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 * *
"이 인간아! 살아있었으면 냉큼 달려오지 왜 이제야...."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한 임 영영이 무적에게 소리친다.
한 식경 이상을 쏘아부치는 그녀의 잔소리에도 무적은 화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늙어버린 아내의 모습에 안쓰러움만이....
엎어져 훌쩍거리는 그녀의 등 뒤로 작은 방안의 간단한 살림살이가 눈에 들어왔다.
계속 혼자 지냈는가?
방안에 남자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길 평과는....?
"당신은 여전히 힘이 넘치는군...."
"힘이 넘쳐....? 야이.... 인간아! 이제는 잘 때가 되면 허리와 무릎이 쑤셔서 잠도 안 온다. 잠도!"
영영....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씩씩하구나....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어떻게 뒈지지 않고 살아있느냐고!"
무적의 눈에서 야릇한 빛이 떠오른다.
"내가 죽은 걸 알고 있었어?"
"반 봉옥이 와서 대성통곡을 하더라...."
"그들이 나를 죽였다는 말도.... 했나?"
임 영영의 커다란 몸이 출렁인다.
"그래...."
도대체가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내 아내도 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그것도 동생들의 칼에....
이 개 같은 상황을 누가 설명 좀....
아니.... 혹시 아직도 무간지옥을 헤매는 건가?
답답해서 속이 터지는 것 같다.
이 늙은이야!
너라도 나와서 이야기 좀 해봐라....
무적이 애꿎은 도왕동부의 늙은이를 원망하고....
"무적 나 좀 볼까?"
문밖에서 들리는 길 평의 말에 무적이 임 영영의 얼굴을 가만히 본다.
"나가봐."
무적이 천천히 일어나 작은 방문을 열고....
주방으로 이어진 문을 열고 객점 밖으로 나왔다.
빈 공터에 내어진 식탁위로 놓여진 술병과 간단한 안주가 먼저 눈에 뛴다.
그리고 묵묵히 앉아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길 평의 모습도....
"이야기 해 봐라."
"먼저 한잔해."
이제는 많이 진정된 듯 술잔을 내미는 길 평이 오히려 무적보다 더 침착해 보인다.
무적이 조용히 길 평을 보다가 술잔을 받아서 단숨에 비운다.
카아!
목젖을 태우는 것 같은 자극과 함께 한 잔의 독한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백.... 건 인가?"
"우리가 즐겨 마시던 것 아닌가?"
무적이 손 안의 빈 잔을 가만히 봤다.
힘든 시절 자신들의 아픔을 달래주던 값싸고 독한 술.
하지만 친구가 있고 형제가 있어....
이 독한 한잔의 술이 달콤했었는데....
"왜 나를 죽여야했지?"
"글쎄....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 자네를 죽여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믿었지만 기실은 우리가 살고 싶어서 자네를 판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 백골문이라는 곳이 나를 팔아야 할만큼 무서웠나?"
"무서웠냐고....? 내가 먼저 하나 묻지.... 동생들은 만났나?"
동생들이라는 말에 무적의 눈살이 파르르 떨린다.
자신의 손에 맞아죽은 곽 도와 반 봉옥.
그리고 자신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 자결한 황 충보와 나머지 동생들.
그들의 모습이 눈앞으로 스쳐지나간다.
빌어먹을....!
"만났군.... 아무 말도 않던가?"
"무슨 말....?"
"반 봉옥이 아무 말도 않던가?"
길 평이 이상한 것처럼 다시 묻는다.
반 봉옥....?
왠지 자신을 보던 반 봉옥의 야릇한 눈빛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무적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합비로 배달을 갔을 때 일거야.... 그 하루 동안 정말 무서운 일이 생겼네."
길 평이 힘겹게 술잔을 들며 말을 꺼냈다.
"누군가가 우리를 찾아왔네. 그리고 죽이려했지...."
황급히 손안의 술잔을 털어넣듯이 비워버리는 길 평.
크으....!
길 평이 입가에 묻은 술을 딱아내고....
"그 자는 오자마자 우리에게 제수씨를 데려가겠다고 하더군."
"영영을....?"
"그래.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서 아무말도 못하고 떨고만 있었네. 그 무서운 기세와 차가운 기운.... 정말이지 처음으로 우리가 죽는다는 공포를 느꼈다네. 맨 몸으로 맹수 앞에 던져진 것 같은 그런 공포말일세. 그리고 그때 반 봉옥이 나서서 상대를 말렸네. 여자가 필요하면 웃는 얼굴로 술을 따라줄 아름다운 여인이 필요한 거지 슬픔에 젖어 죽어가는 여인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아니냐며...."
"그래서....?"
