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세상에 내가 많다
화운악의 눈이 커졌다.
사도명이 여러 개의 이름을 그의 앞에 펼쳐 놓았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지요, 맹주?”
화운악은 그 열아홉 개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다.
세상에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림맹을 재건하여 신 무림맹을 만들 때, 저를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신 무림맹의 탄생에 이들의 공이 가장 큽니다, 무제.”
“이들은 열아홉 명이지만, 또한 오직 한 명이오.”
사도명의 말에 화운악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 말이 어떤 뜻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죽을 겁니다. 그 와중에 십구성좌의 장문인들이 죽으면?”
화운악은 열아홉 명의 방여립이 십구성좌를 이끌며 모여 있는 광경을 상상했다.
열아홉 방여립이 모여 자신 중 하나를 새로운 무림맹주로 선출할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런 일은 막아야 합니다.”
“당연히 막아야지.”
사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만 막는다고 세상이 평안해질까? 열아홉이 아니라 스무 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화운악은 사도명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깨달았다.
“한 명을 더 죽이고 싶다 하십니까? 하늘을 바꾸고 싶습니까?”
“이미 말했잖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진심으로,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소.”
“하지만 한 가지는 반드시 하셔야겠습니다.”
화운악이 한숨을 쉬었다.
“저의 세 번째 사부. 대풍자는 전진파의 마지막 후예십니다. 이혼대법의 약점을 찾으려면, 무제께서 그분을 만나셔야 합니다.”
**
날이 밝고 햇살이 높이 솟았다.
황궁은 그 햇살 속에서 고요하고 침울했다.
도광효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앞에는 황제의 침소가 있었다.
황제는 대낮임에도 여전히 깨지 못하고 있었다.
“병세가 날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깨어나시는 시각도 그에 따라 점점 늦어집니다.”
도광효의 옆에는 큰 덩치의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생사객 몽염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 있지, 도광효?”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의 황제가 지닌 권위 따위는 내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지?”
“그렇겠군요.”
“나는 오랫동안 세상을 망가뜨리려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 그 실수를 만회하려 노력 중이다.”
“압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드리고자 몽염 장군을 청했습니다.”
도광효를 보는 몽염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너의 황제를 당장 깨워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돌아간다.”
“시황께서 진정 원하셨던 것은 통일된 천하이며, 그 천하의 영구한 보존이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황제도 같습니다.”
도광효는 굳게 닫혀 있는 침소의 문을 가리켰다.
“저분은 대업을 이룬 후 통일된 천하가, 다시 흔들리지 않도록 만드시려 합니다.”
문이 어느새 열렸다.
막 잠에서 깨어난 황제가 문을 열고 서 있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몽염 장군! 최초의 황제! 그분은 대체 어떠한 분이셨소?”
“이렇게 말하면 어떠려나? 조카를 몰아내어 황제가 되거나, 무림을 없애 황실을 편안케 하고자 하지는 않으셨던 분.”
“날 경멸하는구려, 장군!”
황제가 웃었다.
“하지만 시황은 책을 불사르고 유생들을 죽였잖소?”
“분열된 천하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셨다.”
“나 또한 어쩔 수 없었다면 설명이 되려나? 조카를 몰아내고, 무림을 없애려 하고, 벽씨 가문을 모두 해치고!”
황제와 몽염은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 마주 보았다.
이윽고 황제가 먼저 웃었다.
“하하. 남이 하지 못했던 경험을 한 사람에게는, 참으로 많은 것을 물어볼 수 있군.”
“쓸데없는 걸 물으려고 날 불렀다면 당장 돌아가겠다.”
“저승이란 어떤 곳이오? 죽음 이후에도 삶이 존재하오? 이건 쓸데없는 질문이 아닐 텐데.”
“물론 존재한다.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넓게!”
“혹시 그러한 곳에서 사람은 이승에서 지은 죄를 속죄해야 하는 거요?”
“물론. 귀하는 거기에서 조카에게 범한 죄와 무림에 지은 죄와 벽씨 가문을 죽인 죄를 모두 합하여 보상해야 할 거외다.”
“다행이군.”
“다행?”
황제는 쓰게 웃었다.
“빚이란 무겁소. 오래 들고 다니는 건 힘이 들 테니까.”
