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과거가 미래에게 고하다
방여립은 혼자 웃었다.
소멸운이 주변의 모든 것을 없애고자 회오리치는 모습이, 그가 보기에는 무척 좋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었다.
비바람이 거센 날에, 비에 젖어 날지 못하는 작은 새를 보면 더없이 즐거웠다.
발로 지그시 밟아주면, 부서지는 가느다란 뼈의 감촉!
속절없이 짓이겨지는 살점의 둔탁함이 재미있어서 웃었다.
크고 나서, 비로소 알았다.
아득한 시절 이전부터 전해오던 태고의 악의!
태어날 때부터였는지, 혹은 태어나고 난 후였는지!
언젠가부터 자신 속에 깃들어 있는 그 악의를 깨달았다.
과거는 언제나 미래에 고한다.
자신의 호의와 자신의 악의를 자신의 존재로 각인시킨다.
세상과 그 구성원은 발전하고 융성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니 나가는 방향을 돌리려는 의지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 무어 그리 놀라운 일이겠는가?
“모조리 없애는 거다.”
방여립은 서문용맹을 다독였다.
이미 죽어, 조금씩 식어가는 피부의 감촉이 상쾌했기에 기분이 더욱 좋았다.
“세상아. 절망해라. 고금구천강이 너희를 없애려 한다. 그 절망 속에서 통곡하면서 구원자를 갈구해라.”
방여립은 미래를 상상했다.
죽음 속에, 참혹한 핏물 속에 엎드려 애원하는 세상을!
“그럼 내가 등장해 주마. 나의 명교가 너희가 흘리는 절망의 피눈물을 딛고 나타나 주겠다.”
**
“도대체 왜?”
연자강이 곽소혜를 보았다.
“죽어야 할 곳에서 왜 구했소? 살았다 한들, 이 부끄러움을 어찌 견디고 살란 말이오?”
연자강은 힘을 잃었다.
소멸운이 그의 내공 태반을 앗아가 버린 상태였다.
힘이 온전했다면, 곽소혜의 비침술에 끌려오진 않았을 것이다.
“벌써 포기하고 싶나요? 다시 돌아가 어떻게 하려고요? 그냥 저 구름에 잡아먹히고 싶어요?”
곽소혜가 갑자기 비침을 자신의 몸에 꽂았다.
퍼퍼퍼-퍼퍽!
“뭐 하는 거요?”
“포기하기 싫어서요. 포기하기엔 너무 빠르다 싶어서요.”
“포기하지 않으면?”
“검은 구름은 힘을 쫓아가 소멸시켜요. 내 힘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힘을 사용할 방법으로, 이것보다 좋은 건 없을 겁니다.”
“하지만 대체 어떤 방법으로 검은 구름을 막을 거요?”
“막을 방법은 몰라요. 그래도 막을 수 있는, 그럴 가능성을 가진 사람은 한 명 알 것 같네요.”
연자강도 그 사람이 누군지를 알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백마사에 모인 모두가 그를 알았다.
화운악이 소리쳤다.
“모두들 내공을 가라앉히시오. 저 구름은 본능적으로 강력한 내공 같은 힘에 반응하고, 쫓아가서 소멸시키는 것 같습니다.”
- 푸하하. 어리지만 무림의 맹주라는 건가? 네 판단이 옳다, 화운악. 하지만 내공을 가라앉혀 어쩌잔 거지? 반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그냥 죽겠다는 건가?
변조된 방여립의 목소리가 또다시 육합전성으로 울렸다.
화운악은 자신의 외침과는 달리,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죽을 생각이 맞다, 방여립. 나는 누구보다 먼저 죽는다.”
쿠오오-오!
화운악의 내공은 강했다.
사도명에게 패한 후 그는 어딘가로 떠났다가 돌아왔다.
돌아왔을 때는 예전보다 강해진 상태였다.
“무림맹의 태자였을 때, 나는 세상에 정말 큰 죄를 지었습니다.”
화운악은 몸을 돌려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을 보았다.
그들 중에 매희구가 있었다.
매희구는 화운악이 무림맹의 태자가 되기 전, 그의 사부였다.
매희구는 화운악을 아꼈다.
화운악의 배신이 알려지자, 매희구는 자신의 눈을 뽑아 제자를 잘못 가르친 죄를 사죄했었다.
“나의 죄를 대신 갚으신 분. 이런 은혜를 나는 대체 어떤 방법으로 갚을 수 있겠소?”
화운악은 검은 구름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쿠화아아-!
검은 구름이 회오리치면서 그를 향해 움직였다.
“모두 내공을 가라앉히세요. 제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검은 구름을 유인할 것입니다.”
