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조화천하
사도명은 은교교와 은령의 소리로 약속을 했었다.
자신이, 자신이 아닐 때는 방울을 울리지 않게 만든다는 약속.
그 약속 덕분에, 사도명은 은교교를 장악한 방여립에게 속지 않았다. 그리고 은교교 속의 방여립을 제거했다.
방여립은 두 사람의 약속에 대해 알 방법이 없었다.
오직 사도명과 은교교,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찾아왔던 연자강과 곽소혜만 아는 비밀이었다.
연자강은 황제를 구했다.
사도명은 도광효와 정화를 구한 후, 옥현신개 쪽을 보았다.
옥현신개는 눈을 부릅뜬 채로 사도명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령자와 도제 담표운의 눈에서는 빛이 꺼지고 있었다.
여인의 모습을 한 방여립이 무령자의 심장을 부쉈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방여립은 도제 담표운의 복부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두 사람은 자신에 대한 공격에는 방어하지 않았다.
무령자와 도제는 모두 옥현신개 옆의 노인 방여립을 공격했다.
덕분에 옥현신개는 살았다.
삼 대 일의 공격에 당한 노인 방여립은 가슴과 허리에 상처를 입은 채 뒤로 물러났다.
“우리는 겨우 두 사람이어서, 어쩔 수 없이….”
사도명의 몸이 사라졌다.
황제의 옆에서 사라진 사도명은 무령자 옆의 여인과 도제 옆의 어린아이의 앞에 환상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손을 저었다.
그들이 뒤로 물러나는 순간에, 연자강은 옥현신개 옆의 노인 방여립을 베었다.
두 사람의 검은 사람을 죽이는 검이 아니었다.
아이도, 여인도, 노인도 비틀거리며 물러나더니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을 때, 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주변만 두리번거렸다.
파혼검은 살리는 검이었다.
그 검은 이혼대법으로 증식한 방여립의 혼을 부숴, 본래 몸의 주인인 영혼을 되살렸다.
사도명은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무령자와 도제를 보았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습니다. 황제부터 살리지 않고선 혼란을 수습할 방법이 없어서요.”
무령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잘못을 범했으나 무제께서 책망치 않으니 고마울 따름일세.”
도제도 피가 멈추지 않는 자신의 배를 잡은 채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해치는 것보다 살리는 기분이 좋군. 옥현 방주. 우리의 잘못들을 우리 대신 조화무제에게 사죄해주길 바라네.”
무령자와 도제는 죽었다.
그들은 정파의 거두였다. 도리를 지키고자 살았으며,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보다 남을 위했다.
곽소혜가 대풍자, 화운악과 함께 황제의 뒤로 왔다.
사도명은 옥현신개와 더불어 황제의 옆으로 왔다.
네 부류로 나뉘었던 근정전 앞은 다시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방여립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방여립이 앞으로 나섰다.
“언제부터 우리를 속인 거냐? 이긴 건 우리가 아니라 너였나?”
사도명은 자신들의 쪽에 있는 각각 다른 외모의 나이의 여섯 명을 보았다.
그들은 방여립이었다.
그러다가 파혼검에 의해 본래의 영혼을 되찾았다.
사도명은 방여립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당신들도 가능하오. 이 사람들처럼 본래로 돌아갑시다.”
방여립들이 저마다 중얼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우린 방여립이다. 우리더러 다른 사람이 되라고?”
“힘을 버리라고? 세상을 가질 수 있는 이 야망을 던지라고?”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버리는 게 아니라 되찾는 거요. 당신들을 만든 본래의 영혼. 첫 번째 방여립은 내 속에서 사라졌소. 여러분도 가능하오.”
방여립들은 사도명과 연자강의 손에 어린 파혼검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보았다.
“너희가 모두 몇 명인 줄은 아느냐, 사도명?”
사도명은 이미 숫자를 세어두고 있었다.
“아홉 명. 제정신을 차린 여섯 명을 더하면 열다섯. 맞나?”
“하하하, 겨우. 그러나 우린 일백 명이 넘는다.”
방여립들이 웃기 시작했다.
한 명이 웃자 다른 사람이 웃었고, 모두 비슷한 목소리와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한 번 이겼다고 완전히 이긴 것 같으냐, 사도명?”
사도명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끝내 싸워야겠소?”
