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131화 (131/168)

131화. 자격은 스스로 결정한다

그는 설운경이 아니었다.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이 혼자 말을 할 수는 없다.

사도명은 예전에도 이와 똑같은 상황을 경험했었다.

빙의체.

사도명은 설운경에게 빙의된 혼의 이름을 불렀다.

“방여립?”

“만나서 반갑다는 말은 하지 않겠네. 자네, 내가 여기에 있을 거라는 짐작이 맞지 않기를 바랐던 거 맞지?”

사도명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왜 나쁜 짐작은 언제나 맞을까? 돌려 묻지 않겠소. 우리는 혹시 서로 만났던 적이 있소?”

“돌려 대답 않겠네. 나는 줄곧 무림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만났으나 못 알아봤다면, 아직 만나지 않았다 해야 옳지.”

“만났었군, 우리는!”

“하하하.”

“검성 외에 다른 이도 있소? 고금구천강 중, 검성처럼 되살려낸 사람이 더 있냔 말이오?”

“자네는 나의 친구가 아닌데 내가 왜 대답해야 하지?”

“대답하라고 말하고 있소.”

“당연히 있네. 내가 이미 되살려낸 사람은… 이런!”

방여립의 일그러진 표정이 설운경을 통해 드러났다.

그는 사도명이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심혼의 금제를 사용하고 있다고? 명교의 교주인 나에게?”

방여립은 십여 번의 무영섬을 동시에 쳐냈다.

사도명은 똑같은 무영섬으로 각각을 막아냈다.

퍼퍼-퍼퍼펑!

“어쨌든 통했잖소.”

사도명은 정신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다시 외쳤다.

“대답하라! 되살려낸 건 누구지? 구천강 중의 누구누구야?”

사도명은 오른손으로 성화령을 높이 들었다.

“검성 설운경 님. 들립니까? 이 신물을 기억하시죠? 싸우세요. 당신 속의 방여립과! 그는, 그의 영혼은 당신의 적입니다.”

성화령의 반짝거림이 방여립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는 석단궁이 설운경의 몸에 심어놓은 금제와, 사도명의 의지를 동시에 상대해야만 했다.

설운경의 눈에서 빠르게 빛이 꺼졌다.

“교활하다, 조화무제. 석단궁이 모든 걸 맡길 만했군.”

방여립의 시선은 사도명을 떠나 제갈평에게 닿았다.

“기록자 제갈평! 오늘의 싸움을 잘 기록해 놓아라.”

“구, 굳이 시키지 않아도 기록할 것이다, 방여립.”

“이렇게 쓰면 좋겠군. 부활한 검성이 폭주했다. 이로써, 세상을 지키려던 자들에 의한 세상의 파괴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설운경의 눈에서 완전히 빛이 사라졌다.

사도명은 그 의미를 깨닫고, 제갈청미에게 외쳤다.

“어서 떠나! 최대한 멀어져!”

소화를 비롯한 네 명의 천사들은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우리들이 먼저 한다.”

“너희가 강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방여립은 방금 검성의 제어를 완전히 풀었어! 폭주한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 생사를 도외시하며 달려들 거야.”

사도명이 외치자 무화는 껄껄 웃었다.

“조화무제! 넌 우리들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전혀 몰라.”

흑화는 칠흑검을 들었다.

“무조건 강해야 한다는 사명. 강해지기 위해 친구도 베어야 한다는 의무!”

“가슴이 두근두근 뛰네. 친구와 힘을 합해 싸우는 경험은 처음이야. 조화무제, 이렇게 하자.”

밀화 효경은 흑화의 뒤에서 걸어가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가 싸울 테니, 너는 떠나. 세 명의 천사가 방여립의 편에 남았고, 방여립의 본체 역시 아직 멀쩡하니까.”

소화의 몸이 가장 먼저 떠올라서 검성 설운경을 향해 날았다.

남은 세 명의 천사가 품 자 모양을 형성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무화도 밝게 웃고 있었다.

“밀화의 말이 옳아. 함께 싸운다는 건 기분이 좋구나. 더 강해지려고 친구를 죽이는 것보다 훨씬 기분이 좋은 거구나.”

일 대 사의 싸움이 폭발했다.

쿠오오오오-!

비산하는 빛이 터뜨리는 폭음이 하도 커서, 오히려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가주님.”

사도명이 제갈평을 보았다.

제갈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판단을 하는 거요. 지금은 피해야 하오. 무제가 잘못되면, 세상엔 희망이 없소.”