- 푸하하. 소멸운을 유인해서 혼자 죽겠다고? 신 무림맹의 맹주가 헛되이 죽겠다고?
“헛되지 않다, 방여립. 검은 구름을 그분 앞으로 유인해 간다. 나는 안 되지만, 그분은 저걸 없앨 방법을 알 것이다.”
- 그분?
“도울게요.”
곽소혜가 날아왔다.
자신을 스스로의 꼭두각시로 만든 그녀는, 금침을 이용해 내공의 흔적을 흘리지 않으면서도 경신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곽소혜가 남은 금침을 던졌다.
소멸운이 덮치기 직전, 화운악을 금침을 이용해 뒤로 당겼다.
쿠르르르르!
소멸운이 빠르게 이동하며 화운악과 곽소혜를 노렸다.
곽소혜는 서쪽을 향해 몸을 날리면서 연자강에게 외쳤다.
“뒤를 부탁해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죠?”
화운악과 곽소혜가 멀어졌다.
소멸운은 한바탕 회오리치더니, 두 사람을 쫓아 날아갔다.
무화가 미간을 찡그렸다.
“희생… 이라는 건가?”
소화가 고개를 저었다.
“계산일 수도 있어. 어차피 소멸하여 죽을 거라면, 두 명만 죽는 편이 훨씬 이익이지 않아?”
그녀는 연자강의 앞으로 갔다.
힘을 잃고 지쳐 있는 그의 앞에 서더니 물었다.
“귀하의 아내가 귀하에게 부탁하고 간 것은 무엇인가?”
“내자는 이곳에 방여립이 있음을 아오.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연자강이 지친 몸을 천천히 일으켜, 허리를 곧게 폈다.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방여립을 반드시 찾아내어 복수를 해달라. 그러한 부탁이었소.”
무화가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방여립은 꼭꼭 숨어 있는데 어떻게 그를 찾아?”
“일단, 당신네들 천사는 제외합시다. 당신들은 오랫동안 관속에서 동면하여 지냈음을 아오. 당신들이 방여립일 리는 없소.”
밀화 효경이 웃었다.
“옳은 판단이야. 우리 중에 방여립 교주가 있다면, 그가 우릴 깨울 수 있을 리 없잖아.”
사도명은 곤륜파 운학자가 빠진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보았다.
“여러분도 제외합니다. 금륜과 은편에 맞서 싸우면서 육합전성을 사용했다면, 모든 사람들이 눈치를 챘을 것입니다.”
구양걸이 침중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의심받아야 하겠구려. 하지만 구대세가의 사람 중에 방여립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연자강의 대답에 모두들 눈만 끔벅거렸다.
구양결이 물었다.
“아무도 아니라면, 대체 방여립이 누구란 게요?”
“아직 언급하지 않은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좌중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연자강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성화산인의 몸에 심어진 굉천환. 생살을 뜯고, 몸에 그런 걸 넣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결코 흔하지는 않죠.”
연자강도 한 사람을 보았다.
모두의 주목을 받은 의제 원일경이 빙그레 웃었다.
“하하. 내게 생살을 찢고 꿰맬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의심하는 것은 과하지 않을까?”
연자강이 원일경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서문용맹을 가리켰다.
“서문 공자는 왜 숨이 끊어져 있습니까?”
사람들 중, 구양굉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원일경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군.”
“가장 옆에 계셨으면서, 왜 모른단 말입니까?”
“금륜과 은편이 소멸운으로 변하기 전에 해를 입힌 모양이오.”
“소멸운이라고 부르는군요. 그것이 본래의 명칭입니까? 우린 그냥 검은 구름이라 불렀습니다만.”
“아까 방여립이 말하던 걸 모두가 들었지 않소? 들었으니 써먹는 것이오.”
“삼극무령심공이 세 개의 단전을 모두 사용하는 것을 혹시 알고 계십니까?”
“세 개의 단전을 모두?”
원일경이 웃었다.
“아하! 그래서 허공에 세 개의 눈이 나타나는 거구려.”
“서문용맹이 무공을 사용하는 모습을 혹시 보셨습니까?”
“몇 차례 싸우는 모습을 보았소. 인상적이었소.”
“그렇다면 삼안무극심공을 시전할 때, 한 손이 움직이면 세 개의 기운이 동시에 흐르는 모습도 분명히 보셨겠군요.”
원일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별다른 말이 없다면, 부상자 치료를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서문 공자는 숨이 끊어질 때 흉수의 정체를 바닥에 썼습니다. 흉수가 그걸 보고 발로 문질러, 글을 지운 모양입니다.”
연자강은 바닥의 흙이 쓸려나간 흔적을 가리켰다.