그제야 몽염은 황제의 몸 아래위를 모두 살폈다.
그의 내공은 깊어, 겉만 보고도 몸속에 깃든 병을 알아냈다.
“죽음이 멀지 않았군.”
“그 전에 해야 하는 일이 아주 많이 남았소.”
몽염은 진시황을 섬겼다.
지금의 황제는 몽염에게 황제가 아니었다.
“말이 끝났다면 돌아가겠다.”
황제가 도광효를 보았다.
그러자 도광효는 사도명에게 보여주었던 상소문을 몽염의 앞에 다시 펼쳤다.
몽염은 미간을 찡그렸다.
열아홉 명의 이름은 한 번에 읽기에도 많았다.
“누가 쓴 거지?”
“이름은 없습니다. 분명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아내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 썼을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러한 사람은 세상에 한 명뿐입니다.”
생사객 몽염은 오랜 세월 동안 강호를 지켜보면서 살았다.
“나도 그러한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나는 그 사람에게 강호의 숨겨진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 달라고 부탁했었다.”
“숨겨진 이야기! 십자천하록을 말하시는 겁니까?”
“세상을 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또한 부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누군가를 바랐었다.”
몽염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천하의 숨은 이야기를 읽고, 나를 멈춰줄 수 있는 영웅이 나타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도광효는 몽염이 기다렸던 영웅이 누군지 안다.
사도명은 황제의 뜻을 막았고, 생사객 몽염을 막았으며, 다시 방여립도 막아냈다.
몽염이 열아홉 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물었다.
“나를 부른 이유가 이들이냐? 이 열아홉 명을 제거해 달라는 것이 너희의 부탁이냐?”
도광효는 고개를 저었다.
“열아홉 명은 장군께서 말한 그 영웅이 제거할 겁니다.”
“그럼 내가 할 일은?”
“정화 장군을 도와주십시오.”
“정화? 마합지? 서역 정벌을 도와 달라는 의미인가?”
“서역이 정벌되면 분란이 잦아들고, 시황께서 그리 바라셨던 천하의 통일과 평안이 더욱 오래 이루어집니다.”
몽염은 고개를 돌려, 이제 의자에 앉아 있는 황제를 보았다.
“서역 정벌을 도우면 내 이득은 대체 무엇이오, 지금의 황제?”
“어둡고 어두운 흑막!”
황제는 짧게 대답했다.
“몽염 장군의 시대에는 환관 조고로, 지금은 방여립으로 존재하는 가장 근원적인 악의!”
어떤 대답은 길어도 짧지만, 어떤 대답은 짧아도 충분히 길다.
황제의 대답은 몽염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뚫고 있었다.
“최후의 흑막을 알고 있다는 건가, 지금의 황제?”
“짐은 지금의 황제니까! 황제가 자신의 천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면 아니 되지 않겠소?”
**
구양단적은 구양세가에서 부가주의 직위를 가졌다.
그는 백마사의 난리통에 백부였던 구양걸을 잃었고, 혼란스러워진 구양세가를 수습하느라 한동안 정신없이 바빴다.
“왜 총단을 옮기지 않고 계속 여기에 있는 것인가?”
소림사 지하 공간에 마련된 신 무림맹의 총단으로 들어가면서 구양단적은 투덜거렸다.
“이곳은 이미 적들에게 노출되었다! 맹주에게 총단을 옮기지 못하는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탁자가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제갈평이 보였다.
제갈평은 마치 구양단적의 혼잣말을 들은 듯이 설명했다.
“아무리 옮겨봤자 적이 옮긴 곳을 알고 있다면, 결국 소용이 없지 않겠소, 구양 부가주?”
“적이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안다는 겁니까, 제갈 가주님?”
“그 대답은 나보다 이미 모이신 분들에게 물어보는 편이 훨씬 빠르겠습니다.”
제갈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내에는 구양단적 외에도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십구성좌!
구파와 일방, 그리고 구대 가문에서 각각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각각의 문파에서 한 명씩 나와 앉아 있었다.
구양단적은 그들을 안다.
모두가 신 무림맹을 이끄는 든든한 동료였다.
적과 어울려 싸울 때는, 때로 목숨을 구해주고 때로는 목숨을 구함을 받기도 했었다.
