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호사
"우리가 저들과 있으면 언젠가는 우리 일심에 대해서도 알게 될 거예요. 그렇게되면 정말 무적은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갈지도 몰라요."
"일심을?"
놀라는 길 평의 말에 영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지?"
"길 대가, 저는 지옥에 떨어질 사악한 죄를 저지를 것 입니다."
"지옥에 떨어질.... 윽!"
말을 꺼내던 길 평이 숨이 막히는지 작은 비명을 뱉어낸다.
어느새 길 평보다 더 큰 덩치의 영영이 길 평을 당기듯이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영영의 품속에서 가늘게 몸을 떨고 있는 길 평.
"죄송해요.... 죄송해요.... 오라버니...."
힘겹게 입을 연 영영이 품속의 길 평을 밀어낸다.
그리고 밀려나는 길 평의 가슴에 선명하게 보이는 작은 비수의 손잡이.
무언가 말을 할 듯 입을 벙긋 거리던 길 평이 힘없이 옆으로 쓰러져버린다.
엉엉엉!
커다란 덩치의 영영이 쓰러진 길 평의 앞에 엎드려 어린아이처럼 통곡을 한다.
산이 떠나갈 것 같은 통곡.
격한 감정을 참지 못한 통곡이 오랫동안 이어지고....
한참을 울던 영영이 손을 뻗어 길 평의 뺨을 쓰다듬는다.
헉....! 헉....!
가쁜 숨을 내뱉으며 차갑게 식어가는 길 평의 얼굴.
"그동안 베풀어주신 깊은 은혜는 내세에서 반드시 갚을게요."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뱉어내듯이 영영이 입을 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객점안으로 들어가는 영영의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얼어버린 것 같은 표정없는 얼굴.
객점의 방으로 돌아온 영영이 방안을 한 번 둘러 본 후 침상밑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멍한 얼굴로 상자를 보는 영영.
언제가는 이런 날이 올줄 알았지만....
천천히 뚜껑을 열자 하얀 자기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잡티 하나 없는 순백의 작은 도자기병.
자기병을 손에 쥔 영영이 힘껏 자기병의 뚜껑을 연다.
뽕!
그리고....
순식간에 방안을 가득 채우는 역한 냄새.
코를 찌르는 비릿하고 역한 냄새속에서 영영이 자기병을 입으로 가져간다.
벌컥....! 벌컥....!
단 한방울도 버릴 수 없는 천하의 영약인 듯 단숨에 자기병속의 액체를 들이킨 영영이 조용히 침상에 몸을 누이고....
윽....!
일순간 목을 태우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무적....
목이 타들어가는 고통속에서 영영은 무적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릴적 객점의 주방에서 일하는 자신을 보고 끝임없이 찾아와 구애를 하던 무적.
못생긴 얼굴에 불량스런 태도가 싫어 멀리 했건만....
언제부턴가 그 얼굴에 익숙해져 무적에게 넘어가버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얼마나 놀랐던가?
"장가도 못 가보고 총각귀신으로 죽을까봐 내가 구해주는 거야!"
고함을 지르는 자신을 향해 바보처럼 히죽히죽 웃던 무적의 모습이 싱그럽게 다가온다.
보고싶다....
힘들면 포기해도 돼.... 무적.
목을 태운 독이 폐를 태우고 이제는 장기까지 태우는가?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뜨거운 고통에 영영의 커다란 몸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입과 코를 통해 쏫아져 나오는 핏물.
고통속에 몸부림치며 조금씩 끔틀거리던 영영의 몸이 몇 번의 꿈틀거림과 함께 잠잠해진다.
그리고 정적.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정적만이 쓸쓸한 방안을 가득 채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리고....
끼이익~~!
힘겹게 열리는 문소리와 함께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서 들어오는 한 사람.
길 평?
가슴에 비수를 꽃은 길 평이 엉금엉금 기어서 방으로 들어오고....
"영영...."
칠공으로 피를 토하며 싸늘하게 식어버린 뚱뚱한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슬픔의 감정도.... 아니 다른 어떤 느낌도 없이 길 평의 뺨을 타고 두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길 평이 살며시 손을 뻗어 침상 밑으로 힘없이 내려와있는 영영의 손을 잡았다.
차갑다....
"영영...."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처음 그녀를 봤던 그날이 떠오른다.
"빨리가자!"
평소와 다른 호들갑스러운 모습으로 밥먹으러 가자며 자신을 조르던 무적.
황산현에서 자리를 잡고 소금밀매를 확장해 나가던 중요한 시기에 갑자기 하지않던 짓을 하는 무적이 이상했지만 별다른 말없이 객점으로 따라갔다.
그리고 생전 처음보는 뚱뚱한 여인.
저게 정말 여자야....?
첫눈에 반했다며 저 여인을 꼭 얻고 말겠다고 다짐하던 무적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이 미친 놈이 정말 실성을 했나....?
어디 여자가 없어서 저런 코끼리 같은 여자를....
보통의 남자보다 더 큰 덩치에 괄괄한 성격.
그리고 무엇보다 입이 걸어서 입만 열면 욕이다.
