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그러면 되겠구나
사도명이 제갈청미를 보았다.
눈빛의 의미를 알아들은 제갈청미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후 제갈평을 붙잡았다.
제갈평은 고개를 저었다.
“갈 수 없다. 나는 기록하는 자다. 반드시 남아야 해. 남아서 모든 걸 지켜봐야 한다.”
은교교와 곽소혜, 화운악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도명이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자강을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연자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아직 자격이 되지 못한다, 라는 눈빛이구나.”
“넌 많이 다쳤고, 남아 있으면 위험하다. 스스로 알잖느냐?”
연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곽소혜를 보았고, 곽소혜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멀어졌다.
은교교가 사도명을 보았다.
“조심해요.”
“물론.”
은교교가 멀어지자, 화운악은 사도명을 향해 포권했다.
“보중하시오, 무제. 나 역시 언젠가는 이런 곳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더 강해지겠소.”
화운악이 멀어지는 뒤쪽으로, 탁천산은 더욱 많이 갈라졌다.
사도명 외에는 네 명의 천사와 제갈평, 제갈청미만 남았다.
불가능에 대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과 모든 걸 지켜봐야만 하는 사람이 남은 것이다.
쿠드드드드-!
마침내 산이 완전히 갈라지고,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지하 광장의 벽 속에 있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람.
그럼에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그의 몸에서 뻗어 나온 기세가, 거대한 산을 둘로 쪼개어 버린 것이다.
**
“이걸 믿으라고?”
황제가 도광효를 보았다.
그의 앞에는 수백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고, 각 종이마다 한 사람씩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도광효는 그중의 한 장을 들어 황제에게 내민 상태였다.
황제는 그 종이에 쓰여 있는 이름을 다시 보면서, 또 물었다.
“정말 사람이 방여립이라고?”
“셀 수도 없이 많은 가능성을 검토했습니다. 모든 불가능을 제거한 마지막 가능성입니다.”
“진(眞) 삼대재액 중의 마지막은 명존강림! 불의 신이 내려와 세상을 태우는 것이다.”
황제가 한숨을 쉬었다.
“짐은 염려한다. 이 사람이 방여립이라면 명존강림의 형태 역시 예상과는 다를 것이다.”
“그렇습니다.”
“혹시 그에 대해서도 이미 예측해 놓은 바가 있느냐?”
“준비하였습니다.”
도광효는 한 권의 책자를 꺼내 황제에게 건넸다.
“방여립만의 명존강림.”
사람마다 마음의 움직임이 다르기에, 같은 일이라도 추진하는 방향과 방법이 다르다.
“만류귀원은 명교 모든 신념의 근원입니다. 떠나야 할 것이 돌아오는 것. 그는 세상을 염려하고, 감싸려 했던 마음이 오히려 세상을 무너뜨리게 만들려 합니다.”
도광효는 자신이 정리한 내용을 짧게 설명하며 한숨을 쉬었다.
“방여립은 최악을 골랐습니다.”
“이, 이런 건 아니된다.”
“네. 그가 선택한 명존강림이 완성된다면, 세상을 무너집니다.”
황제는 식은땀을 흘렸다.
“안 된다. 선의가 악의가 되고, 지키려는 마음이 부수려는 마음이 되어선 아니 돼.”
“몰락과는 또 다른 형태의 파멸입니다! 무림은 마음에서부터 철저하게 무너집니다.”
도광효가 고개를 흔들었다.
“불신과 증오. 호의가 악의로 응대 받는 세상이 될 겁니다.”
**
“안 돼. 이런 일은 절대로 벌어져선 안 된다.”
갈라진 거대한 바위산.
탁천산을 무너뜨리면서 걸어 나오는 한 사람.
사도명은 그를 모르면서도,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의 사람이고, 강호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죽었지만, 지금은 되살아난 사람이었다.
낡디낡은 복식이 그가 건너온 세월의 거리를 증명하고 있었다.
“석단궁 교주는 닥쳐올 재액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소.”
제갈평이 자신을 붙잡는 제갈청미를 뿌리치고 걸어왔다.
“천사를 기른 것이 그 하나고, 사라진 힘을 복원시키려 한 것이 그 둘이오.”
모두 제갈평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눈은 한 곳을 향했다.
걸어오는 한 사람.
키가 보통사람보다 크고, 팔이 매우 길었다.
살아생전 신이라 불렸던 사람.
“석단궁은 생각했던 거요. 저 사람이 살아난다면 어떤 재액이라도 물리칠 거라고.”
흑화가 칠흑검을 들었다.
“전설은 미화되지. 전해오는 모든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어디, 시험해 보자-!”
칠흑검이 열두 개의 흑공을 동시에 쏟아냈다.
닿는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저주스런 내공의 공!
공은 예상할 수 없는 궤도로 옛 복식의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그 사람이 오른손을 들었다.
아무도 없는 그 손에, 돌연 진기의 검이 만들어졌다.
그 검이 단순한 직선을 그리면서 움직였다.
쩌어-어어엉!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공의 검은 경악스럽게도 열두 개의 흑공을 단숨에 없앴다.
그러고도 힘이 남아, 흑화의 가슴팍까지 일직선으로 날았다.