구양단적은 미간을 찡그렸다.
“저분들에게 대체 무엇을 물어본단 말입니까?”
“만약 구양 부가주께서 묻지 않으신다면, 저분들이 오히려 구양 부가주께 물을 겁니다.”
끼이이-!
구양단적의 뒤에서 나무로 된 문이 소리를 지르면서 닫혔다.
구양단적은 고개를 돌려, 문을 닫고 있는 사도명을 보았다.
그가 문을 닫는 이유는 모여야 할 사람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구양단적은 머릿속에 한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에게는 제갈평과 사도명을 제외한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단 하나의 질문이 있었다.
- 오늘도 햇살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 있는가?
구양단적은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랬는데도 구양단적이 물으려 했던 질문이 어딘가에서 들렸다.
“이곳은 지하라 해가 보이지 않네요. 오늘 햇살도 여전히 구름에 가려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한데 말입니다.”
개방의 인의협개 적양곤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자, 빙긋이 웃었다.
“하하. 뭘 그렇게들 봅니까? 저야 빌어먹는 거지 처지라, 늘 햇살을 그리워합니다.”
적양곤은 개방의 봉황령주였다.
봉황령주는 개방의 총방인이 용두방주가 죽으면, 그 자리를 계승해야 하는 신분이었다.
적양곤의 말을 들은 구양단적의 눈이 커졌다.
적양곤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 비가 모두 내렸으니, 곧 햇살이 다시 비치겠지.
구양단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 대꾸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답이 들려왔다.
“밖은 비가 내리는 모양이더군.”
“비가 모두 내렸다면, 햇살이 곧 다시 비치겠지요.”
열아홉 쌍의 시선이 각자 서로의 눈을 보았다.
제갈평은 한숨을 길게 쉬며 눈을 감았다.
사도명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열아홉 쌍 시선의 주인들을 각각 한 명씩 천천히 살폈다.
사도명이 웃었다.
“아무래도 한 명의 실수도 없이 모두 맞추신 모양입니다, 가주.”
제갈평도 따라서 웃었지만, 그 웃음은 무척 썼다.
“제가 글을 쓴 사람임을 이미 짐작하셨구려, 무제.”
“몽염이 왜 가주께 십자천하록을 쓰게 했는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기록자가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모르던 일도 알게 될 겁니다.”
“맞습니다. 저는 그래서 저 사람들을 알게 됐지요.”
제갈평은 열아홉 명을 한 명씩 번갈아 살폈다.
“열아홉 명의 방여립! 십구성좌에 스며들어서, 우두머리를 없애고 자신이 십구성좌의 주인이 될 때를 기다리는 자들.”
열아홉 명의 무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갈평의 말에는 틀린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구양단적이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나는 이제 잘 모르겠소. 언제부터 내가 방여립이었고, 또한 구양단적이었는지.”
적양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서로 비슷한 생각은 했군. 십구성좌에 들어가서 일인자가 되는 때를 노리기로.”
구양단적은 열아홉 명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사도명을 보았다.
“이혼대법에는 문제가 있소, 무제. 그게 뭔지 아시오?”
“나뉘고 나뉘다 보면 서로 구분이 안 되는 것. 나와 나뉘어진 또다른 내가 다시 나눠지면 알아볼 방법이 없을 것이다.”
“옳소. 그래서 나는 스스로와 약속을 정해야만 했다오. 정해진 질문과 정해진 대답.”
“주고받는 너희의 대화는 잘 들었다. 구름에 가린 햇살! 비가 다하여 다시 나오는 햇살!”
“과연 알아들으셨군.”
“알아듣지 못하겠다. 왜 이런 짓까지 하나? 왜 자신을 몰라보면서까지 세상을 부수려고 해?”
열아홉 명의 방여립이 동시에 웃었다. 그들은 동시에 검을 뽑고, 장력을 돋고, 창을 들었다.
“너무 뻔한 대답 아니오? 세상이 거기 있는데, 어찌 부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이런 미친! 내가 모든 걸 걸더라도 너만은 막겠다.”
“해보시든지.”
구양단적이 가장 먼저 사도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쉽진 않을 거요, 무제! 세상에는 내가 무척 많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