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불가능한 가능
“덕분에 학동을 구하고 제 목숨도 구했습니다. 모든 걸 다 드려도 보답으로 부족합니다.”
기대홍은 장운객잔의 음식을 잔뜩 시켰지만, 대풍자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구해준 놈마다 음식 선물만 받았으면, 내 배가 어찌 되었겠느냐, 화운악?”
맞은편에 앉아 있던 화운악은 빙그레 웃었다.
“음식이 쌓이고 쌓여 사부님의 배가 터져버리셨을 겁니다.”
대풍자는 기대홍을 보았다.
“들었느냐?”
“들었습니다. 그런데 화운악 님이라면…. 혹시…?”
“혹시 뭐?”
“혹시 신 무림맹의 맹주님이 아니십니까?”
“맞다. 근데 그게 중요해?”
“아! 중요하진 않죠.”
“중요하지 않아? 무림맹주 앞에서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네놈은 무림인이 아니란 거냐?”
대풍자의 고함에 기대홍은 식은땀을 닦았다.
“예? 아, 그게 중요하긴 한데, 지금의 저로선 아무튼 보답을 해드려야 한단 생각이어서요.”
화운악은 쓰게 웃고 말았다.
“이해하십시오, 기 원주님. 사부님은 장난이 심하십니다.”
“장난이라니! 은혜를 갚겠다면서 먹을 것이나 내 오는 녀석에게 방법을 가르치고 있지 않으냐?”
“농은 그만두시고, 그냥 원하는 것을 설명하십시오, 사부.”
“이렇게 해라, 기대홍.”
대풍자는 땟물 흐르는 손으로 탁자 위의 음식을 집어 먹으며 누런 이가 보이게 웃었다.
“살다 보면 이상한 일이 생길 거다. 네게, 혹은 네 주변에 이상한 일이 생기면 기억해 둬라.”
기대홍은 포권했다.
“네. 제가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잘 잊지 않습니다.”
“좋아. 그런 걸 기억했다가 내게 와서 말하면 된다.”
“대풍자 어르신께 직접 말입니까? 정말 그것이면 됩니까?”
“꺼억! 굳이 찾아올 필요도 없다. 네가 사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육씨 성을 가진 사냥꾼이 산다.”
“육씨 성. 사냥꾼. 기억했습니다, 어르신.”
“이상한 일을 보면 그 녀석에서 말해라. 그럼 내가 알게 된다. 이상한 일을 일곱 개를 내게 알리면, 오늘 내가 베푼 은혜는 갚은 것으로 친다. 어떠냐? 좋지?”
기대홍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받은 도움은 매우 큰 것이었는데, 그가 해줘야 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너무 작았다.
대풍자가 웃었다.
“일곱 개가 많아? 그럼 다섯 개로 줄일까?”
“아, 아닙니다. 일곱 개. 설령 그 숫자가 넘어도 저는 계속 어르신께 알리겠습니다.”
기대홍이 포권한 후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사도명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육씨 성의 사냥꾼. 그도 대풍자 님의 은혜를 입었습니까?”
대풍자가 탁자를 쾅 소리가 나게 치면서 웃었다.
“하하. 정확해. 그는 도합 백 개의 이상한 이야기를 모아 내게 전달하는 것으로, 은혜를 갚기로 약속했지.”
“이상한 이야기라면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겁니다. 백 개의 이야기라면 백 개의, 세상 속 비밀이 모이는 겁니까?”
“개별적 이야기는 잔뿌리며, 파편이다. 하지만, 모아 놓으면 커다란 줄기가 보이지.”
대풍자는 부푼 배를 두드렸다.
“이것저것 집어먹으면 배가 부르듯, 이것저것 알다 보면, 방립의 진짜 뜻을 알지 않겠느냐?”
방립은 방여립이 전진교의 이혼대법을 훔칠 때 썼던 이름이었다.
전진의 후예들은 모두 방여립의 음모를 막고, 그로부터 이혼대법을 되찾는 일에 평생을 바쳐왔다.
사도명은 대풍자가 사람들을 구하는 비결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렇게 모은 정보와 천기를 읽는 능력을 결합해, 정확한 미래를 예측하는 겁니까?”
“비슷하군.”
“맞는 게 아니라 비슷하다 하심은….”
대풍자는 화운악을 보았다.
화운악이 대신 설명했다.
“미래를 정확하게 볼 순 없습니다, 무제. 하지만 실수 없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가 있죠.”
