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고금구천강
황제가 무림의 말살을 명했을 때, 무림맹은 사라졌다.
많은 고수들이 죽음이 두려워 숨고, 절망을 느끼고 은거했다.
협도를 추구했던 삶에 회한을 경험하며 검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떠나는 이의 숫자만큼 많은 이들이 다시 돌아왔다.
초야에 검을 묻었던 고수들.
그들은 녹슨 검을 다시 닦고 무뎌진 도신의 날을 벼린 다음 강호로 재출도했다.
무림맹은 다시 창건되었다.
신 무림맹의 총단이 어디에 있는지는, 철저한 비밀이었다.
황제가 무림말살을 명했던 이유는, 명교의 방여립에게 강요받았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밀이 밝혀진 후에도, 신 무림맹은 자신들의 총단 위치를 세상에 밝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변한다.”
제칠대 무림맹주 화운악은 천하를 향해 일갈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아니다.”
화운악은 음모자들이 신 무림맹에 대해 아는 것이 적을수록, 신 무림맹은 안전하다고 믿었다.
신 무림맹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힘을 유지해야, 무림 전체도 평안하다 판단했다.
화운악의 판단은 전체적으로 옳았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복잡하다.
때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뜻을 합하고, 각자 원하는 길을 통일해야 할 때가 생긴다.
신 무림맹도 그런 이유로, 전 관련자들을 모아 회의를 열기로 했다.
첫 번째의 전체 회의.
신 무림맹의 중요 인물들이 대부분 한곳에 모였다.
소림사의 지하.
거대한 공간은 단 한 명, 불화가 파놓은 곳이었다.
그곳에 밀소림이 존재했고, 사도명이 그 비밀을 풀었다.
과거의 한때에, 숭산에서는 큰 싸움이 있었다.
황제의 말살군이 숭산 전체를 포위했었다.
조화무제가 죽음 직전까지 몰리게 되는 참화가 벌어졌다.
화운악은 벼락이 떨어진 장소에서, 오히려 새로운 벼락을 피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사실 가장 의심을 덜 받는 장소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장소인 법이거든.”
화운악은 소림사로 돌아왔고, 그런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세상의 누구도 신 무림맹이, 구 무림맹이 마지막으로 총단을 두었단 장소로 돌아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신 무림맹의 주요 인물들 대부분이 모인, 제일차 신 무림맹의 전체 회의!
제갈평이 가장 앞쪽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길게 설명했고, 내용은 고금구천강에 관련된 것이었다.
“고금구천강이라는 분류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접니다. 십자천하록에 썼었죠.”
종심기가 제갈평의 옆쪽에서 회의의 진행을 돕고 있었다.
연자강의 표정이 어두웠다.
종심기의 자리는 예전이라면 법허가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죽은 사부의 빈자리를 바라보는 제자의 표정이 밝을 리 없었다.
“저는 우선 강함을 기준으로 삼고, 다음으로 세상에 대한 공헌도를 기준에 넣었습니다.”
종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분들이 고금구천강인지, 한 번 짚고 넘어가 주시면 어떨까요, 제갈 가주님?”
“검성 설운경 님에 대해서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검성이란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 연자강에게로 쏠렸다.
그의 옆쪽에 앉아 있는 네 명, 팔대천사 중의 소화, 무화, 흑화, 밀화도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그들 다섯 명은 힘을 합해 부활한 검성 설운경을 물리쳤었다.
제갈평은 다른 고금구천강의 이름도 하나하나 읊었다.
“연대를 상관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말씀드리죠. 검성 설운경 님 외에는….”
제갈평의 입술 사이로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이름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천라대제!
파천도제 호불군!
축융지존!
“불패지왕의 이력은 특이합니다. 그는 대리국의 개국조로, 본명은 단사평입니다.”
“단사평은 그럼 다섯 번째의 사람인 겁니까?”
“맞습니다. 여섯 번째가 발타 대선사로 무상반야대능력을 세상에 남기셨습니다.”
화운악이 제갈평의 바로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알겠습니다. 여섯 분 모두, 자신의 힘을 세상에 남겨 예언된 재액을 막아내려 노력했던 분들이군요.”
“일곱 번째의 고금구천강은 조금 궤가 다릅니다. 그는 세상에 잘 알려진 사람이고, 어쩌면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일 겁니다.”
“누구입니까?”
