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167화 (167/168)

167화. 여행(2)

“인연의 시작이구나. 그때의 봄, 금낭화가 만개했었지. 봄이어서 나는 곽 노인의 객잔을 찾았고, 그곳에서 은교교를 만났다.”

모든 운명은 우연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만들어진다.

어떤 사람은 운명을 손에 쥐고 흔들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운명에 자신의 삶을 양보한다.

건녕제가 그런 사람이었다.

“구패객으로 살면서, 건녕제는 황제를 단 한 번도 미워하지 않았다. 황제 역시 그런 조카의 바람을 외면하지 못했었다.”

머나먼 이국에서 병으로 죽어갈 때, 황제는 외로웠을 것이다.

그 외로움은 ‘연기가 없는 불’로 살았던 구패객의 아픔보다 깊고, 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외롭지 않았다. 이곳에서 은교교를 만났던 그 봄날 이후에는.”

언제나 함께 있었다.

몸이 멀리 있어도 마음은 떨어져 있지 않았다.

소림사에서 육조의 숨은 제자 불화를 만나, 밀소림의 인연을 이을 때, 사도명은 은교교를 생각하면서 일의생명을 깨달았다.

역천반야대능력은 검성의 진전과 더불어, 오늘날의 사도명을 만든 두 개의 큰 기둥이었다.

참회석을 통해 금강일양지를 얻었을 때, 은교교는 함께 있었다.

형산에서 축융의 반지를 얻을 때는 옆에 없었지만 사도명의 그녀의 방울 소리를 기억했다.

무릉촌에서 은교교가 적암의 마녀로 변했을 때, 사도명은 추호도 그녀의 회생을 의심하지 않았다.

“곽 노인의 객잔에서, 교교는 자신보다 타인을 배려했었다! 그것도 나를 보면 반드시 본래의 은교교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이유 중의 하나다.”

은교교가 적암의 마녀로 변할 뻔했던 이유는, 곽소혜의 몸에 빙의한 무릉신녀 때문이었다.

무릉신녀 진소하는 검성 설운경을 사랑했지만,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원망했다.

하지만 진실은 드러난다.

진소하는 청옥소검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보고 검성의 진짜 마음을 알게 되었다.

“진실은 숨겨지지 않는다. 봄이 오면 꽃이 피어나듯, 세상이 변하면 숨겨왔던 것들도 알려진다.”

사도명은 과거의 길을 더듬어 곽 노인의 객잔을 찾았다.

폐허가 되었을 거라 생각했던 객잔은, 그러나 깨끗이 고쳐져 있었고 성업 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곽소혜가 그를 맞았다.

“그이가 연락을 했어요. 이제쯤이면 오실 거라 생각했어요.”

곽소혜는 품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연자강과의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다.

“사실 아버지의 요리를 좋아하진 않았어요. 너무 담백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아버지의 요리를 사람들에게 내고 있네요.”

그녀는 사도명에게 요리를 가져다주면서 활짝 웃었다.

“그나저나 저희에겐 조카를 언제 보여주실 건가요?”

“하지만 우린… 어쩌면….”

사도명은 뒷말을 흐렸다.

청혼했지만, 계속 거절당했다는 말을 하기 어려웠다.

하룻밤을 장백산에서 머물렀다.

밤에 꿈을 꾸었다.

어릴 때 꾸었던 꿈, 검몽이 되는 시합의 꿈이었다.

무림맹의 태자가 될 수 있는 그 시합에서, 사도명은 최연소 우승자가 되었다.

그리고 우승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

다음날 사도명은 장백산을 떠나, 여행의 마지막을 걸었다.

옛 무림맹으로 향하는, 은교교와 함께 걸었던 경로였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천라옥벽을 갖고 가지 못하게 방해했던 자들. 철검산장의 일. 그리고 무림맹에 도착하여 벌어졌던 그, 복잡하고 아팠던 일들.”

은교교가 무림맹주 설청산의 딸이라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수십 배 더했던 충격은 설청산이 세외 오대마문에 의해 키워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그분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라겁황이 될 숙명은 설청산에게 주어졌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숙명을 거부하고, 진실된 영웅으로 죽었다.

사도명은 은교교에게 설청산을 존경해야 마땅하다고 말했었다.

은교교도 그를 존경했다.

그런데도 은교교가 사도명의 청혼을 거절하는 이유는, 번번이 설청산 때문이었다.

