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호사3
".... 마하반야!"
긴 독경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노사태에게 합장하며 고개를 숙이는 노승.
노사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
노승이 무적에게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며 앞서서 걸어간다.
천천히 노승의 뒤를 따르던 무적이 고개를 돌려 법당안을 쳐다보고....
법당안에 앉아있는 노사태의 왜소한 등이 눈에 들어온다.
나이들고 살이 빠져 약간은 굽은 듯 보이는 왜소한 등이 보이고....
어....?
갑자기 무적의 눈에 노사태의 등이 관음보살의 얼굴로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뭐야....?
무적이 깜짝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뜨자....
돌연 태산처럼 커다랗게 다가오는 노사태의 등이.... 아니 관음보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아....!
"시주!"
깜짝 놀라 몸을 날리려는 그 순간 자신을 부르는 조용한 음성이 들리고....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무적의 눈에 온화한 노승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돌아보는 노사태의 뒷등이....
이번에는 왜소한 늙은 여승의 가녀린 등만 보인다.
꿀꺽!
무적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자신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것에 흠칫 놀란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에 상대방의 감응에 반응을....?
분명히 자신의 몸은 저 늙은 여승의 기에 반응을 했다.
자신이 의식했던 의식하지 못 했던....
그리고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려던 그 순간 자신을 멈추게 했던 노승의 작은 음성.
이들은....
냉정을 되찾고 살짝 곁눈질로 두 사람을 돌아보자 볼 수 없었던 어떤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이든 여승과 노승을 잇는 일직선상의 한 점에 갇힌 것처럼 서 있는 자신의 모습.
설마....?
무적이 살짝 옆으로 한발을 떼며 입을 연다.
"저분 사태님은 누구십니까?"
무적의 말에 노승의 얼굴에 온화한 웃음이 떠오르고....
"저분은 저희 복호사伏虎寺의 상좌上座이신 연화사태이십니다."
역시....
무적의 눈이 반짝인다.
말을 하며 자신이 한발을 떼자 노승도 한발을 뗀다.
두 사람 사이에 놓여진 일직선상의 한점에서 살짝 벗어나자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다시 자신을 일직선상의 한점에 가두어둔다.
움직이지도 않고 앉아있는 나이든 여승을 축으로 노승이 자신을 따라 움직이며 일직선의 방위가 구부러지지 않도록 유지한다.
자신을 경계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군요...."
들어본적도 없는 법명에 굳이 아는 척을 할 필요도 없다.
고개를 끄덕이는 무적에게 노승이 다시 입을 연다.
"가시지요. 제가 객방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적이 공손하게 합장하며 고개를 숙여보인다.
* * *
노승의 몸이 작은 월동문을 지나 담벼락뒤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나서야 무적이 객방의 문을 닫았다.
사찰에서 예불을 드리기위해 머무는 불자들에게 제공하는 작은 객방.
무적은 동생들의 위패와 함께 닷새 동안의 극락왕생을 위한 예불을 부탁하며 은 오백 냥을 시주했다.
그리고 그 대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극락왕생제가 끝날 때까지 무적이 머무를 방으로 절에서는 이 객방을 내준 것이다.
무적은 바닥에 가부좌를 하고 앉으며 조금전의 상황을 되짚어봤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늙은 여승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작은 곤충을 묶어버리는 거미줄처럼 자신의 신경을 자극하던 나이 든 여승의 끈끈한 기감.
하지만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보자 이번에는 봄눈처럼 사라져버리던 공허한 기운.
도대체가....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일직선의 양 끝단에 존재하던 노승과 노사태.
자신이 움직여 직선의 형태를 살짝 비틀어버리자 노승이 같이 움직이며 다시 직선상의 구속을 만들었다.
만약 앉아있던 늙은 여승까지 함께 움직인다면....?
자신이 아무리 많이 움직여도 그 직선은 구부러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 두 사람의 합격술일까?
호기심에 무적이 눈을 감고 혼자서 상황을 그려본다.
일직선의 한점에서 자신이 갑작스레 노승을 향해 몸을 날린다.
동시에 빠르게 뒤로 물러서는 노승.
역시....
뒤로 물러나는 노승을 버려두고 살짝 뒤를 돌아보자 늙은 여승의 몸이 자신을 향해 움직인다.
거리를 좁혀....?
자신을 가운데 둔 두 사람이 자신과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갑자기 멈춰서며 이번에는 뒤를 향해 몸을 날려본다.
노승을 쫒는 것을 포기하고 따라붙는 나이 든 여승을 향해....
역시 이번에도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 뒤로 물러나는 노사태.
그리고 반대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노승.
....?
간격만 유지한 체 공격은 하지 않는 것인가?
이번에는 직선의 중간에서 뻐르게 옆으로 몸을 날린다.
아....!
자신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일직선의 양 끝단을 유지하는 두 사람.
이것 봐라....?
갑자기 무적이 칼을 뽑아 빠르게 휘두른다.
두 개의 둥근 원.
무적의 칼이 만든 두 개의 둥근 도기가 나이 든 여승을 향해 날아가고....
퍽!
일순간에 사라져버리는 모든 환영.
휴우....!
무적이 참아두었던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과연 자신의 직접적인 공격에는 그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 할 것인가?
바다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 끝없이 넓은 바다에 경탄하면서도 동시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통제 할 수 없는 엄청난 자연의 힘 앞에서....
무적은 처음으로 무공의 깊은 경지를 엿보고 바다를 처음 본 사람의 그것처럼 놀랐다.
무공이라....?
무림인들이 단순히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 칼을 휘두르는 것만은 아니었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높은 경지가 있는 것인가?
만약 있다면 그 높은 경지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
내게는 원수를 죽이는 수단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을....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얼굴도 모르지만 자신의 딸이.... 일심이 이곳에 있다.