저런 여자가 뭐가 좋다고....
자신의 기막한 심정은 모르는지 하루가 멀다하고 영영을 찾아가던 무적.
그리고 무적에게 끌려가듯이 객점을 드나들면서 차츰 알수있게 된 영영의 진짜 매력.
보통의 남자보다 강인한 성격에 주변을 돌아볼줄도 아는 올곧고 따뜻한 마음씨.
그렇게 영영은 무적과 혼인을 했고 자신들은 휘촌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때부터 무적의 아내로.... 정을 모르고 살았던 동생들에게는 누이이자 어머니로 그리고 자신에게는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랑스럽고 고마운 여동생으로....
그렇게 살아왔건만....
네가 어떻게 지금 이런 모습으로....
그냥 눈물이 난다.
슬픔인지 아니면 서러움인지....
"이럴거면 굳이 내 가슴에 비수를 꽂지 않아도 될 것을...."
낮게 중얼거리며 길 평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쨍그랑!
쨍그랑!
요란한 항아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퍼지는 독한 주향.
주방에 밀봉해둔 술독을 모두 깬다.
바닥을 따라 흥건히 퍼지는 독한 술.
그리고 방안의 의복과 침구를 끌고와 바닥에 던져 술을 빨아들이게 펼친다.
의복과 침구가 술을 빨아들여 축축하게 젖고....
길 평이 다시 몸을 움직여 이번에는 조리대의 기름을 사방으로 뿌린다.
헉....! 헉....! 헉....!
길 평의 가쁜 숨소리와 함께 주방과 방안 가득 기름과 술이 범벅이 돼 질퍽 거린다.
무적....
이제 네놈 발목을 잡을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은 아무 것도 없다.
네 마음대로 하고싶은데로.... 네가 할 일을 해라.
네게 무거운 짐을 떠넘기고 가는 나를 용서해다오.
미안하다 친구.... 먼저가서 기다리마.
길 평이 고개를 돌려 침상위의 영영을 본다.
희미한 웃음.
길 평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오르며 작게 중얼거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 둘은 천생연분이다."
그리고....
길 평의 손에 들린 작은 화섭자에 당겨진 불이 어딘가로 옮겨 붙는다.
화르륵~~!
불길이 솟아오르면 이런 소리가 나는가?
순식간에 주방과 방을 가득 채우는 불길.
뜨거운 불길 속에서 길 평이 조용히 눈을 감는다.
* * *
초혼산이 올려다보이는 작은 객점의 방안에서 세 사람이 말없이 술잔만 기울인다.
길 평과 영영 두 사람을 본 그들은 한가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조 무적.... 그자는 단순히 피에 미친 살인마는 아니다.
깊은 상념에 잠긴 듯 하던 가 종덕이 고개를 들어 당 풍호에게 입을 열었다.
"풍호.... 그 조 무적이라는 자를 직접 본 적이 있었나?"
"응? 조 무적? 그래.... 멀리서 얼굴만 한 번...."
당 풍호는 곽 도의 장원에서 처음 봤던 조 무적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더듬어봤다.
당시에는 그 좁은 공간안을 자유로이 움직이는 주먹에 놀라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왠지 슬퍼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슬픔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조 무적 그자는 도대체 어떤 자냐?"
"어떤 자냐고....? 왜 그런 것을 묻지?"
되려 의아한 듯 자신에게 말을 거는 당 풍호의 모습에 가 종덕이 탁자위의 술잔을 빙글빙글 돌린다.
"글쎄...."
풍개 소 을목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조 무적. 그자는 단순히 피에 미친 자가 아니다. 오욕칠정을 억제하며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그런 자다. 그자는 사리판단도 할줄 알고 자신이 입은 은혜의 크기도 안다. 명가에서 제대로 훈육받지 못했지만 해야 할 일과 피할 일을 분간할 줄도 아는.... 과연 군마맹과의 싸움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한마디로 그는 좋은 환경에서 좋은 가르침을 받지 못한 아까운 인물이라는.... 야 이 거지새끼야! 존장이 이야기하는데 처먹는 것만....!"
움찔!
풍개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가 종덕이 깜짝 놀란다.
늙은 영감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자들... 조 무적과 그의 동료들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자들이 아닐까 하는...."
가 종덕의 말에 군 자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 풍호는....
"그자들은 비범한 자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러진 뼈가 전신의 장기를 찢어놓는 견딜 수 없는 그 고통속에서도 곽 도라는 자는 조 무적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본 그의 아내와 친구도...."
당 풍호가 말을 멈추고 세 사람이 묘한 표정이 된다.
인육이 튀는 그 광경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
아니 놀라기는 커녕 같이 가자는 자신들에게 짐을 챙겨야한다며 다음날 오라고 했다.
아무리 험한 일을 했던 흑상의 무리라지만 일반인들이 그렇게 침착할 수가 있을까?
"아무래도...."
당 풍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린다.
그들을 두고 오는 게 아니었나?
무어라 말하기 힘든 야릇한 기분을 느끼는 중에 밖으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뭐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 일층에서 소란스럽게 밖으로 뛰어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불이다! 초혼산에 불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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