“검성의 일을 알게 되면 세상은 절망할 것입니다. 지키는 힘이 파괴하는 힘으로 변했습니다.”

“세상의 이치라는 게 참으로 오묘하지. 파괴하려던 힘 또한 지키려는 힘으로 변했잖소.”

사도명은 검성 설운경을 막아 싸우는 네 명의 천사를 보았다.

제갈평의 말이 옳았다.

천사들은 본래 적이었다.

사도명은 천사들과 싸울 수밖에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되살아난 검성 설운경은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하다는 아홉 명 중의 하나였다.

천사들은 힘을 다해 싸웠고, 이미 죽은 상태인 검성은 생사를 도외시한 채 싸우고 있었다.

불리한 쪽은 천사였다.

“알겠습니다. 여기는 천사들에게 맡깁니다. 저는 훗날을 대비하겠습니다.”

방여립은 검성 외 또 다른 고금구천강도 깨웠음을 시사했었다.

사도명은 내공을 팔처럼 뻗어 제갈평을 안으며, 옆에 있는 제갈청미를 보았다.

“혼자 달릴 수 있겠소?”

“물론이에요. 별로 크게 다친 곳도 없다구요.”

“전력을 다하여 달려야 하오. 결국 천사들은 패할 거요. 저 싸움의 승패가 결정 나면, 주변은 지극히 위험해지오.”

“화가 많이 나요.”

“화?”

“스스로 제법 강하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세상이 흔들리자, 싸워보기는커녕 도망다니기에만…. 저에게는 여력이 없네요.”

사도명이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소. 솔직히 말하자면, 승리뿐이 아니라 패배에도 자격이 필요한 법이라오.”

“자격? 패배에도 자격이 필요하다고요? 그런 자격은 대체 누가 누구에게 주나요?”

- 자신이 스스로에게! 모든 자격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오.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놀라서 옆을 보다가, 사도명은 신음처럼 소리치고 말았다.

“자강!”

분명 떠났어야 할 연자강이, 그곳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매우 천천히 걸었다.

심지어 한쪽 다리를 절면서 걸어오는 연자강은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왜 돌아온 거냐?”

백무쌍의 고함에 연자강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돌아와야만 했어.”

그는 네 명의 천사와 싸우고 있는 검성 설운경을 보았다.

“저 분은 내 사부시니까.”

연자강은 법허의 제자였다.

하지만 시간을 뛰어넘어서 그에게 검공을 전수한 사람은 검성 설운경이었다.

도화촌의 수호자였던 연자강에게, 검성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사부라 할 수 있었다.

백무쌍이 미간을 찡그렸다.

“위험해. 네 몸 상태는 최선이 아니다. 그러니까 물러나.”

“자격을 결정하는 건 나다.” 연자강은 제갈청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까 질문에 대한 대답. 각고의 노력으로 자신이 강해졌음을 인정한 후에, 스스로 불가능에 도전할 자격을 주는 거요.”

“서, 설마 연 공자는 지금 저 싸움에 끼어들려는 건가요?”

“사부가 잘못된 길을 갈 때, 그 앞을 막을 첫 번째의 의무는 제자에게 있지 않겠소?”

연자강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그는 곧장, 일 대 사의 싸움 속으로 몸을 날렸다.

걸어올 때는 다리를 절더니, 참전할 때는 다리를 절지 않았다.

강한 의지는 때로 육신이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든다.

제갈청미가 사도명을 보았다.

“왜 말리지 않으셨어요?”

“제갈 소저도 녀석의 눈빛을 보았을 거잖소. 말리지 못했소. 말려도 소용이 없었을 거요.”

연자강의 참전으로 일 대 사의 싸움이 일 대 오로 변했다.

다섯이란 숫자는 합공에 있어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오행은 천지의 운행원리다.

다섯은 서로 돕는 상생의 도리로 운용될 수 있고, 혹은 서로 반발하는 상극의 원리로 적용될 수도 있는 숫자다.

제갈평이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난 가지 않으련다.”

놀란 제갈청미가 외쳤다.

“아버지!”

“네 명 천사와 연자강은 합을 맞춰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합세하자마자 오행의 상생상극을 절묘하게 사용들 하고 있구나.”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강은 혈화 율천과 싸웠으니까요. 그 싸움을 통해, 천사들의 무공 변화가 대충 어떠한지를 깨닫고 있는 모양입니다.”

“네 명의 힘이 따로 움직일 때, 천사들이 이길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우린 위험했고, 당연히 떠나야만 했지.”

제갈청미의 눈이 커졌다.

“지금은 달라졌단 거예요?”

