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소멸과 붕괴
천지는 음양으로 나누어지고, 음양은 오행의 원리로 움직인다.
소화, 무화, 밀화, 흑화는 연자강에게 중토의 위치를 맡기면서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검성 설운경과의 싸움에서 이미 한 차례 협력했었다.
그리고 이겼다.
은편의 은빛 채찍은 내공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 채찍은 그녀의 주변 수십여 장을 덮으며, 말 그대로 공간 자체를 찢고 있었다.
찢어지는 공간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의 몸은 그 공간과 마찬가지로 찢길 수밖에 없다.
진 제국 시절에, 은편은 자신들을 포위한 무림인 일만사천 명 중 일백 명의 몸을 단숨에 찢었다.
참혹한 죽음은 죽은 자의 일백 배 넘는 숫자의 사람들에게서 용기를 빼앗았다.
누구도 더 이상 은편에게 감히 덤비지 못했었다.
하지만 천 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 되살아난 은편은, 단 한 명의 몸도 찢지 못하는 중이었다.
네 명의 천사와 연자강.
그들은 강했다.
연자강은 검성의 후예였다
그리고 천사는 팔대마문을 상대하기 위해 키워진 전사였다.
오 대 일의 싸움은 더할 나위 없이 흉험했다.
다섯 명의 강자들이 한 명의 절대 강자에 맞서 싸웠다.
바라보는 모든 이들은 손에 땀을 쥘 수밖에 없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 초 일 초에 천하의 운명과 향배가 걸려 있었다.
구대세가의 사람들은 백마사로 꾸준히 모였다.
구파일방과 더불어 신 무림맹의 주력!
백마사의 변고를 듣자, 그들은 달아나지 않고 오히려 달려왔다.
구양걸이 그들의 앞에서 커다란 주먹을 움켜쥐었다.
“팔대천사. 석단궁 교주가 저들을 준비하지 않았으면 지금 누가 은편을 막고 있을까? 무엇이 복이 되고 무엇이 화가 될지, 세상은 참으로 알 수가 없구나.”
십대문파 장문인과 화운악의 싸움도 은편의 싸움에 못지않게 험악했다.
금륜이 내쏘는, 회전하는 금색 바퀴는 구파일방 장문인이 뿜는 강기를 두부처럼 잘라냈다.
절대고수의 앞에선 어떤 고수도 예외 없이 평범해진다.
금륜과 은편, 단 두 명!
고금구천강 중의 두 명이 전 무림의 결집된 힘을 모조리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다.
구양걸이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 구대세가의 사람들도 준비합시다. 어느 쪽이건, 우열이 기운다 싶은 곳에 힘을 보태는 겁니다. 금륜과 은편에게, 무림이 천 년 세월을 건너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줍시다.”
서문용맹은 구양걸의 옆에 서 있었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쉬고 말았다.
“하지만 가능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서문세가의 삼극창절이 약한 소리를 하면 어찌하는가?”
“천사 중의 세 명은 방여립의 편에 있습니다. 방여립이 살아 있는 한, 또 다른 고금구천강이 계속하여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들도 있지 않는가? 위기를 보고,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달려온 우리들이 있네.”
“악은 늘 창궐합니다. 싸워서 겨우 이겨냈다 싶으면, 또 다른 악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서문용맹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싸움은 왜 끝이 없을까요? 이 끝없는 악순환을 끊어낼 방법은 없을까요?”
- 왜 없겠느냐? 존재한다.
쇳소리처럼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육합전성의 수법으로 울린 목소리여서, 누구도 소리가 처음 시작한 방향을 알지 못했다.
구양걸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소리쳤다.
“방여립이다.”
- 악순환을 끊어낼 방법이 궁금한가, 서문용맹?
서문용맹의 단전 세 곳이 거센 내공의 기세를 뿜어냈다.
“역시 우리들 속에 있는 건가? 무제의 말씀이 맞구나. 누구냐? 숨지 말고 정체를 밝혀라.”
- 과거는 언제나 현재에게 고하지. 돌아보라고. 그럼 미래를 알게 된다고!
“너냐?”
구양걸이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는, 세가 제자 중 한 명의 멱살을 쥐고 고함을 질렀다.
겁먹은 무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 그냥 기침을 했을 뿐입니다, 부가주님.”
- 나를 찾지 마라. 나는 어디에나 있지만, 너희가 찾을 수 있는 곳에는 없다.
서문용맹이 고함을 질렀다.
“금륜과 은편을 물러나게 해! 이런 싸움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냐?”
- 의미가 없어도 세상 사람들은 절망할 거야.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 믿었던 고금구천강이 세상을 파괴한다면! 푸하하!!