저 비범한 승려들 속에서 일심이 무사히 몸을 숨기고 있다.
반 봉옥, 좋은 선택을 해줬구나....
고맙다.
* * *
무적이 물러가고 조용히 독경을 외던 연화사태가 염주를 돌리던 손을 살짝 폈다.
손바닥안을 헝건이 적시고 있는 식은 땀.
"아미타불....!"
당혹스런 마음에 연화사태가 소리 내어 불호를 외웠다.
깊은 산속에서 의도치않게 맹수를 만나게 되면 사람은 의례 공포에 긴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긴장이 외부로 표출되는 여러가지의 형태 중 하나로.... 손바닥의 땀이라는 것도 있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않던 손바닥의 땀이....
긴장했었나....?
오랫만에 칩거하던 암자를 벗어나 대웅전의 본존불에 예불을 드리기위해서 왔다.
그런데....
이곳에 있어서는 안되는 야수.
조용히 서있는 상대의 모습에서 야수를 봤다.
먹이를 향해 달려들기 위해 웅크린 것 같은 야수의 모습.
그 섬뜩한 모습이 당혹스러워 살짝 기를 흘리자....
그때부터 자신에게서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는다.
만약 해공이 제때에 움직여주지 않았다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 놈이었다.
도대체 누굴까....?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연화사태가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법당안으로 들어오는 해공대사ㅏ.
"누구냐?"
거두절미하고 직접적으로 물어오는 연화사태의 물음에 해공이 빙그레 웃는다.
이미 열반에 든 자신의 사부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이 사고師㑬는 사부가 열반에 든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도 정정해서 저 불 같은 성정이 그대로 남아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기가 막히다고 해야할지....
일전에 들린 태청자가 자신의 사고를 향해 연꽃이 아니라 불덩이라고 투털거렸던 것도 이해는 된다.
"모릅니다."
"몰라?"
연화사태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미제일승으로 불리는 해공이 모르는 사람을 위해 왕생제를 지내주고 객방으로 안내까지 한다고?
그 많은 사미승과 접객승을 놔두고 직접....?
지긋이 자신을 보는 연화사태의 눈길에 해공대사가 가벼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연다.
"정말 처음 보는 자입니다. 오늘 여섯 개의 위패를 가지고 와서 극락왕생을 비는 불공을 올려달라는 부탁을 해서...."
해공의 말에 연화사태가 불상 앞의 위패로 눈길을 돌린다.
곽 도, 반 봉옥, 황 충보....
어느 것 하나 아는 이름이 없다.
"모르는 자의 왕생제를 아미제일승이 직접 해준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에그.... 저 호기심은 어떻게된게 나이를 먹어도....
해공이 온화한 웃음과 함께 입을 연다.
"얼마전 잠시 세상엪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나가? 네가 직접....?"
"예. 해동의 의상이라는 고승이 지엄스님과 함께 역본을 단 화엄경본을 구했다고 해서 와룡장에 잠시 들렀습니다."
"오! 귀한 경전을 얻었구나.... 그런데?"
눈앞에 신기한 인간이 있으니 이제 불가의 무가지보無價之寶는 관심 밖인가?
해공이 지긋이 눈을 감는다.
"제갈 가주가 몇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혈영 둘이 기어 나와서 돌아다닌다고 하더군요."
"아미타불!"
혈영이라는 말에 연화사태가 나직히 불호를 외우고....
"혈영이 기어 나온 것이 재미있는 일이냐?"
약간은 노기가 서린 연화사태의 말이 나왔다.
해공이 지긋이 감았던 눈을 뜨고 연화사태를 바라보며....
"숭산의 사대금강 중 두분이 나와서 혈영의 뒤를 쫒는다고 했습니다."
"그래....?"
연화사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소림에서 그들의 기척을 알고 뒤를 쫒는다면 중원 깊숙이 들어왔다는 말인데....
어떻게 길목에 있는 곤륜과 자신들은 몰랐을까?
"혈영은 일단 소림에 맡겨둬도 될 것 같은데...."
말을 끊으며 잠시 연화사태를 보던 해공이 다시 말을 잇는다.
"제갈 가주의 말에 의하면 천축의 흰두신녀와 법륜궁주도 중원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신녀? 설마 혈지血池를 찾은 것 이라더냐?"
연화사태가 깜짝 놀란다.
"아직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단지 제갈 가에서 우연히 그들을 발견하고 개방주에게 부탁을 했다는데 지금 까지는...."
연화사태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한다.
"그 신녀는 지금 어디에 있다고 하더냐?"
"그게 모습을 보였다가도 수시로 사라지는 통에 개방주가 애를 먹는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법륜궁주까지 나왔다면 개방주 혼자 쫒기에는...."
연화사태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해공을 빤히 쳐다본다.
"해공! 너 설마 대가리에 풍 맞았느냐?"
"사고님....?"
해공은 기가 막혔다.
열반한 선사의 사저이자 아미의 제일 큰 어른인 이 신니는 아직도 저렇게 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낸다.
아미타불....!
어찌 어린 제자들에게 성불소리를 듣는 고승이....
"제 정신인 놈이 혈영이 기어 나오고 혈지를 찾을 수 있다는 시바의 제사장이 돌아다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해공이 머쓱해졌다.
하긴 끔찍한 이야기다.
천하가 피에 잠기는 전조가 될지도 모르는....
하지만....
"뒤에 들은 이야기가 조금 흥미로워서요...."
"뒤에 들은 이야기....?"
연화사태가 궁금한 듯 중얼거렸다.
"마도사세의 한 곳인 군마맹이 거의 궤멸되었습니다."
"군마맹이?"
요건 좀 흥미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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