“솔직히 저는, 이 사람이 천하를 염려하여 세상에 자신의 힘을 남겼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제갈평은 모여 있는 무인들의, 가장 뒤쪽 편을 보았다.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미모의 여인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황천법문주 야율라.
제갈평이 눈길을 주자, 야율라가 말했다.
“칸은 언제나 천하를 염려하셨다 들었어요. 그분은 자신이 가진 천하가 예언 같은 것에 의해 망가지는 걸 원치 않으셨지요.”
극히 최근에 황천법문의 시작이 원의 건국과 관련이 있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야율라는 법문에 전해오던 회생의 비술로, 사도명을 되살렸다.
그녀에게 칸은 한 명이었다.
영원한 정복자, 칭키스 칸!
테무친이 고금구천강 중의 한 명임을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들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갈평이 말을 이었다.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의 분은 부부입니다.”
화운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부? 부부이면서 동시에 절대고수였던 분들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남편인 금륜과 아내인 은편! 두 분은 사용하던 병기와 무공과 그 별호가 같습니다, 맹주.”
“하지만 저는 그러한 이름을 전혀 들어본 바가 없군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두 분은 공식적으로는 강호에 나서신 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강호에 나오지 않았는데, 어찌 그 강함을 안단 말입니까?”
“제갈세가는 기록의 가문이지 않습니까? 금륜과 은편의 이름은 진의 시황이 장성을 쌓기 시작할 때 처음 등장합니다.”
“만리장성 말씀이시오?”
“금륜은편은 만리장성의 축조를 직접 지휘 감독했다 합니다.”
“장성은 위대한 업적이 분명하지만 그걸 감독했다고 고금구천강에 오른다는 것은….”
“장성에 쓰인 거대한 돌들.”
제갈평은 좌중을 둘러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숨겨진 바위의 위용은 더욱 대단합니다. 듣기에 금륜이 바위산을 자르면, 은편이 그 거대한 바위를 옮겼다고 합니다.”
“놀랍군요. 하지만 고금구천강 선정의 기준은, 장차 닥칠 재액을 염려하여 세상에 안배를 남긴 점도 감안한다지 않으셨습니까?”
“시황제는 본래 태자 부소를 2대의 황제로 삼을 것을 유서로 남깁니다. 하지만 간신 조고와 이사가 그 유서를 바꾸지요.”
“유서 조작의 얘기는 저 또한 들어본 바가 있습니다.”
“조고와 이사는 호해를 제이대의 황제로 옹립합니다. 금륜과 은편은 그 결정에 맞서 싸웠고요. 진나라 전체의 일만사천 명 무사들을 상대해서 말입니다.”
제갈평이 알려주는 비사는 세상에 알려진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기록자의 가문을 자처하는 제갈세가에만 내려오는, 역사의 숨겨진 이면이었다.
“그래서 싸움의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금륜과 은편이 패배했다면, 저는 그들을 고금구천강 중의 둘로 넣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 천하의 모든 무인을 상대로 단 둘이 승리했다고요?”
“두 사람의 무공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 있었습니다.”
도끼 떼는 천 마리, 만 마리, 혹은 그 이상이 있어도 두 마리의 호랑이를 당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 후에 황좌에 오른 것은 호혜였잖습니까?”
“금륜과 은편은 강했습니다. 그러나 독하지는 못했죠.”
화운악은 더 이상 듣지 않고도 상황을 깨달았다.
금륜과 은편은 독하지 못했지만 조고와 이사는 독했던 것이다.
일만사천 무림인들을 모조리 죽일 수 없었던 금륜과 은편은 승리하고도 물러섰을 것이다.
“그게 두 사람이 강하면서도 강호에 나서지 않았던 이유죠! 두 사람은 살인을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세상을 떠나 시황제의 황릉에 같이 묻혔습니다.”
“아아. 그런 일이….”
화운악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후에 천하에 벌어졌을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결국 호해가 진 제국의 제이대 황제가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 제국은 멸망의 운명을 맞는다.
“진시황의 릉에 자신들을 묻기 전, 금륜과 은편은 몇몇 친인들에게 은밀히 말을 남깁니다.”
제갈평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훗날 끔찍한 시대가 닥칠 것이다. 그날을 대비해 무림의 정기를 끊을 수 없다. 우리가 끝까지 싸웠다면, 천하무림이란 대지는 사라졌으리라. 우리들이 남기는 힘이, 장차 닥칠 재액을 막는 데 쓰이기 바란다.”
