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혼산7
* * *
산을 내려와 마을 어귀의 객점으로 향하던 당 풍호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다.
잔뜩 찌푸린 얼굴과 나이답지 않게 초롱초롱한 눈망울.
평소의 흐리멍텅하고 졸린 것 같은 눈이 아니다.
그리고 그 눈망울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가 종덕.
"왜그래?"
"종덕.... 너 혹시 무림오흉武林五凶에 대해서 얼마나 알지?"
"무림오흉? 글쎄.... 알만큼은 알지. 그런데 갑자기 오흉은 왜?"
오흉?
군 자명은 두사람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무림에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자신도 열두 가문이나 마도사세, 그리고 무림십흉은 들어서 안다.
그런데 오흉이라니....?
"혹시 오흉 중에 기다란 대월극大月戟을 사용하는 자에 대해서 알고있나?"
"대월극? 자네가 말하는 자가 상대의 몸을 오체분시五體分屍하기로 유명한 그 혈극 배 성환을 말하는 것인가?"
"그래. 남의 말 못 알아듣기로 유명한 그 늙은이 말이야. 그 늙은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이 있나?"
"그 말귀 못 알아듣는 늙은이야.... 대가리를 삐딱하게 옆으로 돌리고 절룩거리며...."
갑자기 가 종덕이 말을 멈췄다.
삐딱한 목에 절룩거리는 걸음걸이.
분명히 얼마 전에 봤다.
아니 조금 전에....
세 사람이 서로를 본다.
그리고....
위험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초혼산을 향해 몸을 날리는 세 사람.
* * *
상문객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 지독한 두려움.
평생을 살면서 처음으로 진짜 무림의 고수를 만났다.
마치 산속에서 호랑이를 만난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할만큼 전신을 옭아매던 상대의 기운.
그리고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불현듯 그 짙은 공포가 다시 떠오른다.
저 삐딱한 목에 절룩거리는 걸음걸이가 왜 이렇게 두려운가....?
길 평이 함 노인을 향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저분은 누구십니까?"
"아....? 내일을 도와주는...."
퍽!
함 노인의 마지막 말이 둔탁한 소리에 묻혀버린다.
단발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사방으로 터지듯 찢겨 날려가는 함 노인의 몸.
사람의 몸이 마치 물을 담은 가죽푸대처럼 터져서 날아가버린다.
그리고....
함 노인의 몸이 서있던 곳이 원래부터 자기의 자리였다는 것처럼 모습을 보이는 기다란 지팡이 하나.
구부러진 곳 하나 없이 반듯하고 기다란 지팡이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꿀꺽!
다리에 힘이 풀리고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길 평이 지팡이의 주인을 향해 눈을 돌렸다.
"여인은 안에 있는가?"
무표정한 얼굴에 아무런 특색도 느껴지지 않는 평이한 목소리.
도저히 눈앞에서 사람을 찢어 죽인 자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살벌했던 조금전의 장면과 더불어 그 목소리가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입이 열리지 않는지 힘겹게 고개만 끄덕이는 길 평.
누구라고 밝히지 않아도 상대가 누군지 한 눈에 알 수가 있을 것 같다.
자신들을 이곳에 보낸 그 자의 수하일 것이다.
뼈다귀밖에 없는 그 자의....
무적....
너는 이런 자들과....
순간적으로 자신의 안위보다 사람을 종이처럼 찢어놓는 이런 자들과 싸우고 있을 무적의 걱정이 앞선다.
"불러내라."
여전히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상대의 음성에 길 평이 무력하게 주방의 영영을 부른다.
"제수씨.... 손님이 왔습니다."
어차피 피할수도 없는 일....
평소와 다른 길 평의 음성에 영영이 의아한 얼굴로 주방을 나서고....
응?
차가운 밤바람과 함께 물씬 풍겨나는 피비린내.
그리고 낮선 인물.
올 것이 왔구나.
"가자."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상대의 음성에 영영이 살며시 눈을 감는다.
무적....
너 정말 잘해주고 있구나....
그 무서운 자들이 네가 두려워 우리를 데려가려고 이렇게....
천천히 눈을 뜬 영영이 배 성환을 조용히 봤다.
실체를 느낄 수는 없지만 상대를 보고만 있어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두려움이 저절로 생긴다.
하지만....
마음 속 밑바닥의 마지막 용기까지 모조리 끄집어내며 가만히 고개를 젓는 영영.
그에게 짐이 될 바에야 차라리 이곳에서 죽자.
영영의 고개짓을 본 길 평의 입가에 애틋한 미소가 살짝 떠오른다.
영영....
자신은 이곳에서 저 무서운 자에게 찢겨 죽어도 상관이 없다.
어차피 남은 일은 무적이 모두 해 줄 것이다.
나는 있어도 그뿐 없어도 그뿐....
그렇게 무적을 믿고 편안히 죽어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죽으면 영영은....?
그런데 영영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다.
그래 영영....
이곳에서 편하게 죽으면 된다.
길 평이 약간은 슬프보이는 미소와 함께 한 발을 떼서 영영의 앞을 가로막듯이 선다.
응....?
배 성환의 눈에 살짝 이채가 떠오른다.
분명히 평범한 일반인이라고 했다.
자신들을 위협하는 광마의 처와 친구지만 분명히 평범하다고....
그런데....
조금전 자신이 함 노인의 몸을 조각낸 일수는 무림인이라도 가볍게 볼 수 없는 잔혹하고 무서운 수법이다.
그리고 눈앞의 저 남자는 분명히 그 일수를 똑똑히 봤다.
