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역모와 역심
“휴우. 이 녀석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도연아.”
황제의 말에 도광효는 쓰게 웃었다.
“사람이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모르는 걸 알기란 정말로 어렵죠.”
두텁게 쌓인 상소문들.
그 중의 절반가량은 자신이 방여립의 분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모두 틀렸다.
방여립은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킬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 방여립의 실체를 알게 되면, 그건 방여립이 의도적으로 노출시켰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의 상소문은 황실이 명교를 무너뜨려, 세상이 무너지게 되었다는 성토였다.
“모두가 방여립이 명교의 복수를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방여립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으니까요.”
“그래. 한때는 나조차도 그렇게 믿었지.”
“천하에 공포가 퍼지고 있습니다. 공포에 저항하며 방여립과 싸우려는 자보다, 공포에 굴복하여 방여립에게 충성하려는 자들이 오히려 늘고 있습니다.”
“백성이란 나약하구나.”
“백성이 나약하면 나라조차 나약해집니다. 이번의 공포가 나라를 흔들지도 모릅니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도광효는 황실을 성토하는 내용의 상소문 한 장을 들어서 활짝 펼쳤다.
“공포는 또 다른 공포로 잠재울 수 있습니다.”
“…방유의 전례를 따르자는 게냐? 상소문을 올린 자를 찾아, 구족을 멸하자는 게냐?”
“구족은 너무 많습니다. 본인과 그 주변만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방여립과 명교를 연계지어, 이미 황실에 대한 반감이 팽팽한 이 마당에….”
“황실의 이름은 없습니다.”
황제의 눈이 커졌다.
그는 비로소 도광효의 계획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았다.
“이름을 빌리자고?”
“공포에 이은 증오. 백성은 황상의 말처럼 어리석습니다. 그들이 방여립을 잊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쉽습니다.”
**
호북성 벽씨의 가문에 참사가 벌어졌다.
가주를 비롯한 백여 명의 식솔들이 처참하게 몸이 잘린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곳에서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
저녁을 지을 곡식을 가지로 창고에 들어갔던 찬모 한 명만, 흉수들에게 발각되지 않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상한 자들이었어요. 머리 모양도, 옷 모양도, 심지어 사용하는 말도 이상했어요.”
벽씨 가문은 대대로 벼슬을 해 온, 명문이었다.
즉시 관군이 투입되었다.
결과도 신속하게 나왔다.
“서역의 놈들이다. 새외 오대마문. 그 잔당이 죽은 동료의 복수를 하겠다고 저지른 짓이다.”
“오대마문은 자신들의 본역을 떠나 중원으로 들어왔고, 많은 이들을 죽였다. 그런데도 어처구니없게, 자신들이 일으킨 혈겁의 사과는커녕, 복수를 운운한다.”
“악인들의 뿌리를 제거하려 하나, 그 본원이 서역에 있어 쉬운 일이 아니다.”
관군의 발표는 빠른 속도로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황제의 빠른 대처가 다시 발표되었다.
“황제께서 분노하셨다. 서역을 정벌하여, 다시는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백성이 없도록 하겠노라 말씀하셨다.”
정벌군이 조직되었다.
황제는 마합지를 총대장으로 임명한 후, 그에게 성과 이름을 내렸다.
그전까지, 마합지는 대대로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었다.
성씨는 정.
그리고 이름은 화.
“정화여. 서역을 정벌하여, 천하를 평안케 하라.”
정화가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던 날의 밤에, 황제는 또다시 잔뜩 쌓인 상소문을 보고 있었다.
“황실에 대한 성토는 사라지고 서역 정벌을 찬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도연아. 네 판단은 참으로 언제나 옳구나.”
“방여립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내용은 계속 들어옵니다.”
쌓여 있는 상소문 중, 푸른 견출지를 붙인 것이 한 장 보였다.
도광효는 그 상소문을 꺼내어 황제의 앞에 펼쳤다.
“제가 확인하고 따로 표식해 놓았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상소문의 내용을 읽어 내리던 황제의 표정이 변했다.
“이, 이것이 사실이냐?”
