지만 당당한 사내의 체격이 쉽게 그려진다.
들어올 때는 왜 못 봤지?
저 정도로 단련된 신체라면 스쳐 지나가는 길에라도 당연히 눈에 뛸 건데....
당 풍호가 고개를 돌려 객점 안을 한바퀴 둘러본다.
평범한 객점에 더 평범한 주인과 종업원.... 그리고 술과 음식을 먹으며 떠드는 손님들.
별로 특이할 것도 없는 평범한 광경이다.
심각한 얼굴로 술잔을 드는 가 종덕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다시 사내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아....!
사내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자세히 상대를 살피자 비로소 보이는 상대의 당당한 모습.
자연경....?
몰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러 스스로 자연에 동화될 수 있는 경지에 발을 들인 것인가?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절정의 경지에....?
떨리는 마음을 숨기고 당 풍호가 조심스럽게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한눈에 들어오는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남자의 얼굴이란 것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전체적으로 선이 굵은 얼굴에 불굴의 의지라고 표현되는 기개가 묻어나는 얼굴.
비록 조금 고집스러워 보이기는 해도....
결코 이런 허름한 객점에서 술로 인생을 낭비할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결졍적으로....
살짝 살짝 흘러나오는 군 자명의 강한 기 앞에서도 한 점의 동요나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두 마리의 호랑이가 마주보며 앉아있는 것 같은 위험한 모습의 두 사람.
누굴까....?
초 일은 며칠째 금정봉이 올려다보이는 이곳 창가에 앉아서 하릴없이 술만 축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산으로 뛰어올라가 그 광마라는 자의 멱살을 잡아끌어서 내려오고 싶었지만.... 금정봉에는 복호사가 있다.
광마라는 쥐새끼 한마리를 잡기위해 아직은 아미와 등을 질 수는 없다.
그리고 어차피 현문은 자신의 몫도 아니다.
하지만 선친의 원수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기위해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서 그를 기다린다.
어서 내려오거라 조 무적.
제발 내 인내심이 바닥날 때까지 기다리게 하지는 마라.
그런데....
기다리는 광마는 오지 않고 엉뚱하게 왠 주정뱅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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