사도명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깨달았다.
“보기가 아니라 만들기?”
“맞습니다. 기대홍의 경우, 아마 악군이 학동 한 명을 가둔 것까진 우연이었을 겁니다.”
대풍자가 피식 웃었다.
“늘그막에 제자복이 생겼다니까. 더 없이 똑똑한 놈이 전진에 들었으니, 이제 곧 전진교가 부활할 수도 있겠구나.”
화운악은 쓰게 웃으며 두 손을 들어 금륜과 은편의 공력을 대풍자에게 보여주었다.
금빛과 은빛의 어울림을 보면서, 대풍자가 껄껄 웃었다.
“부활할 수 있겠구나가 아니라 무조건 부활한다로구나. 하하.”
“기대홍에게 서찰을 보내신 건 사부가 하신 일이죠?”
대풍자는 화운악에게 대답하지 않고, 사도명을 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제갈평 가주를 만나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사도명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제갈평은 관찰자였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모으고, 서술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대풍자는 분석가이며 또한 기획자였다.
모은 이야기의 속뜻을 분석하고, 미래를 설계한다.
대풍자는 사도명의 되물음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다시 웃었다.
“이미 내가 모든 상황을 꾸몄다고 확신하고 있구나.”
“동냥 그릇을 놓고, 기대홍의 인간됨을 시험하신 거잖습니까?”
“그 부분은 틀렸다. 나는 이미 기대홍의 인간됨을 알았고, 반드시 그릇에 돈을 놓을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 제갈평 가주가 갖고 있는 정보를 이용하십시오.”
대풍자를 보는 사도명의 눈이 희망으로 반짝거렸다.
“이제 확신합니다. 천하에 퍼진 방여립을 그물망 속에 몰아넣어, 그를 소탕하실 수 있는 분은 대풍자 님뿐입니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내가 왜 아직 하지 않았겠느냐?”
“!”
대풍자의 물음에 사도명은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가능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건 애초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을까?
“방여립에게 또 다른 능력이 있습니까?”
“세상의 사람은 다양하다.”
대풍자는 자신이 여기저기 들쑤셔놓아 난장판으로 흩어진 상 위의 음식을 가리켰다.
“이 음식들은 더러 달고, 더러 쓰고, 더러 고소하다. 개중에 풍미가 깊은 것도 있다. 세상 사람도 특성이 저마다 다르지만, 그중 최고로 치는 덕목은 넷이다.”
“가르쳐 주십시오.”
“우선은 본다는 의미의 관(觀)이다. 그 덕목은 세상을 깊이 살피어 기록한다.”
“제갈평 가주 말이군요.”
“이 덕목을 가진 이는 많다. 조화무제 사도명. 너 역시 남보다 세상을 세밀히 살피는 편이지?”
“남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것도 깊이 보려고 노력합니다.”
“두 번째는 깨우친다는 의미의 각(覺)이다. 각인은 관한 것에 숨은 의미를 깨달아, 사물과 세상 흐름의 본질을 이해한다.”
“대풍자 님이 대표적인 각인이시군요.”
“나만 그럴 리가! 너도! 여기 화운악도! 각인이 아니라면 어찌 무공의 본질을 이해하랴?”
옆에서 듣고 있는 화운악이 활짝 웃었다.
“보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으니, 관인이어야 각인이 될 수 있겠습니다.”
“옳다. 관인이란 여기 차려진 화려한 음식을 맛보는 사람이고, 각인이란 그 음식을 소화시켜, 몸의 활력으로 하는 사람이다.”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음식을 소화한 후 그 힘으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일을 도모하는 모습이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지.”
사도명의 눈이 빛났다.
“그린다는 의미의 화(畵)! 화인은 혹시 세상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사람입니까?”
“정확하다.”
“이해하였습니다. 대풍자 님이 기대홍에게 보낸 편지가 세상의 모습을 그림 그리는 화의 대표적인 예가 아닙니까?”
“나는 화인이 맞다. 그리고 방립 역시 화인일 테고.”
“마지막, 네 번째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행인이다.”
사도명은 설명을 듣지 않고도 그 뜻을 이해했다.
세상을 어떻게 만들지를 그림 그렸다면, 남은 일은 행동하는 것뿐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은 행동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행동 말입니다.”
“그 범위가 문제다. 저녁을 먹고자 하는 행동과 천하를 얻고자 하는 행동이 같을 순 없지.”