“여러 가지를 점검했습니다.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보내온 자가 누구냐?”
“상소 올린 자의 이름이 없습니다. 정식으로 올라온 것이 아니라, 많은 상소문들 사이에 그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남몰래 가져다 놓은 것이다?”
“황군의 이목을 속일 정도로 무공이 뛰어난 자가, 황상께 이 내용을 알리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 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이렷다.”
“중요한 것은 내용입니다.”
상소문 안에는 사람의 이름과 그가 방여립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조목조목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이 하도 놀라워서, 황제가 신음하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오래전부터 방여립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얘기구나.”
“지금부터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얘기기도 합니다.”
“대책! 그래, 대책이란 말은 좋다. 하지만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대체 어떠한 대책을 우리가 세울 수가 있단 말이냐?”
“모든 일은 결국 사람이 행하는 것입니다. 대책 역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도광효는 황제의 앞, 탁자의 위에 한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도명導命>
“이제는 이 한 사람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이끌고 나가듯, 세상의 운명 또한 이끌고 나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황제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는 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저 역시 사도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몇 차례 황상을 죽이려 했습니다.”
“짐의 말을 사도명이 들으려 하겠느냐?”
“듣게 만들겠습니다.”
도광효의 눈이 빛났다.
“그렇게 만들 재주가 소신에게 있음을, 황상은 아시잖습니까?”
**
달빛이 교교했다.
사도명은 화운악과 함께 흉가로 변한 벽씨 가문의 본가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등이 구부정한 노인 한 명이 주춤주춤 걸어왔다.
“황실의 분들이 아니라 들었습니다. 그러합니까?”
사도명은 노인의 주름진 눈에 깃든 두려움을 보았다.
“황실이 두렵습니까?”
“저, 저는…. 저는….”
“무림에서는 조화무제라 불리고, 본명은 사도명입니다. 황실을 무척 싫어하고 있습니다.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노인이 즉시 무릎을 꿇었다.
“저의 성은 벽이고 이름은 공입니다. 벽씨 가문의 핏줄이 아님에도 벽가 성을 가진 이유는, 제 부모의 부모가 벽 씨 가문에서 하인 생활을 했기 때문입죠.”
“좋습니다, 벽공 노인. 왜 황실을 두려워하십니까?”
“사, 사실은….”
벽공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참화가 있기 얼마 전에, 벽 가주님께서 황실로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명교에게 해를 끼쳤던 황실의 잘못을 사과하고, 방여립의 분노를 잠재우란 내용이었습죠.”
“방여립과 명교는 사실…. 음, 이 얘기는 지금은 필요 없는 건가? 아무튼, 계속해 보십시오.”
“저는 인근 마을에서 이장의 일을 맡고 있습니다.”
벽공은 참담하게 변한 벽씨 가문의 집이 애처로운지, 눈물을 소매로 여러 번 훔쳤다.
“벽씨 가문은 저희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베풀었기에, 주민들이 모두 칭송합니다. 이번의 일도, 무제께 저희의 생각을 꼭 좀 전달해달라고 하여….”
“그 생각, 말하십시오.”
“저희는 의심합니다. 정말 서역인들의 짓일까? 혹시 다른 자들이 참사를 저지르고, 누명을 씌우는 것이 아닐까?”
“다른 자들이라면, 역시나 황실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화, 황공하여 직접 입에 올리긴 뭐합니다만! 생각해 보면 왜 서역의 잔당들이 하필 이곳에서 무림인도 아닌 분의 식솔을 죽인단 말입니까?”
사도명이 화운악을 보았다.
화운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의혹이 있습니다. 더구나 곳곳에 남겨진 흔적들에는 오대마문의 것이 분명 있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황제는 아수라혈교의 잔당들을 산하에 흡수한 적이 있지.”
사도명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보면, 방여립의 뜻이 옳을지도 모르겠군요. 세상을 모두 뒤엎고 다시 세워야 한다는 그 발상 말이오.”
“이곳의 참사 덕분에, 천하인들의 생각이 온통 서역 정벌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방여립에 대한 공포는 잠재워졌습니다.”