“오행의 방위가 모두 찼다. 상호 보완하는 힘이 검성을 거꾸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아! 이길 수 있는 건가요?”

“가능성의 문제지. 이길 수 있으나, 여전히 패할 수도 있어.”

“그런데도 남으신다고요? 위험한데도 굳이 계신다고요?”

“방여립도 말했잖느냐? 나는 기록자라고.”

제갈평이 빙그레 웃었다.

“영웅들의 투쟁을 직접 보고 기록하지 않을 바에는, 생명 하나 남기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제갈청미는 사도명을 보았다.

“무제가 설득해 주세요. 여긴 너무 위험하잖아요.”

사도명은 말하지 않았다.

그 또한 조용히 제갈평의 옆에 앉더니 가부좌를 틀었다.

“아아! 무제도 같은 생각인 거예요? 남자들은 왜 이렇게 한결같이 어리석죠?”

“청미야.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흐름이다.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건이지.”

제갈평이 사방을 가리켰다.

제갈청미는 아버지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곳에서,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신무림맹의 고수들.

황실의 군사들.

심지어, 혼을 거의 잃어버린 혼돈마인들까지 마합지의 지휘 아래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사건은 영웅이 만들어낸다.”

제갈평은 제갈청미를 보았다.

“떠나갔던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싸움임을 깨닫고 되돌아온다. 이것이야말로 석단궁 교주가 원했던, 회천이 아니겠느냐?”

“회천을 만든 영웅은 연자강 대협인 거군요?”

“그는 다친 몸으로 불가능에 도전했다.”

사도명은 자신의 목에 걸린 성화령을 보았다.

“회천. 이것의 진짜 주인은 제가 아니라 자강일지도요.”

“고금구천강의 부활. 지키던 힘이 파괴의 재액이 되니, 세상 사람들은 절망할 참이었소. 하지만 연 대협이 그걸 바꿨지.”

제갈평은 더 이상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오 대 일의 싸움이 이어지는 곳을 보았다.

“절망은 다시 의지로 바뀔 거요. 스스로 지켜야 하며, 지킬 사람은 자신밖에 없음을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이오.”

“이 내용 역시 적어주실 거죠? 집필하신다는 무림천추록에 넣어주실 거죠, 가주님?”

“물론이오, 무제. 그러기 위해서 나는 여기에 남은 거니까.”

**

제갈평이 적은 무림천하록에는 이때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떠났던 이들이 돌아왔다.

사람들은 깨달았다.

위험으로부터 달아나는 도피는 스스로를 지켜주지 않는다.

연자강이 그 사실을 일깨웠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불가능을 뛰어넘었다.

네 명의 천사를 도와 부활한 검성 설운경의 망령과 싸웠다.

검성은 망령 그 자체였다.

천하를 위했던 그의 선의와 위대함은, 세상을 부수려고 그를 되살린 방여립에 의해 농락당했다.

석단궁은 새로운 재액을 막기 위해 구천강을 되살렸다.

하지만 방여립은 그러한 선의마저 악용했다.

희망을 절망으로!

그러한 흐름을 바꾼 영웅이 바로 연자강이었다.

이미 다친 몸으로 검성에 맞서 싸웠고, 마침내 승리했다.

복부가 길게 잘려 내장을 쏟아내면서도, 연자강은 자신의 검에 우주오검 중의 자청합일을 담아 검성의 몸 내부를 파괴했다.

“지금의 모습은 사부가 아니십니다. 방여립이 부여한 악몽, 그 악몽을 제자가 깨뜨립니다.”

마지막 순간 검성의 눈에 빛이 잠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연자강은 춤을 췄다.

검성의 심장을 부수고 뽑은 검으로, 연자강이 허공에 펼친 춤은 만천개화였다.

연자강이 자신만의 방법으로 완성시킨 우주오검의 일곱 번째!

온 우주에 가득 꽃이 피어, 피할 곳이 없고 피할 방법도 없도록 만드는 자신만의 수법.

나는 보았다.

연자강의 춤에, 마지막 빛을 떠올리던 검성이 얼핏 웃는 것을.

누군들 기쁘지 않았겠는가?

시대를 건너뛴 자신의 제자가 자신의 무공에 꽃을 피웠는데.

연자강은 영웅이었다.

그는 역사의 흐름을 바꿨다.

모든 사람들은 고금구천강을 뛰어넘어 자신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을 그에게서 보았다.

부활한 검성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후, 방여립은 자신이 되살린 세 명의 고금구천강을 이용해, 진 삼대재액 중의 마지막을 일으킨다.

진짜 혈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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