아니 볼 수도 없었는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설마 두렵지 않다는 것인가....?
말도 안되는....
이 평범한 일남일녀는 분명히 두려움을 느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자신에게 저항한다.
광마라....?
배 성환은 문득 그 피에 미쳤다는 광마라는 자가 궁금해진다.
"귀찮게 하는군. 어차피 내게 들려서 갈 것이라면 너희들의 두 다리로 가는 것이 더 편하지 않느냐?"
배 성환의 말에 길 평의 입술이 실룩거린다.
어차피 죽기로 마음 먹은 것 굳이 입을 열 필요가 있을까?
"가지 않을 건가?"
자신의 말에 대답도 않고 묵묵히 서있는 두 사람을 보며 배 성환이 한발을 떼려는 순간....
"가기 싫다는데 왜 자꾸 가자는 거지?"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늙어수레한 음성이 들렸다.
누가?
배 성환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이 조용한 산속에서 이렇게 가까이 올 동안 자신이 상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니....
"누구신가?"
놀란 마음을 속으로 감추며 몸을 돌리자 급하게 달려온 기색이 완연한 세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세 명이나....?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왔는데도 몰랐다니....
당혹스러운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스윽 상대를 훑어보는 눈에 거지의 행색을 하고있는 자의 모습이 확연히 눈에 뛴다.
철각선풍개鐵脚旋風丐....?
"역시 날 알아본건가?"
"그래. 도대체가 네놈이 그런 꼴로 산을 오를거라고는 생각도 못해서 그냥 지나쳤는데 조금 지나자 네놈 같더군."
"그냥 가지 그랬나?"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조용하게 입을 열며 배 성환이 발을 떼서 지게에 얹혀있는 짐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자루가 빠진 대월부의 도끼날 같은 쇠뭉치.
반월처럼 둥글게 생긴부분이 파랗게 날이 선 쇠뭉치가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배 성환이 쇠뭉치를 자신의 손에 들린 지팡이에 꽂아 천천히 돌린다.
끄릭....! 끄릭....!
기분나쁜 쇳소리와 함께 나사처럼 파여진 지팡이의 홈에 맞춰져서 단단히 고정되는 대월극.
"흠.... 사오정의 대월극이 그렇게 분리될 수도 있는 거였군?"
신기하다는 듯한 가 종덕의 말에 배 성환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세상에는 별스럽게 타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의眞意와 비진의非眞意를 가려내지 못하는 약간은 순진하기까지한 아둔함.
그리고 배 성환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배 성환은 자신을 서유기속에 나오는 사오정에 비유하는 자들이 싫었다.
그리고....
싫은 것은 없애버린다.
단순하고도 명확한 이 원칙에 충실한 자신을 세상은 무림십흉의 일인으로 꼽기에 주저함이 없었고 그렇게 무림십흉의 혈극血戟 배 성환이 탄생했다.
그리고 흉신악살로 표현되는 십흉 중에서도 자신과 다른 몇 몇은 개방에 의해 무림공적으로 지목됐다.
무림 오흉이라고....
결국 천하백도의 누구라도 자신을 보면 죽이려고 달려드는....
"철각선풍개가 천하에 자랑하는 두 다리를 자르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조용한 말과 함께 사오정의 대월극이 가 종덕을 향하고....
"이보시오! 그런데 함께 온 다른 노인은 어디에 있소?"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군 자명의 말에 배 성환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가 종덕을 향해 공력을 모으는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순간적이지만 진기가 흔들린 것이다.
저건 또 뭐야?
배 성환의 눈에 말쑥하게 푸른 경장을 차려입은 중년인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리고 황당한 표정으로 군 자명을 보는 당 풍호와 가 종덕.
도대체가 이 벽창호 같은 인간은....?
당 풍호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린다.
"저 사오정이 벌써 잡아먹었지 아직 살아있겠소?"
"잡아 먹어요?"
휘둥그레 눈을 뜨는 군 자명의 모습에 가 종덕이 눈을 감아 버린다.
어디서 저런 인간을....
당 풍호가 기가 막힌 심정은 내색하지 않고 군 자명을 보며 방긋이 웃었다.
그리고 바닥을 가리키는 당 풍호의 손가락.
흥건하게 고여있는 핏물 속에서 찢어진 살점과 옷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어두운 밤이라 발 밑을 보지않고 있었던 군 자명의 얼굴이 차갑게 식는다.
이 잔인한....
일반인에게 잔인한 흉수를 쓰는 무림인에게 유달리 분노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왜 일까?
그 잘난 무공 너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지 왜 힘없는 일반인들에게....
"가 대협.... 저 자를 제게 양보해 주시겠소?"
"양보요?"
가 종덕이 언뜻 이해를 못한 것처럼 되물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군 자명.
가 종덕이 난처한 듯 입을 연다.
"이보시오 군 교두. 저 자는 그저그런 시정잡배가 아니라 무림의 일류고수인 무림십흉의 하나요. 쉽게 상대할 수 있는 그런 자가 아니란 말이요."
만류하는 가 종덕의 말에도 불구하고 군 자명의 눈이 배 성환을 향한다.
도대체가 이자는....?
남경의 나루터에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군 자명의 무공이 제법 강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십흉으로 뭉뚱그려 부를 수는 없는 일류고수다.
십흉중에서도 다른 자들보다 강하고 흉폭하다는 오흉....
바로 그 무림공적이라는 오흉중의 일인이다.
흑사방이나 현황보의 주인 따위와는 견줄 수 없는 진짜 일류고수.
고루하고 꽉 막히 인간인줄은 알겠지만....
어떻게 상황파악도 하지를 못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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