“나는 신 무림맹에 부탁했었소. 백마사에서 생겼던 일을 세상에 소문나지 않게 해달라고.”
“저 또한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명령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누군가 일부러 소문을 낸 것처럼 빨리 퍼지더구려.”
“신 무림맹 안에도 방여립이 또 있는 것일까요? 적어도 그 수하들은 여전히 잠입하여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미 수많은 성화산인들이 스스로 죽거나, 발각당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헤아리기 힘든 숫자의 성화산인들이 세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을 터였다.
사도명은 벽공을 보았다.
“노인장. 벽씨 가문의 진짜 흉수를 찾아 달라시는 거지요?”
“그러합니다.”
“네. 그 뜻은 확실하게 전달받았습니다. 제가 지금 당장 황실로 가 보겠습니다.”
“가서 알게 되면, 우리에게도 꼭 알려 주시구려. 황실이 천하인의 이목을 옮기기 위해 이렇게 잔인한 일을 저질렀는지.”
“그리하겠습니다.”
“한 가지 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제?”
“말씀하세요.”
“만약 저희 짐작이 사실이라면, 하늘을 바꿔 주십시오.”
사도명의 눈이 커졌다.
노인 벽공의 말은 상상조차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의미했다.
화운악이 소리쳤다.
“지금 우리더러 역모를 도모하라 말하시는 거요?”
“알 될 것이 무엇입니까? 명은 처음부터 명이었습니까?”
“벽공 노인장!”
화운악의 고함에서 벽공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조화무제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무제께서 하시지 않으시겠다 하시면, 달리하겠습니다.”
“달리? 그것은 무슨 말이오?”
“듣자 하니 방여립 님은 이미 명존이시라죠? 세상 곳곳에 자신의 분신을 심어, 세상을 다시 만들려 하신다죠?”
“명존이 아니라 마존이오. 세상을 다시 세우려 하는 것이 아니라, 숫제 멸망시키려 하오.”
“잘못된 자가 황제라면, 그 황제의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이 저희에겐 도움이 됩니다.”
“….”
화운악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사도명을 보았다.
사도명을 보는 화운악의 눈빛에 담긴 것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사도명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벽공 노인장. 세상을 다스리는 일은 그다지 쉬운 것이 아닐 겁니다. 때로 피해를 보는 사람도 생길 것이고….”
“하지만 죄에 대한 응징을 필요하잖습니까, 조화무제여.”
“아무리 그렇다 해도….”
“조화무제께서 새로운 황제가 아니 되시면, 명존이 됩니다.”
벽공이 말하는 명존이란 바로 방여립이었다.
천하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진 가운데, 방여립은 이미 살아있는 신인 명존으로 불리고 있었다.
“명존이 다스리는 천하가, 서역 정벌의 핑계를 만들려고 백성을 죽이는 자가 다스리는 천하보다는, 훨씬 나을 겁니다.”
“….”
사도명도 결국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벽공의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이 전하는 마음은, 벽공의 것과 모두 같았다.
화운악이 고개를 흔들었다.
“역모의 마음이 천하에 퍼져나간다. 방여립이 사건을 일으키면, 세상 곳곳에서 호응하겠구나.”
벽공이 구부정한 등과는 달리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러니 그 전에 조화무제가 해 주십시오. 무도한 황제를 물리치고, 새로운 황제가 되어주십시오.”
화운악은 사도명을 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도명은 낮지만, 모두의 귀에 들릴,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황실로 가겠소. 황제를 만나겠소. 만나서, 벽공 노인장의 의혹이 사실인지 알아내겠소.”
**
황궁의 경비는 삼엄했다.
하지만 사도명에게는 무인지경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황궁에는 수많은 방이 있었고, 그중 어떤 방에 황제가 머무는지는 극비였다.
깊은 밤.
사도명은 황궁 전체의 기척을 감지하여, 단숨에 황제가 머물고 있는 방을 찾았다.
황제는 자지 않고 있었다.
사도명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정말로 이 조화무제를 통제할 방법이 있겠느냐, 도연?”
사도명의 뒤에서 도광효의 대답이 들려왔다.
“물론이옵니다, 황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