“그래도 누군가는 막아낸다. 무제와 우리 신 무림맹이 존재하는 한, 전설은 사라지지 않아.”
- 그래서 신 무림맹이 무너져야 하는 거다.
“세상 사람들의 절망이 대체 네게 어떤 도움이 된다는 거냐?”
- 갖지 못하면 부순다. 부서진 폐허야말로 새로운 시작을 위한 최고의 조건이지.
금륜과 은편이 갑자기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그들과 싸우던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화운악이 소리쳤다.
“모두들 느끼셨습니까? 금륜과 은편! 뭔가 이상합니다.”
- 진시황릉으로 들어가면서, 금륜과 은편은 생각했다. 분서갱유를 저지른 폭군. 그가 불사의 대법에 의해 다시 살아나면, 세상은 영원히 폭군의 치하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지.
금륜과 은편의 힘이 허공에서 하나로 뭉치고 있었다.
금빛이 은빛을 침식했고, 은빛이 금빛을 침식했으며, 상호강의 침식을 통해 도리어 강해졌다.
- 그래서 결심을 했다. 자신들이 막겠노라고! 진시황이 부활할 때를 대비해, 어떠한 힘이건 무위로 돌릴 수 있는 힘을 만들기로!
쿠오오오오-!
금색과 은색의 빛이 허공에서 하나가 되고 있었다.
금륜과 은편은 본래 부부였지만, 그래도 개별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몸이 허공에서 붕괴되더니, 하나로 합해지고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위기를 느낀 사람은 연자강이었다.
“아, 안 돼!”
그는 두 갈래 기운의 융합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았다.
만천개화를 극한의 공력으로 전개하면서 연자강은 금륜과 은편이 합해지고 있는 중앙을 노렸다.
“저건 거역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생명을 거역하는 힘이, 저 중앙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안 돼!”
- 죽음에서의 부활. 불사의 핵심은 생명에 대한 의지다! 그건 인간이 개별의 인간일 수 있는 이유기도 하지.
콰드드드등!
폭음이 연자강의 만천개화를 삼키면서 울었다.
금륜의 금빛과 은편의 은빛이 하나로 변한 기운은 기이하게도 어둡고 아득했다.
마치 검은 구름이었다.
- 금륜과 은편은 진시황의 부활을 죽음에 대한 의지로 상쇄시키려 했다. 모든 것을 삼키며 무로 돌리는 힘을 만들어, 폭군의 부활을 막으려 한 것이다. 푸하하.
연자강이 쏟아낸 검강의 힘은 검은 구름 속에서 소멸했다.
힘과 힘이 부딪쳐 깨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소멸이었다.
연자강은 검은 구름이 자신의 몸과 내공을 한꺼번에 끌어당기고 있음을 느꼈다.
“힘을 흡수한다. 힘을 흡수해서 다시 세력을 확장한다. 저건 모든 걸 소멸시키면서 삼키는 힘이다. 붕괴이고 파멸이다.”
연자강은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검은 구름의 세력권을 벗어나려 했으나, 가공할 흡입력이 일어나 그의 몸을 휘감았다.
“이, 이런 힘이라는 건?!”
- 태초, 탄생이 있었겠지? 무에서 태어난 일원에 의한 모든 생명의 창조. 진시황은 탄생의 힘으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려고 했다. 금륜과 은편은 자신을 희생해 탄생의 힘을 되돌리려 했던 거고.
천사들 중의 흑화가 신음했다.
“저것, 아무래도 내가 쏘는 검은 공과 비슷하지 않아?”
무화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네 능력은 자신의 힘을 상대와 상쇄시키는 거잖아. 저건 달라. 말 그대로 소멸이야.”
연자강은 검은 구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으나, 그런 힘조차 흑운에게 흡수당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몸도 흑운에게 침식당하기 시작했다.
- 너희 덕분이다. 신지를 잃은 상태에서 금륜과 은편은 너희들의 공격을 진시황의 부활로 인지한 것이다. 모든 것을 삼킬 것이다. 고금구천강 중의 두 명이 세상을 삼키리라. 푸하하.
“영웅을 희생시킬 순 없지.”
화운악 뒤에 서 있던 한 사람이 갑자기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이 거대한 한 마리의 용으로 변해 허공을 날았다.
“꾸워-엉!”
“운학자 님!”
화운악이 그를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곤륜파의 장문인 운학자는 검은 구름이 연자강의 몸을 침식하기 시작한 부분을 정확하게 노렸다.
“천룡일세!”
곤륜파의 운룡대구식은 모두 아홉 개의 초식으로 이뤄진다.
그중 최후 절초인 아홉 번째는 구룡강림.
