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마5
"아직 다 못한 말이 남았느냐?"
"예."
"그래....? 뭔지 말해봐라."
시체처럼 칙칙하기만 한 귀영의 눈빛이 살짝 반짝였다.
"혈불과 혈승의 시신을 조사하던 중에 그곳에 있어서는 안될 두 가지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있어서는 안될 두 가지? 그게 도대체 뭐냐?"
"하나는 극상승의 암기술 입니다."
"암기?"
"예. 당문의 장로는 되어야 가능할 것 같은 극상승의 정교한 암기술이 보였습니다."
"이상하구나.... 네 말대로라면 그 금군의 교두와 포졸 중의 한 명이 극상승의 암기술을 익혔다는 것인데.... 나는 아직도 당문의 제자가 관부에 들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래.... 다른 하나는 또 뭐냐?"
"흑우의 검이 나왔습니다."
어떤 말에도 침착하던 노인의 얼굴이 눈에 뛰게 흔들린다.
"뭐라고 했느냐?"
"파검.... 파검의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잘못본 것은 아니고?"
싸늘한 노인의 안광에 귀영이 허리를 숙였다.
"틀림없이 흑우의 파검이었습니다."
"어떻게 파검이라고 확신하느냐?"
"죽은 혈불과 혈승의 가슴이 검이나 도에 베어진 것이 아니라 강한 충격에 갈라져 있었습니다."
"강한 충격에 갈라졌다고....? 그렇다면 용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장공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갈라지고 터진 가슴에는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는 볼 수 없는 미세한 검기의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강한 충격에 산산이 부서진 혈승의 바라에도 마찬가지로 옅은 검기의 흔적이 보였습니다."
"파검외에 다른 것은?"
심하게 떨리는 노인의 말에 귀영이 머리를 흔든다.
"하아....! 그렇다면 그 극상승의 암기술이라는 것도....?"
노인이 마치 숨이라도 막히는 것처럼 한숨을 쉬며 물었다.
"암혼정暗魂釘은 아니었습니다."
"왜 암혼정은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죽은 혈승의 목에 깨진 술병의 조각이 꽃혀있었습니다."
노인이 살짝 인상을 찡그린다.
고작 깨진 병조각으로 혈승을 죽일 수 있는 암기의 고수와 생각만 해도 끔찍한 흑우의 파검이라고....?
기가막힐 노릇이네....
천하인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지만 자신은 전설속의 흑우가 어떤 인물인지 안다.
아니.... 그의 진정한 신분이 무엇인지를....
만약....
절대로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은 해보지만 정말로 꿈에서도 보고싶지 않은 흑우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후인이 나온거라면....?
지금 자신이 세우고 있는 모든 계획은 당장이라도 멈춰야한다.
넘을 수 없는 태산을 만나게된다면 돌아가야지 억지로 넘다가는....
"파검과 깨진 술병이라.... 너는 그 교두와 포졸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조사하도록 해라. 그리고.... 내 아내에게 그 아이의 흔적을 놓쳤다고 말해주거라."
"알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제부터 자신의 주인은 혈불을 죽인 자에 대해서 대책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파검에 대한 것도....
"아....! 그런데 말이다.... 혹시라도 운남이나 귀주쪽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느냐?"
"운남은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귀주는...."
"귀주는 뭐냐?"
"움직임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비마각의 제자들이 일부 중원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
"비마각이? 누가 나왔느냐?"
"비마각의 소각주와 수신호위중 일부가...."
비마각의 소각주라....
그렇다면 운남은 아니라는 것인가?
제발 그렇기를....
"알겠다. 그들의 행적도 놓치지말고 주시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고도 움직이지않는 귀영을 보자 노인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또....?
"아직도 못다한 말이 남았느냐?"
"예."
"그래, 이번에는 또 뭐냐?"
노인의 음성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조금은 짜증스러워하는 느낌이 묻어났다.
"백골문이 멸문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번에도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 버리는 귀영의 말에 노인의 얼굴이 서리가 내린 것처럼 차갑게 변한다.
"누구의 짓이냐?"
"조 무적이라고 백골문주와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자 입니다."
"동 태기와?"
"예. 백골문주가 그 자는 직접 처리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노인의 얼굴에 분노한 듯 아닌 듯 야릇한 빛이 떠오른다.
조 무적이라니....?
무림에 열두 가문이나 현문의 숨은 고수외에도 혼자서 백골문을 멸문시킬 수 있는 자가 있었던가?
아니다.
틀림없이 방수가 있을 것이다.
누굴까....?
개방....?
아니면.... 열두 가문 중의 하나일까?
"자신의 모든 세력이 무너질때도 막지 못했는데.... 어떻게?"
약간은 차가워진 노인의 말에 귀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자보주가 몇 가지 영약을 보내서 백골마공이 대성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초 일이 영약을?"
"예."
"음.... 그 조 무적이라는 자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아봐라."
"예."
짧은 대답과 함께 이제서야 귀영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귀영이 사라지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노인이 눈을 돌려 꽃밭을 둘러본다.
그리고....
타는 것처럼 붉게 핀 연산홍이 한가득 노인의 눈에 들어온다.
저 연산홍을 모두 솎아내야 하는가?
* * * * *
숲속의 빈 공터에서 무적이 손안에 들린 문 승을 바닥에 던졌다.
컥....!
격한 기침과 함께 입으로 진한 피를 토해내며 괴로워하는 문 승의 모습이 무적의 눈에 들어오고....