그리고 손을 옮겨, 좀 더 떨어진 두 군데를 번갈아 가리켰다.
“하지만 흉수는 깜빡했죠. 삼극무령심공의 특이함을.”
원일경은 연자강이 가리키는 두 곳을 보았다.
거기에 원일경의 이름이 각각 똑같은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원일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의원이오. 죽어가는 순간에 서문용맹은 나를 불러 치료받고 싶었던 거였구려.”
“혹은 방여립의 정체를 최선을 다해 밝힌 것일 수도 있고요.”
“불확실하다면 의심하지 말아 주시오. 치료해야 할 부상자가 이렇게 많은 것이 보이지 않소?”
“보입니다, 확실히.”
연자강은 원일경의 발이 지운, 한쪽의 흔적을 가리켰다.
“당신이 서문용맹의 글을 지운 흔적이 똑똑히 보이네요.”
“으아아!”
서문굉이 마침내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며 몸을 날렸다.
“용맹아. 이 백부가 너의 원한은 반드시 갚아주마.”
서문굉은 서문 세가의 당대장문인이었다.
또한 서문용맹의 백부였다.
원일경은 자신의 미간을 노리며 허공에서 내려오는 서문굉의 환두대도를 똑바로 보았다.
“조카의 죽음이 슬픈가?”
그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빙그레 웃었다.
“조카는 삼극무령신공을 익혔고, 장문인이란 자는 고작 낙일도법만을 사용한다. 서문용맹의 죽음으로, 서문 세가는 삼안창법을 잃었구나. 애석하긴 하겠구나.”
퍼-어!
피가 튀었다.
원일경의 피는 아니었다.
서문굉의 환두대도는 분명 원일경의 머리를 노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팔을 어깨에서부터 잘라버리고 말았다.
“크아악!”
연자강은 모든 변화를 보았다.
환두대도가 다가왔을 때, 원일경은 어깨를 슬쩍 틀었다.
매우 미묘한 동작이지만, 그 동작을 따라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기운이 흘렀다.
기운은 서문굉의 도가 향하는 방향을 바꾸었고, 상대를 노리던 칼이 자신을 베게 만들었다.
연자강은 원일경의 무공이 무엇인지도 알아보았다.
“건곤대나이.”
마침내 모든 사람들은 확신하게 되었다.
건곤대나이신공!
명교의 호교 무공.
원일경이었던 것이다.
부상자를 치료하고, 자신의 고됨을 돌보지 않던 의제 원일경이 바로 방여립이었던 것이다.
구대세가의 모든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구파와 일방의 고수들도 내공을 끌어올렸다.
소멸운은 멀리 갔다.
내공의 힘을 느껴도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조화결사대원들도 주변에 여러 명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에는 원일경의 도움으로 상처를 치유한 사람도 많았다.
도언직은 고개를 흔들었다.
“믿을 수 없군. 정말로 믿을 수가 없어.”
“아이야. 세상엔 믿을 수 없는 일이 참 많단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좀 더 쉽게 죽일 수 있을까 연구하다가, 의제라 불리게 되고.”
의제 원일경은 웃었다.
“내가 죽여서 죽어가는 이들을 옆에서 지켜봤더니 선량하다, 고맙다 칭송을 받기도 하고.”
무사들이 모였다.
십구성좌 소속의 무사들 눈에 한결같이 어린 것은 살기였다.
천하혼란의 원흉.
모든 흑막의 뒤에 숨었던 진짜 흑막!
방여립의 정체가 이제야 겨우 드러났다.
그를 죽이면 세상의 모든 암운이 걷힐 것이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는 일은 사라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연자강은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무화가 그의 뒤로 다가왔다.
“왜 물러서는 건가? 죽여야 할 적은 앞에 있는데.”
“그는 치밀하오. 세상을 오래 속였지. 그런데 왜 갑자기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말았을까?”
“네가 현명해서였겠지? 서문용맹이 남긴 글이 두 개나 더 남았다는 걸 네가 알아냈잖아.”
“그는 왜 굳이 서문용맹을 죽여야 했을까? 서문용맹은 본래 아무것도 알지 못했는데.”
그 말을 듣고 무화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방여립처럼 기나긴 세월 동안 세상 전체를 속인 사람의 행동은 더더욱 그러하다.
모여든 무사들이 일제히 방여립을 덮쳤다.
검과 도와 창과 적수공권이 저마다의 내공을 싣고 방여립의 온몸을 뒤덮었다.
그들 대부분이 고수였고, 한 지역을 혹은 천하를 풍미한 사람들이었다.
방여립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어 보였다.
무화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의도적인 거라고? 교주가 일부러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