- 게다가 내 어머니는 여와방의 방도이시잖아요. 두 분은 사랑으로 맺어지지 않았어요. 난 사랑으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은교교는 자신에게 사도명의 짝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 달빛 교교하던 그 밤에 사랑하는 남녀가 만난 것이 아니예요. 무림을 삼키려는 오대마문의 후예와 천하를 암중 조종하려는 여와방의 제자가 만났던 거예요.

“결코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의 나가는 것이다.”

사도명은 은교교와 걸었던 옛길을 따라 걷는 내내 생각했다.

“우리는 이 길을 함께 만들었다. 당신에겐 자격이 넘친다.”

철검산장의 장주인 왕유를 위해 일으켰던 정당한 분노.

“이 길을 또 함께 걷자. 그때 한 번 더 청혼을 하마.”

사도명은 마침내 무너진 옛 무림맹의 폐허에 도착했다.

마침내 여행이 끝난 것이다.

“거대한 무덤으로 변한 지하! 여기에서 나는 삼 년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교교의 방울 소리에 깨어났지.”

그때도 방여립으로 대표되는, 세상 깊은 곳의 악의는 존재했다.

악의와 싸우는 의지도 있었다.

“여기 묻혀 있었던 전대 맹주들은 모두 그 저항의 상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사도명은 지하에서 삼 년 동안, 그들이 남긴 힘을 전달받았다.

그가 얻은 중 가장 강력한 힘은 역시 조화심이었다.

“천중무극신공! 일대 맹주 천무제 님이 창안하신 것을 이대 맹주 파천도제께서 완성하셨지.”

파천도제 호불군은 맹주 중, 유일하게 고금구천강에 꼽힌다.

그는 흑영을 조직했고, 자수정 편역을 남겼다.

모두 무림맹이 처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포석이었다.

위기에 순간 흑영은 무림맹을 구했고, 자수정 편액은 폭발하여 무림맹이 아수라혈교 자체로 변하는 것을 막았다.

또한, 자령비고도 만들었다.

자령비고 속에서 천중무극신공은 대대로 전해져서, 결국 사도명이 방여립을 물리치는 일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천중무극신공은 검성 님과 불화 님의 기둥 위에 올려진 가장 튼튼한 대들보다.”

호불군은 아수라혈교의 음모에 의해 수라겁황으로 부활했다.

하지만 마음속에, 자신의 의지를 남겨놓았다.

덕분에 호불군은 최후의 순간에 오히려 사도명의 생명을 구했다.

“모두가 영웅이시다. 하지만 굳이 말하라 한다면, 호불군 님이 가장 큰 족적을 남기셨다.”

공로를 쌓는 일과 선업을 쌓는 일에는 우열을 다툴 방법이 없다.

하지만 악의를 부수려는 반격의 씨앗은 모두 호불군에 의해 마련되었던 것이다.

“불군(不君)! 군자가 아니다. 왜 그런 이름인지 모르겠구나.”

사도명은 쓰게 웃었다.

“내가 보기에 가장 큰 군자시고. 영웅이시다.”

여행은 끝이 났다.

사도명은 긴 여행을 통해 마침내 확신을 얻었다.

“나는 나다. 사도명이 맞고, 방여립은 아니다. 설령 방여립의 혼이 내가 되었다고 해도, 그것 역시 사도명이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는 장백산을 내려왔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서, 은교교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사도명은 마지막 한 곳을 더 들러야만 했다.

창천문!

시골로 내려온 사정후 부부가 정착했던 마을!

그곳에 세워져 있던 문파.

창천문은 사도명의 사부 양일생의 문파였고, 사도명의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기도 했다.

양일생의 사정후의 친구였고, 사도명의 사부였다.

그는 사정후 부부를 죽인 사람으로 사도명의 원수기도 했다.

양일생은 또한 사도명이 부모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도왔다.

그는 사도명의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사도명의 아버지 사정후는 지금은 죽은 전대의 황제가 간언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시골로 내려온 사정후를, 양일생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나의 사문 창천문은 검성의 진전을 이은 문파다. 왜 그러한 곳이 이런 시골에 있었을까?”

사도명은 마침내 고향에 도착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창천문 건물을 향해 걸었다.

“가능성이 없다. 결코 가능성이 없기에, 무조건 확인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운 노래였다.

사도명의 안색이 차츰 굳었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음색의 노래! 은교교의 목소리였다.

사도명은 창천문 담장에서 막 피어나고 있는 금낭화를 보았다.

때는 겨울!

필 수 없는 계절에 꽃이 빠르게 피어나고 있었다.

사도명은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창천문을 열었다.

끼이이이이-!

커다란 대문이 열리는 소리는 귀신의 호곡성처럼 스산했다.

마당이 보였다.

꽃이 사방에 만개한 마당 중앙에 작은 정자가 있었다.