"우리가 평소 감탄해마지 않던 반 봉옥의 달변과 천재성이 그날 모두 나타났네. 여인을 취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를 죽일 필요는 없다. 여인의 임자만 죽이면 된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이 취하려는 여인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주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우습게도 당시 상대가 수긍을 하더군. 우습게도 말이야...."
"그래서 나를 죽이고 영영을 그놈의 품에 안겨줬나?'
"아니지.... 말했지 않았나? 반 봉옥의 그 숨겨둔 천재성이 그날 모두 나왔다고...."
"어떻게 한 거지?"
"반 봉옥은 빠르게 흑사방과 염 천세를 끌어들이더군. 혹시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지지 않을까 해서였을 거야. 그리고....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또 발 빠르게 자네를 죽일 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그자들에게 알려주더군. 물론 그동안 자네는 집에 돌아왔지만 무사했고...."
반 봉옥.... 이 자식이 무슨 짓을....?
"길 평! 너는 죽는 것이 그렇게 두려웠나? 왜 반 봉옥이 하자는데로 다 해줬지?"
차가운 무적의 음성이 들리고....
길 평이 무적을 잠시 쳐다봤다.
"왜 반 봉옥의 뜻대로 다해줬냐고? 크크크.... 한날 한시에 죽자는 우리의 맹세대로 우리도 모두 죽고싶었다. 그런데 반 봉옥이 말리더군.... 그 놈이.... 그래 그 놈이 그러더군. 영영이.... 네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말이야...."
"....!"
퍽!
무적의 손안에 들린 술잔이 힘없이 부서져 버리고....
길 평의 눈이 슬쩍 무적의 손을 본다.
손안에 있는 깨어진 술잔의 파편을 움켜쥐고도 손에서 피가 나지 않는다.
반 봉옥....
길 평이 한사람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였다.
"그 놈이 말했지.... 우리는 모두 다 죽어도 상관이 없다고.... 너와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한 우리는 모두 다 죽어도 상관이 없다고.... 하지만 남겨질 네 아내와 자식은 어떡할 거냐고....? 크크크.... 목숨이 아까웠느냐고....? 무적 우리는 정말이지 너와 함께 죽고 싶었다."
뭐....야?
왜 이야기가 이런 방향으로....
자신의 몸에 비수를 박아 넣던 동생들의 슬픈 얼굴이 떠오른다.
곽 도.... 반 봉옥.... 설마 내가 너희들을....
"그래....서?"
"반 봉옥은 거의 혼자서 모든 일을 다 계확하고 실행에 옮겼다. 너를 죽여야한다면 꼭 황산 운무곡에서 죽여야 한다고.... 그리고 반드시 한 사람은 영영의 곁에 붙어있어야 한다고.... 영영이 아이를 낳으면 복수의 길을 닦아줘야하지 않느냐며...."
"왜 하필 황산 운무곡에서....?"
"그 웃기는 놈이 어디서 줏어 들었는지 운무곡에 절대동부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원통하게 죽은 영혼이 그곳에 들어가면 다시 살아서 나올 수 있다고.... 무적.... 그 동부에 갔었느냐?"
뭔가 잔뜩 기대하는 것 같은 길 평의 모습이 무적의 눈에 들어왔다.
터무니없는....
--- 너는 죄지은 것이 많아서 무간지옥에 떨어졌다. 영원히 죽는 순간만을 사는 무간지옥. 하지만 어떤 힘에 의해서 네가 내게로 왔다. 이또한 인연이며 이 세상을 이루는 수많은 질서 중의 하나.... ---
도왕동부의 얄미운 영감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뭐가 어떻게 된거야?
반 봉옥.... 도대체가 너 누구냐?
"무적! 묻지 않나? 그곳에 갔었나?"
"나는.... 그곳에 갔었....다."
힘겹게 열리는 무적의 말에 길 평이 조용히 눈을 감는다.
네놈이 옳았구나.... 반 봉옥.
고맙다.... 정말 고맙다.
가만....?
갑자기 길 평의 눈이 찢어질듯이 커진다.
"무적....! 너 설마....?"
무적이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 이.... 멍청한...."
길 평의 신음과 같은 말에 무적이 멍한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구름속으로 피에 젖은 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한 마디 변명도 없던 곽 도.
죄스러워하던 황 충보와....
그리고 모든 것을 계확하고 또 그 결과를 눈앞에서 보고도 말없이 죽어간 반 봉옥.
이 놈들아.... 나더러 어쩌라고....
한마디 말도 못하고 얼이 빠져버린 무적의 눈에 작은 술 항아리를 들고 오는 임 영영의 모습이 보인다.
탁!
술이 가득 찬 무거운 항아리의 무게에 탁자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임 영영의 입이 열렸다.
"마시자!"
영영.... 괜찮은 거냐?
"우리 아들은.... 그리고.... 너를 탐낸 그 놈은 누구지?"
"아들이 아니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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