바둥거리며 일어서려는 몸부림보다 토해져나오는 각혈의 고통이 더 심한 듯 보인다.
하지만 무적은 차가운 눈으로 문 승을 내려다보고....
상대에 대한 미안함이나 어슬픈 동정심 따위는 필요없다.
자신은 저 고깃덩어리에게서 얻을 것만 얻으면 그뿐이다.
컥....! 컥....!
몇 번의 힘겨운 기침을 한 문 승의 몸이 바닥에서 꿈틀거린다.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날 수도 없는 문 승.
"어디있지?"
"컥....! 네놈 왜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거냐?"
피를 토하며 소리치는 문 승의 말에 무적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한다.
죽어버린 동생들과 불쌍한 길 평.
그리고 자신과 아내의 짓밟힌 인생.
"친구와 동생들.... 그리고 한쌍의 부부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 그런데 하늘의 시샘인지 아니면 마가 낀건지.... 누군가가 나의 아름다운 아내를 탐냈다. 자신에게 힘이 있다고.... 처음 보는 여인 하나를 얻기위해 내 동생들과 나를 죽이려했지. 아니 우리모두를 죽였지. 고작 그 썩어빠진 욕정 때문에.... 네놈들 손에 우리 부부와 형제들의 인생이 모두 짓밟혀버렸다. 그것이라면.... 그 원한이라면 이렇게 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네놈들이라니....? 우리 대력보가 너희들에게 무슨 짓을 했다고?"
뭐야?
무적의 몸이 움찔거린다.
"네놈도 그 백골음마와 같은 무리가 아니냐?"
"쿨럭....! 쿨럭....! 같은 무리....? 같은 무리가 뭐지?"
"무슨 소리냐? 어차피 네놈들도 내게 칼을 겨눌 놈들이지 않느냐?"
고통으로 일그러진 문 승의 얼굴이 한순간 실룩거린다.
칼을 겨눈다고....?
과연 그럴까?
한순간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그들의 손을 잡은 것이 결국은 이렇게....
문 승은 과거 군마맹의 회유와 협박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들의 손을 잡은 자신을 후회했다.
차라리 그때 죽었더라면....
"칼을 겨눠? 그렇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네게 칼을 겨눌때.... 그때가서 우리를 죽여도 되는 것 아니냐? 왜 너 혼자 미리 결정하고 네게 칼을 겨누지도 않은 우리 불쌍한 대력보의 제자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불구덩이에 빠트린 것이냐?"
문 승의 말에 무적의 얼굴이 마치 망치에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변한다.
뭐라는 거야?
내가 내 마음대로 너희들을....?
"하지만 너희들은.... 너희들은...."
"왜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윽박지르 듯 나오는 문 승의 말에 무적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그래! 네놈들은 쓰레기 같은 놈들이다. 힘 좀 있다고 약한 자를 함부로 괴롭히는...."
"그렇게 말하는 너는?"
"뭐....?"
"네놈에게 저 불쌍한 대력보의 사람들을 불구덩이에 넣어서 죽일 무슨 권리가 있다는 말이냐? 우리가 천인공로할 죄를 지은 죽어마땅한 자들이라도 된다고 하더냐!"
무적이 순간적으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멈칫한다.
나는.... 나는....?
"결국 네놈도 우리와 같은 피에 미친 쓰레기가 아니냐? 네놈에게 힘이 있다고 함부로 아무나 잔인하게 죽이는.... 만약 네놈에게 힘이 없었다면.... 그 절륜한 무공이 없었더라면 그때도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우리에게.... 쿨럭! 쿨럭!"
무적을 쏘아부치던 문 승이 격렬한 기침과 함께 짙은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
괴로운 듯 웅크리며 각혈을 토하는 문 승을 멍하니 쳐다보는 무적.
내게 힘이 없었다면....?
아니다!
나는 힘이 없더라도 반드시 복수를 했을 것이다.
팔다리가 잘리고 온몸이 갈갈이 찢겨져 나가더라도....
반드시 복수를.... 복수를....
누구에게....?
누구에게 복수를 해야 하는가?
동생들을 죽인 자는 바로 나 자신인 것을.....
스스로 내게 먼저 복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멍하니 내려다보는 문 승의 얼굴위로 낮선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향해 검을 내려치는 슬픈 얼굴의 여인.
자신의 손에서 검이 튕겨져 나가자 주저앉은채로 절망하던 여인의 모습이....
그 공포에 몸을 떨던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빌어먹을....!
무적이 세차게 고개를 흔든다.
하지만 떨쳐버리려던 여인의 모습 뒤로 또다른 여인이....
그리고 칠공으로 피를 쏫아내는 염 천세의 모습이 보인다.
"조 무적! 내가 준 소금으로 밥을 먹고 산 네놈이 내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 배은망덕한 놈!"
아니야!
네놈도 나를 죽이려하지 않았느냐?
나는.... 나는....
곽 도....?
바닥에서 헐떡거리는 문 승의 모습이 이번에는 곽 도의 모습으로 변한다.
부러지고 손톱이 빠져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을 한 체 자신을 향해 힘겹게 손을 드는 곽 도의 모습.
괴로운 듯 입을 여는 곽 도의 음성이 들리지않는다.
뭐냐....?
괴로운거냐....?
누가.... 누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느냐?
내가.... 내가....
으.... 으아아!
격한 괴성과 함께 무적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다.
빛살 같은 속도로 까마득한 허공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무적.
"나는 너희들을 죽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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