“네가 이미 말했잖느냐?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고! 설령 여기서 끝이 난다 해도, 언젠가는 또다시 반복될 싸움이라고.”
방여립들이 사도명의 주변을 둥글게 에워쌌다.
그리고 다가서기 시작했다.
**
제갈평은 서둘렀다.
제갈청미가 그를 따라서 움직였고, 여섯 명의 천사들이 그 주변을 둥글게 호위했다.
일행이 황궁으로 들어가려 하자, 금의위가 그들을 막았다.
“시간이 없다. 도와주시겠소, 천사들?”
소화가 검을 젓자, 금의위들은 모조리 날려갔다.
아무리 일급 이상의 무위를 갖춘 금의위라도, 천사들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제갈평은 무인지경으로 뚫린 황궁 안으로 달리듯 걸어갔다.
“방여립들이 여기에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로군.”
소화가 웃었다.
“별달리 상관은 없소. 이미 연자강으로부터 파혼검을 전수 받았고, 익혀냈으니까.”
“하지만 저들은 조금의 문제가 될 것 같소만.”
많은 사람들이 앞을 막은 채 모여 있었다.
여섯 천사들은 모두 그들의 몸에 있는 굉천환에 반응하는 자신의 오른손을 보았다.
“성화산인.”
“한 명 한 명 처리에 시간이 걸립니다. 빨리 무제를 만나야 한다지 않으셨습니까, 가주님?”
비화가 뒤에서 물었다.
제갈평은 멈출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달려갔다.
“만나야 하오. 그러니 길을 열어주시오. 최대한 빨리 가서 전해야 할 말이 있소.”
제갈청미가 뒤를 따랐다.
“어떤 말을 전하시려는 건가요, 아버지?”
여섯 명의 천사들은 부지런히 길을 열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제갈평은 무인지경인 양 움직일 수 있었다.
“세상에 방여립이 너무 많다. 무제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모두 당해낼 방법은 없다.”
“그런 얘기라면 굳이….”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방법을 찾았지 뭐냐. 천하 멸망의 예언. 재액. 그것을 막기 위한 고금구천강의 준비.”
제갈평의 숨이 가빠졌다.
“방여립들을 막을 방법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무제께 알려야 한다.”
“그런 일이라면, 아버지!”
제갈청미가 제갈평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전력으로 신법을 전개했다.
“더 서둘러요. 한시라도 빨리 알리면, 세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제갈평은 그동안 황궁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알지 못했다.
사도명이 첫 번째 방여립과 마지막 싸움을 벌인 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제갈평은 아홉 겹의 성벽을 모두 건너서 근정전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굳어 버렸다.
그곳에 수백 명의 나이와 성별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앞에 사도명이 있었다.
제갈청미가 뒤에서 물었다.
“저 사람들은 뭘까요?”
“…방여립들 같다. 무제는 아무래도 내가 알려주려 했던 걸 이미 깨달으신 모양이다.”
“어떤 것 말인가요?”
“방여립의 이혼대법. 자신의 영혼을 퍼뜨리는 것. 지금까지 상대할 방법이 없다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방법을 찾았다 했죠?”
“바로 저것. 방여립의 영혼이 퍼지는 것처럼, 우리들도 사람 사이에서 퍼져가는 강력한 마음 하나를 갖고 있지.”
수백 명의 사람들.
제갈청미는 그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을 느꼈다.
“저들이 방여립이라면 하나같이 감당하기 어렵게 강할 겁니다. 그런데 왜 움직이지 않죠?”
“무제다. 조화무제 사도명의 마음을 저들이 공유하고 있다.”
제갈청미는 가부좌한 사도명의 모습과 수많은 방여립들의 모습이 똑같다는 것을 겨우 알아차렸다.
“조화심결. 조화심이군요.”
“나보다 타인을 위하는 마음. 제 일대 무림맹주 천무제 님이 만드시고, 파천도제 호불군 님이 완성하셨던 천중무극신공.”
제갈평이 손으로 눈을 비볐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세상은 이미 스스로 답을 찾아내어,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혼대법으로 퍼지는 방여립의 영혼을 조화심으로 막아낼 수 있었던 거다.”
“아버지가 찾아내신 방법을 알리려 왔는데, 조화무제는 이미 그걸 알고 있는 거군요.”
제갈평은 사도명과 수백 명의 방여립들을 둘러보았다.
