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록-28화 (28/158)

은원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참혹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린 것처럼 하늘에도 구름이 잔뜩 끼었다.

그리고....

대청을 돌아 기웃거리며 나오는 내당의 여인들.

자신의 남편이....

아들이....

그리고 아버지가 모두 죽어있다.

목이 잘리고 몸이 여러 조각으로 잘려진 시체속에서 여인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도대체가 무슨 전쟁터도 아니고....

얼이 빠진채로 지옥 같은 광경을 보고 있던 여인 하나가 빠르게 달려간다.

으으으으....

잘려져 거꾸로 서있는 머리.

여인이 검게 변해버린 머리를 안고 떠듬 거린다.

아.... 아버....

너무 놀라고 무서워 울음 소리조차 내지도 못하고....

그리고 제 각각 달려가서 시체를 부여안고 떨고만 있는 여인들.

으허엉!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한 여인의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는 통곡소리.

삽시간에 장원안이 통곡의 바다로 변해버린다.

사랑하는 혈육을 잃은 여인들.

의지해야 할 남편이....

자식이....

그리고 아버지가....

한 서린 여인들의 통곡속에 백골문의 정문에서 장원안을 빼곰이 들여다보는 거지들의 모습이 보인다.

가 종덕.... 이 미친 놈이....

풍개 소 을목은 눈이 튀어 나올 것 같았다.

--- .... 장로님, 여유가 되신다면 백골문을 한 번 지켜봐 주십시요.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꼭 부탁 드리겠습니다. ---

백골문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한 번 가서 봐 달라는 가 종덕의 전서.

평소에는 자신이 불러도 요핑계 저핑계 대면서 바쁘다고 도망만 다니던 게을러터진 거지새끼가 '부탁드립니다'하고 정중하게 보내온 전서에 귀찮은 몸을 이끌고 이곳까지 왔건만....

이게 무슨 일이냐....?

이 거지새끼를 내가 남경으로 가서 발모가지를 꽉....!

어쨌거나 가 종덕은 가 종덕이고 도대체가 누가 있어 이런 짓을....

아니.... 백골문주 이 새끼는 또 어디에 있는 거야?

그 인간이 쉽게 죽을 인간도.... 이 꼴을 본다고 꽁무니를 뺄 인간도 아닌데....

어....?

통곡하던 여인 중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들고 석회를 뒤짚어 쓴 시체를 향해 검을 내려치는 모습이 소 을목의 눈에 들어온다.

* * *

무적은 거지처럼 거적을 뒤짚어쓰고 엎드린채로 시장통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자신들이 황산현의 건달패를 죽이고 자리를 잡은지 어느듯 이 년이 지났다.

궁핍하지만 이제는 하루 세 끼를 다 챙겨먹고 비바람을 막아줄 지붕과 담이 있는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작은 만족과.... 형제들과 함께 하는 삶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고있다.

하지만 호사다라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지난 이 년간 평온했던 황산현을 기웃거리는 인근의 건달세력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 자신들을 얕 본 것일까?

몇 번 간을 보듯이 들락거리던 놈들이....

급기야 태봉현의 기 형률이라는 자가 자신들에게 상납을 요구했다.

즉.... 자신들의 부하가 되라는 요구.

자신들의 밑으로 기어들어올 것이냐?

아니면 피를 볼 거냐?

고민 할 것도 없이 답은 바로 나왔다.

피를 본다.

길 평과 동생들은 싸우겠다고 했다.

그들에게 돈을 주는 순간부터 자신들은 그들의 개가 된다는 간단하고 명료한 이유.

그것이 지금 이곳에서 자신이 거지꼴로 이러고 있는 이유다.

왜 거지꼴로 이러고 있느냐고?

기 형률.... 그 자만 죽이면 된다.

적어도 건달패라는 작자들은 두목만 죽여버리면 그다음 부터는 자신이 신경쓸 것이 없다.

욕심 많은 그놈들끼리 남겨진 것을 놓고 서로 싸울테니까....

그렇게 무적은 기 형률 한 놈만을 노리는 자객이 됐다.

그리고 동냥질을 하며 기다린지 닷새 째가 되는 오늘....

그놈이다!

드디어 거들먹 거리며 걸어오는 기 형률과 그의 부하 몇 놈이 보였다.

침착하자.

떨지마라 조 무적!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며 상대와의 거리를 재 본다.

열 걸음.... 아홉....여덟....

상대와의 거리를 재던 무적의 눈이 반짝인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의 기 형률이 발을 든다.

한 발이 들려져 땅을 향해 내려오는 바로 그 순간....

거적을 벗어던지며 상대의 품으로 뛰어드는 무적.

무적의 손에 들린 파릿한 비수가 햇볕을 받아 반짝이고....

퍽!

아....?

당황해하는 무적과 인상을 찡그리는 기 형률.

갑옷....?

상대의 몸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비수를 힘껏 비틀자 찢어지는 옷 사이로 두툼한 가죽이 보인다.

그리고....

멍하니 서로를 보는 두 사람.

퍽!

무적의 얼굴을 때리는 기 형률의 주먹과 함께 무적이 뒤로 넘어진다.

"이 새끼가....!"

이를 악물고 뱉어내는 기 형률의 음성에 진한 살기가 묻어나고....

쭈욱!

단단하게 비수를 잡고 있던 가죽이 늘어나는 소리와 함께 기 형률의 손에 뽑혀진 비수가 보인다.

비수 끝에 피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자신의 비수는 상대의 갑옷을 뚫지 못했다.