한 쌍의 부부가 맞은편에 양일생을 두고 앉아, 서로 술잔을 건네고 있었다.

“도명이 어떨까?”

양일생은 술잔을 한 번에 비운 후에 크게 웃었다.

“타인의 생각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명운을 스스로 개척하란 의미일세. 하하하.”

“도명? 사도명? 그거 좋군! 아주 좋아. 하하하.”

사정후도 껄껄 웃었다.

“…아버지? 어머니?!”

사도명은 자신도 모르게 솟구쳐서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사정후 부부가 사도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한 차례 빙긋이 웃더니 바람으로 변해 사라졌다.

바람은 꽃도 함께 쓸어가더니, 사방을 휘감았다.

다시 바람이 잦아들었을 때, 사정후 부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마당을 덮고 있던 꽃도 사라졌고, 겨울의 스산한 추위만이 사방에 가득했다.

양일생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네게 이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랫동안 기억했다가, 비로소 보여주는구나, 네 부모를!”

양일생이 사도명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사도명은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양일생의 앞, 정자의 맞은편 자리에 사정후 부부 대신 앉아 있는 사람은 은교교와 연자강이었다.

연자강이 밝게 웃었다.

“네가 여기로 찾아오라 했다기에, 은 소저와 함께 왔어.”

은교교도 미소를 지었다.

“여행은 즐거웠나요?”

사도명은 발작하듯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나랑 혼인해, 교교! 거절하면 안 돼. 지금은 절대로 안 돼. 시간이 없다! 네게 자격은 충분하니까, 그런다고 대답해. 그렇게 하겠다고 무조건 대답해!”

은교교는 놀라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내 그녀는 눈물마저 흘렸다.

“괜찮아요, 정말? 내게는 자격이 없는데도 정말로….”

“한다고 해! 무조건 그러겠다고 해! 지금 대답해야 해.”

“고마워요. 고마워요, 정말.”

사도명의 몸이 사라졌다.

본래 있던 장소에서 사라지는 즉시, 양일생과 은교교, 연자강의 사이에 나타났다.

그는 양일생을 보며 말했다.

“…진짜 …맞습니까?”

양일생은 미소를 머금은 채 오른손을 들어, 소매 속으로 보이는 검은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양일생이 맞는지 묻는 거라면, 맞다. 나의 사랑스러운 제자여.”

은교교와 연자강이 불에 덴 것처럼 움직이며 뒤로 날아갔다.

사도명이 전음으로 두 사람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전력으로 도망쳐. 이유는 묻지 말고, 일단 무조건 도망쳐!]

은교교와 연자강은 모두 사도명을 믿고 있었다.

사도명의 전음이 끝나는 직후, 두 사람은 곧장 몸을 날렸다.

전광석화 같은 움직이었지만, 두 사람은 멀리 가지 못했다.

양일생이 웃었기 때문이다.

“하하. 거기 서거라.”

연자강은 그 자리에서 굳었다.

은교교도 자신의 두 발이 통제를 벗어나 땅에 붙어 버렸음을 느끼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그 앞의 사람은 누구예요, 무제?”

사도명은 차마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신음했다.

양일생의 미소는 계속 그의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사부! 당신이 어찌 살아 있는 거요?”

“진짜 죽음에서도 살아나는 사람을 이미 여럿 보여주었다. 하물며 거짓 죽음이야! 하하하.”

“저 두 사람은 왜 불렀소?”

“네가 의문을 품는 것 같아서.”

“날 감시했단 거요?”

“네가 의혹을 품지 않고 무림연합으로 돌아갔다면, 저 두 사람도 무사히 돌아갔을 것이야.”

“방여립인가? 사부도…. 방여립에게 몸을 뺏겼소?”

“이런! 하하하. 하하하하.”

양일생이 갑자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정말 뛰어난 화공이 자신을 그렸다. 어느 날 자화상이 화공에게 물어. 야아, 너는 나를 똑 닮았구나. 그럼 뭐라 대꾸할 테냐?”

사도명은 웃지 못했다.

방여립은 자신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그저 태초부터 스스로 존재해 온 악의라고 믿었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악의! 근원적인 악의! 사부가 그걸 만들었단 거요?”

“만들었다? 그랬었지! 한데 마음에 들진 않았다. 뭔가 조화롭지 못하다 생각했지. 그래서 떼어냈고 세상에 버렸다.”

양일생의 웃음이 짙어졌다.

“말해 주었지. 자아, 멋대로 살아보려무나. 그랬더니 정말 자라더구나. 무럭무럭! 여러 가지 일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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