화운악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되살려낸 사람!”
화운악은 소리쳤다.
“조화무제가 묻자 방여립은 말했습니다. 고금구천강 중에 되살려낸 사람이 더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제가 천하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금륜과 은편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
사람들을 둘러보는 제갈평의 눈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근심으로 깊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고금구천강 중, 그들만이 묻힌 곳이 알려졌습니다. 방여립도 어쩌면 알았을 겁니다.”
**
두두두두두-
말이 전력으로 달렸다.
말 위에는 은교교가 타고 있었고, 그 옆으로 사도명이 말의 속도에 맞춰 달려가고 있었다.
은교교는 허리의 방울을 끈으로 단단히 묶어, 소리가 울리지 않게 만들어 두고 있었다.
“당신도 말을 타는 편이 좋았을걸. 그럼 달려가면서 휴식도 취할 수 있을 텐데요.”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창천사해를 알잖아? 달리면서 대기와 주고받는 호흡이 그대로 운기조식인 걸 뭐.”
“쳇. 언젠가부터 당신, 자연스럽게 말을 놓는 거 알아요?”
“모를 리 있나? 친한 거 증명하려고 일부러 그러는데. 하하.”
사도명이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그나저나 따라오지 못하게 했어야하는데. 매우 위험한 길인지도 모르는데.”
“위험한 거 알아요.”
“알면서 왜 굳이 따라와?”
“은방울은 제 어머니의 가문에서 전해오던 것이었어요. 어머닌 유품으로 그걸 남기셨고요.”
사도명은 의아한 눈빛으로 은교교를 보았다.
그녀는 왜 갑자기 자신의 은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
“어머닌 늘 말씀하셨죠. 남자는 세상을 움직인다. 진짜 여자는, 그렇게 세상을 움직이는 남자를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
“현명한 분이셨군.”
사도명이 진심으로 웃었다.
“설청산 맹주는 그런 분을 사랑하셨으니, 운이 좋으셨어.”
“하지만 어머닌 운이 좋지 못하셨어요. 그런 병을,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셨으니.”
은교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도명은 말의 호흡이 지나치게 가빠지는 것을 보았다.
사도명은 은교교의 손을 잡더니, 이내 그녀의 온몸을 당겨서 자신이 안았다.
“히히-히잉!”
등에 태웠던 사람이 사라지자, 말은 자리에서 멈추며 울었다.
사도명은 은교교를 두 손으로 안은 채 달렸다.
“왜, 왜이래요?”
“말은 심장이 약한 동물이야. 무리해서 달리게 하면, 심장이 터져 피를 토하고 죽게 되지.”
“아!”
“하지만 그런 이유로 당신을 안은 건 아냐. 갑자기 안아주고 싶어졌어. 하도 가벼워서 날개를 안은 것 같네 뭐.”
은교교는 사도명에게 안긴 채, 그의 허리를 팔로 감쌌다.
편안하고 아늑한 품이었다.
“제가 부모님 얘기를 하니까, 안아주고 싶어진 거죠?”
“내가 안기고 싶어졌던 거야. 혼자 안지는 못하니까. 안으면, 안기게 되는 거잖아.”
“이, 이젠 내려줘요.”
“조금만 더.”
“목적지가 멀지 않았잖아요. 저도 제 발로 걷고 싶어요.”
하는 수 없이 사도명은 은교교를 내려 주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어머닌 행복하셨어요.”
언덕을 넘어가면서 은교교가 말했다.
“아버진 좋은 분이셨어요. 좋은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는, 언제나 행복하죠.”
사도명은 묻고 싶었다.
‘그럼 난 좋은 남자인가?’
하지만 결국 묻지 않았다.
어떤 것들을 묻지 않고 그저 느껴야만 한다.
언덕을 넘어서자 앞쪽으로, 마침내 거대한 구릉이 보였다.
목적지였다.
**
“십자천하록에서 십자로 상징되는 고수들을 분류하면서, 내가 직접 이름을 짓고도 의아해했던 존재들이 오은과 육객입니다.”
제갈평이 좌중을 둘러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중 육객이야말로 지금의 천하정세를 설명할 수 있는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나는 판단합니다. 왜냐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