부러진 코로 흘러내리는 피를 딲을 생각도 못하고 기 형률을 올려다보는 무적의 눈이 떨린다.

끝인가....?

여기서 내가 죽게되면 동생들과 길 평은....?

자신을 둘러싸는 상대들과 기 형률의 모습이 보이고....

퍽!

누가 때린 건지도 모른다.

단지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통증 속에 몸을 구부렸다.

웅크리는 자신의 눈앞을 어지럽히는 한자루의 칼.

이제는 뺏겨버려 남의 손에 들린 칼이 자신을 향해 그 싸늘한 인광刃光을 흩뿌린다.

그리고....

퍽!

....?

죽음을 기다리는 무적의 눈에 튀어나올 듯 커지는 기 형률의 눈이 보였다.

핏발이 선 기 형률의 눈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자 목을 꿰뚫고 있는 화살이 보이고....

끄으으....!

괴상한 신음과 함께 쓰러지는 기 형률의 몸뚱아리.

얼이 빠져 멍하니 그 모습을 보는 기 형률의 부하들과....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길 평과 자신의 동생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와와!

달려오는 동생들의 고함소리에 놀란 기 형률의 부하들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고....

"쫒지마!"

짧은 자신의 말에 멈춰서며 자신을 둘러싸는 길 평과 동생들.

"괜찮은가?"

길 평이 걱정스럽게 묻고....

"어떻게 된 거야?"

무적의 말에 길 평이 반 봉옥을 돌아봤다.

"계속 대형의 뒤를 따랐습니다."

계속....?

"내가 여기로 올 줄 알았나?"

"짐작은 했습니다."

무적이 고개를 끄덕이며 곽 도를 돌아봤다.

"네놈의 그 활은 또 뭐냐?"

"뭐라니요? 대형을 살려준 활이지요!"

억울하다는 것처럼 눈을 부릎뜨는 곽 도에게 무적이 인상을 쓴다.

"열 번 쏴서 한 번도 못 맞히는 그 활로?"

"아....! 그게.... 으흐흐...."

멋적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곽 도의 오른손에서 갈라진 엄지와 검지가 보인다.

갈라지고 다시 붙어 아물고.... 굳은 살이 벤 손가락이 또 터져서 갈라지도록 활을....

이녀석들이....!

자신을 위해 애쓰는 동생들의 모습에 코끝이 찡해졌다.

"계속 활 쏘는 연습을 했나?"

"뭐.... 할 일도 없고 해서.... 아! 그 흐르는 코피나 좀 닦아요!"

버럭 고함을 지르는 곽 도를 보며 무적이 피식 웃었다.

"혼자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운이 없었다."

"운이 아닙니다."

응....?

갑작스런 음성에 무적이 고개를 돌렸다.

반 봉옥....?

"무슨 소리지?"

반 봉옥이 기 형률의 시체를 가만히 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관에서 나오기 전에 먼저 이곳을 떠나지요?"

"그러자."

* * *

무적이 가만히 눈을 떴다.

자신을 향해 차가운 검을 내려치는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무적의 손이 올라가고....

쩡!

악!

쇠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검을 놓치며 주저앉아버리는 여인.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무적이 천천히 일어나고....

아.... 아아....!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체 뒤로 물러나는 수많은 여인들.

차가운 무적의 눈빛에 몸을 떠는 여인들의 모습이 애처럽게 보인다.

무적의 눈길이 여인들을 지나 대문으로 향하자 한 무리의 거지들이 보인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커다란 눈을 하고 자신을 보는 거지들.

무적이 거지들이 앞으로 걸어갔다.

꿀꺽!

소 을목은 마른 침을 삼키며 걸어오는 무적을 봤다.

초점없는 멍한 눈.

하고 있는 꼴이 정말.... 귀신이나 다름없다.

온통 하얀 석회칠을 하고도 부족한지 그위를 피로 덮고 있는 모양새.

그리고 상대의 모습을 살피는 동안 천천히 자신의 앞에 서는 귀신 꼴을 한 자.

"그럼 뭐지?"

얼이 빠진 것 같은 귀신이 자신에게 입을 열었다.

뭐라니....?

가만.... 그런데 지금 이새끼가 반말을....?

"야! 이 새끼야! 어디서 반말을...."

삐윳!

헉....!

고함을 지르던 소 을목이 황급히 타구봉을 휘둘러 무적의 칼을 막았다.

타앙!

커다란 쇳소리와 함께 소 을목의 몸이 뒤로 밀리며 공처럼 바닥을 구르고....

"장로님!"

깜짝 놀란 거지들이 소 을목을 향해 달려가자 소 을목이 손을 젓는다.

"나는 괜찮다."

소 을목의 말에 거지들이 이번에는 무적을 돌아봤다.

저건 도대체가....?

초점없는 맹한 눈으로 빈 허공을 보고 서 있는 모습이 정말이지....

소 을목이 전신의 공력을 끌어올린채로 무적을 본다.

누굴까....?

아무리 준비가 없었다지만 한 번의 부딛침에 자신이 튕겨나가다니....

"반 봉옥.... 운이 아니면 뭐냐....?"

정신 나간 귀신의 입에서 또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나오고....

반 봉옥....?

반 봉옥이 누구지?

소 을목이 거지들을 둘러보자 거지들도 고개를 젓는다.

자신들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

털썩!

뭐....야?

혼자서 중얼거리던 정신나간 귀신이 이번에는 또 혼자서 쓰러져 버린다.

가 종덕 이 새끼야....!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소 을목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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