구룡강림을 시전하면 아홉 마리의 용이 허공을 노닐며, 전후와 좌우를 모조리 그 사정권 안에 두는 것이다.
하지만 제오대의 무림맹주였던 설청산은 운룡대구식의 너머에 있던 열 번째 초식을 찾아냈다.
그것이 천룡일세(天龍一世).
지금 운학자가 시전하는 곤륜파 최강의 무공이었다.
거대한 한 마리의 용이 검은 구름을 덮쳐, 연자강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가는 무척 컸다.
검은 구름은 연자강을 놓아주는 대신, 운학자의 몸을 덮쳐 단숨에 집어삼켜 버렸다.
- 푸하하. 금륜과 은편은 사라지고 붕괴의 일념만 남겨졌다. 일컬어 소멸운(消滅雲)! 소멸의 구름은 모든 힘을 쫓아가, 부수고 흡수해 버릴 것이다.
“운학자 님!”
연자강이 자신 대신 목숨을 잃은 운학자를 보며 소리 질렀다.
그는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다시 검은 구름, 소멸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안 돼요. 그러지 마!”
세 개의 바늘과 실이 날아와 연자강의 등 뒤 세 군데에 박혔다.
바늘에서 전해진 힘이, 연자강의 몸을 조종했다.
“계속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어요. 안 됩니다. 되돌아가면 운학자의 희생을 헛되이 할 뿐이에요, 여보.”
곽소혜였다.
비침술의 목우종형을 이용해 남편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운학자를 삼킨 검은 구름이 허공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서문용맹은 으스러질 정도로 주먹을 힘껏 쥐고 있었다.
“저것이 너의 대답이냐, 방여립? 악이 만드는 악순환을, 세상을 소멸시켜 끊어낸다고?”
서문세가의 삼극무령심공은 삼단전을 모두 사용한다.
이는 삼안무류의 신법으로 응용되고, 회전하는 세 기운을 이용해 몸을 절로 띄울 수 있다.
서문용맹은 자신의 몸을 날려 소멸운으로 향했다.
동시에 세 개의 눈과 세 개의 강기의 창이 만들어졌다.
삼안신창!
서문용맹은 세 개의 창을 소멸운을 향해 겨눴다.
“너의 대답은 틀렸다. 지금부터 그걸 증명해 주마.”
“자네는 오히려 내 대답이 틀리지 않고 맞았음을 증명하게 될 걸세, 서문용맹”
차분한 목소리가 서문용맹의 바로 옆에서 들렸다.
계속 육합전성으로 허공에서 울리던 쇳소리와는 달랐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아 방여립이 분명했다.
서문용맹은 눈을 부릅뜨고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도저히 방여립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한 사람을 보았다.
“다, 당신이 방여립이라고?”
그의 시선을 따라, 세 개의 강기창도 방여립을 겨누었다.
하지만 발사되진 못했다.
한 줄기 바람이 방여립을 스쳤다. 부드럽기 그지없었지만, 모순되게도 거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바람이었다.
서문용맹의 온몸 경혈이 산산조각 부서졌다.
서문용맹은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 속에서도, 가까스로 자신의 목숨을 앗은 무공을 알아보았다.
“거, 건곤대나이?”
엄밀하게 말해, 건곤대나이신공은 무공이라 하기 어려웠다.
건곤대나이는 힘의 방향을 바꾸는 일종의 체술이자 깨달음이라 할 수 있었다.
공격하지 않고 방어하되, 공격자의 살의를 그대로 되돌려 줄 수 있는 방법.
“다, 당신은 저 검은 구름을 막을 방법을 이미….”
서문용맹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그는 흐릿한 주마등을 보았다.
살아온 삶이 그의 눈앞에 빠르게 다시 펼쳐졌다.
길지 않고 짧았던 삶 속에, 무엇보다 빛나는 한 순간이 있었다.
‘무제! 천부여!’
욕심에 빠져 마인이 될 뻔한 상황 속에서, 조화무제 사도명을 만났던 것은 행운이었다.
덕분에 조화심을 깨달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받은 은혜 보답하지 못하고 이렇게 갑니다. 부디, 방여립이 누군지 아셔서 제 복수를….’
서문용맹은 선 채로 죽었다.
방여립은 그의 시체를 안고 등을 다독거렸다.
“지친 몸에는 휴식이 최고지. 세상도 마찬가지. 세상이 이미 지쳤으니, 속히 휴식해야지.”
방여립은 서문용맹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바닥에 적어 놓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보았다.
발로 그 이름을 지우면서, 방여립은 허공의 소멸운을 살폈다.
그가 보기에 소멸운은 매혹적이고 아름다웠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그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