연자강이 그의 옆으로 왔다.
은교교, 곽소혜, 대풍자와 화운악,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황제가 걸어왔다.
“황제 폐하.”
“짐은 천하를 다스린다. 하지만 조화무제는 사람을 다스리고, 마음을 다스리는구나.”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난 것 같다. 비로소 평화가 왔다. 짐은 한 일이 별반 없건만, 이 많은 것들을 가질 자격이 있을지.”
**
반란을 일으키며 모였던 사람들은 자진하여 흩어졌다.
성화산인들은 스스로 천사들을 찾아와 자신 속의 굉천환을 해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방여립은 마음에 퍼져나가는 조화심 속에서 사라졌다.
굳이 파혼검을 시전할 필요조차 없었다.
사도명은 첫 번째 방여립을 이겨냈고, 세상에 퍼진 수많은 방여립들의 마음에 조화심을 퍼뜨리는 것으로 어둠을 몰아냈다.
근원적인 악의.
방여립은 완전히 사라졌다.
대풍자는 다시 개봉으로 돌아가 구걸을 시작했다.
“내 속에 첫 번째 방여립이 숨어 있었다니. 이제 내가 정신을 잃고 기억을 날리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해도 되겠지?”
동냥을 다시 시작했지만, 전처럼 냄새를 풍기지는 않았다.
깨끗이 씻고, 사람들을 골리기보단 도와주려고 애썼다.
황제는 내정을 도광효에게 맡기고, 정화와 배를 타고 떠났다.
서역 교역로를 열기 위한 정벌에 나선 것이다.
“짐은 약속을 지키게 될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황제는 떠나기 전에 사도명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사도명은 그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황제는 떠났던 길을 돌아오지 못하고 원정의 도중에 병세가 악화되어서 죽었다.
황통은 법도대로 이어졌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세상의 진짜 힘과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단 하나의 이름, 조화무제.
화운악은 신 무림맹의 해체를 세상에 선언했다.
“세상의 흑막은 사라졌소. 더 이상 무림에 맹이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그는 연합을 제안했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구조가 아니라, 십구성좌가 협의체를 구성하여 골고루 권력을 나누는 구조를 주문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가 알았다.
황궁이든, 무림이든, 모든 권력의 정점에는 오직 한 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화무제 사도명.
옥현신개는 무량자와 도제 담표운의 죽음 이후, 개방의 용두방주 자리를 내놓았다.
그는 초야에 묻혀 지내며, 사도명에 대한 미안함을 자주 표했다.
하지만 황제의 죽음 이후에, 갑자기 다시 강호로 돌아왔다.
그리고 세상을 온통 뒤집어 놓을 의혹을 사도명의 앞에 던졌다.
**
사도명은 둥근 탁자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 옆에 은교교가 있었고, 다른 쪽 옆에 연자강이 앉았다.
사도명의 맞은편에는 옥현신개가 보였다.
제갈평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시다시피 저는 최근에 조화천하록을 완성시키는 중이었는데, 옥현신개가 찾아왔습니다.”
제갈평은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근자 수년간의 평화를 깨뜨릴 말을 했죠.”
제갈평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옥현신개에게서 멈추었다.
옥현신개는 사도명을 보았다.
“나는 무제께 여러 번의 신세를 졌습니다. 또한, 여러 번의 피해도 끼쳤음도 압니다.”
사도명이 웃었다.
“서론이 기신 걸 보니, 좋은 얘기를 하러 온 건 아닌가 봅니다.”
“나는 여전히 의심합니다.”
“의심? 무엇을요?”
“무제는 무제가 맞습니까?”
사도명의 눈이 커졌다.
“아니면 무엇 같습니까?”
“방여립과 싸워서 이기셨다 했지요? 아니라면? 이기지 않고 졌다면? 지금 제 앞에 앉은 분이 무제가 아니라 방여립이라면?”
사도명은 빙그레 웃었다.
“걱정 마세요. 세상에는 더 이상 방여립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위장이라면요?”
옥현신개가 눈을 빛냈다.
“지금 권력과 무림, 모든 것의 정점에 무제가 있습니다. 이것야말로 방여립이 원했던 것 아닙니까? 나는 의심합니다. 혹시 이겼던 것은 방여립이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무령자와 도제, 죽어 간 수많은 이들의 희생은 대체 무엇이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