사도명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윽고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방여립!”
“그렇다. 그놈야말로 행인이지. 그는 관, 각, 화, 행의 네 가지 덕목을 모두 갖췄다.”
사도명은 대풍자가 자신의 능력으로는 방여립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방여립은 천하를 상대로 행동했지만, 대풍자는 자신의 주변에 대해서만 행동해 왔다.
두 사람은 같은 행인이지만, 행함의 범위에 차이가 컸다.
사도명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대풍자 님마저 그리 말씀하시면 천하는 어떡합니까?”
“나보다 더 크게 행하는 행인을 찾으면 된다.”
“어디에서 그런 사람을 찾습니까? 찾기 쉬웠다면 이미 오래전에 찾았을 것이잖습니까?”
“나는 계속 노력해왔다.”
대풍자가 눈을 빛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마침내 찾아냈다.”
대풍자의 시선이 사도명으로부터 떠나지 않았다.
사도명은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제게는 그 정도의 능력이 없습니다.”
“너는 이미 방립의 음모를 여러 차례 무산시켰다.”
“최선을 다했지만, 하나의 껍질을 부수면 더 큰 껍질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러면 그것마저 부수면 될 것이 아니냐?”
대풍자의 눈이 형형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방립을 몰아서 그물 속에 넣자 했느냐? 내게는 확실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림이 있다.”
“그걸 행해주십시오.”
“말했잖느냐? 나는 화인이지만 행인까지는 아니다. 내가 행하지 못하는 일을 너는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명.”
사도명은 대풍자와 화운악을 번갈아 보았다.
화운악이 자신에게 대풍자를 만나야 한다고 계속 권했던 이유를 비로소 알아차렸다.
“맹주도 대풍자 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저는 단지 하나의 문장만을 들었습니다.”
화운악과 대풍자가 똑같은 문장을 동시에 말했다.
“찾아낼 수 없다면, 찾아올 수밖에 없는 곳에서 기다린다.”
사도명은 잠시 생각했다.
이윽고 문장의 뜻을 깨닫고,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두 분은 정말로 내가 그 일을 하기 바라는 겁니까?”
“힘든 일도 아니잖느냐?”
대풍자가 웃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죽었다. 거기에 한 명을 더한들 뭐가 어떻단 말이냐?”
“방여립은 세상을 모두 바꾸려 합니다. 어떻게 바꾸건 상관없이, 그는 어쨌거나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도 바꾸려 할 겁니다.”
화운악이 사도명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바꾸고자 하는 황제를 찾아왔을 때, 그 황제가 바로 무제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도명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러한 계획은 그 자신도 이미 생각해 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일은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서 신 무림맹의 모든 이들에게 묻기도 했었다.
오늘, 사도명은 마침내 자신의 망설임에 대한 답을 얻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모두가 인정합니다. 지금의 황제에게는 황제의 자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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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냐? 정화가 남만 밀림의 파천마궁을 공략 중이며 생사객은 그를 돕고 있단 거지?”
황제가 눈을 빛냈다.
“파천마궁이 정말 내가 생각하는 흑막이라면, 이번 공략으로 짐은 방여립의 뿌리 한 가닥 정도는 잘라낼 수 있을 것…. 큭!”
황제가 가슴을 쥐었다.
그리고 심하게 기침했다.
“쿨럭. 쿨럭. ……이런!”
입을 막았던 손에 피가 섞인 가래가 묻어나왔다.
도광효는 얼른 깨끗한 천을 가져와 황제의 손을 닦았다.
“병세가 날로 심해집니다.”
“마음은 날로 편해진다.”
황제가 쓰게 웃었다.
“사도명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물었다지? 그때 중인들이 무어라 대답했다더냐?”
“대답은 상관이 없습니다. 사도명은 역모를 생각하고 있고, 그것만으로도 명분은 충분합니다.”
“명분! 어떤 명분 말이냐?”
“역모자는 주살해야 합니다. 사도명이 방여립을 없애면, 즉시 밀금위대를 동원하겠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전에 짐이 죽을 것이다.”
“황상!”
“도연아.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인데, 어차피 죽을 짐을 위해서 또다시 사람을 더 죽이겠다고?”
황제는 고개를 돌려 왼쪽 벽의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그런 일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지?”
사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일이 맞소, 황제. 그래서 나는 오늘 귀하를 해칠 수밖에 없게 됐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