검은 느려 보였지만, 가공할 정도로 빨랐다.
움직인다 싶은 순간, 이미 흑화의 가슴 바로 앞에 있었다.
“흑화!”
“흥. 내 친구란 말이다.”
소화와 밀화 효경이 흑화를 돕기 위해 몸을 날렸다.
의외인 것은 친구라 외치며 달려온 무화의 행동이었다.
콰콰콰-콰콰콰쾅!
팔대천사 네 명의 힘이 하나로 합해지면서, 내공의 검을 막았다.
마음으로 만든 검의 움직임은 사도명에게 익숙했다.
자신의 검의 시작이자 끝!
사도명이 다가오는 사람의 이름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불렀다.
“검성 설운경.”
이미 죽은 사람.
하지만 되살아난 검성 설운경이 내쏜 심검은 천극멸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파아-아아앙!
검은 네 명의 협공을 받고서야 비로소 허공에서 흩어졌다.
제갈평이 한숨을 길게 쉬면서 말했다.
“나는 오랜 조사 끝에, 회천연합의 총수 석단궁이 천하에 닥칠 재액을 막기 위해 고금구천강을 되살리려 한다고 분석했소.”
낮은 목소리지만, 그 내용은 가히 폭탄이었다.
흑강이 소리쳤다.
“저 사람이, 아니 시체가 정말 검성 설운경이라고? 수백 년 전 죽은 사람을 되살렸다고?”
소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운이 좋지, 우리들은? 고금구천강. 현실이 된 전설에게 도전해 볼 수 있게 됐으니까.”
무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운이 좋네. 무림인이 되기 잘했다. 무림을 없애는 것, 역시나 좋은 선택이 아니었어.”
제갈평이 외쳤다.
“살아 금강불괴가 된 검성의 몸은 썩지 않소. 석단궁 교주는 전설과 전승, 역사를 모두 연구하여 검성의 유해가 어디에 남겨졌을지 알아냈던 모양이오.”
사도명은 그 장소가 어딘지 짐작할 것 같았다.
도화촌!
수맥이 흐르는 지하!
황제인 태명이 도화촌을 파헤치는 걸 회천연합이 방치한 데에는, 숨겨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사도명은 힘없이 말했다.
“필요한 희생? 어쩔 수 없는 방기? 대체 언제까지 똑같은 핑계만 댈 건가? 목적을 위해! 더 살리기 위해! 더 죽는 걸 방치해도 된다는 논리는 대체 뭐지?”
제갈평이 고개를 흔들었다.
“만류귀원으로 오래전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건, 그 자체로 사악이며 금기!”
그는 검성의 눈을 가리켰다.
“이미 죽은 몸에 백은 돌아왔지만, 사라진 혼은 결코 돌아올 수가 없는 법이외다.”
설운경의 눈에는 빛이 없었다.
움직이고 있었지만, 마음을 반영하지 않고 있었다.
마음이 없기 때문이었다.
제갈평이 소리쳤다.
“석단궁은 잘못 판단했다. 저건 검성이 아냐! 검성의 모습을 한 괴물일 뿐이다-!”
콰아-!
설운경의 오른손이 제갈평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에서 피어난 강기의 검이 제갈평의 미간을 똑바로 노리며 날아갔다.
무영섬이었다.
제갈평은 눈을 감았다.
그에게는 검성 설운경이 전개한 무영섬을 피할 능력이 없었다.
쩌-어엉!
설운경의 무영섬은 제갈평의 바로 앞에서 폭발했다.
똑같은 무영섬이 검성의 무영섬을 물리친 것이다.
사도명은 격돌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약한 것이 아니오.”
제갈평이 사도명의 등을 두 팔로 붙잡으면서 설명했다.
“압도적인 내공의 차이. 그 내공을 이용하겠다는 석단궁 교주의 의도는 옳았지만, 혼이 돌아오지 못한 강시로 깨어나게 될 것은 미처 몰랐던 거지.”
사도명은 쓰게 웃었다.
조금 전의 상황에서, 제갈평은 생명 자체가 위험했었다.
그럼에도 설명을 이어갔다.
모든 것을 알고 설명하기 원하는 제갈평의 타고난 호기심.
그것이 아니었다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몰랐던 게 아닐 거요.”
사도명은 은교교가 걸어주었던 성화령을 벗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들고 설운경을 향해 흔들었다.
“이걸 굳이 내게 건네고, 마지막 순간까지 부탁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생각합니다.”
축융지환이 태우고 있는 명교 교도들의 시신이 주변 어둠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성화령이 그 슬프고 아름다운 빛을 반사하면서 흔들렸다.
설운경의 눈빛은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제갈평의 눈이 커졌다.
“설마 성화령이?”
“시험해 볼 생각입니다.”
사도명은 설운경의 앞으로 다가갔다.
설운경이 양손을 들었다.
콰아아아-!
창천일원의 공력이 구름처럼 일어나 그의 몸을 감쌌다.
사도명의 몸에서 일어나는 기운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내 짐작이 틀렸다면, 이렇게 가까이 가는 건 위험하겠지? 하지만 사조! 나 역시 만만하게 당할 생각은 없습니다.”
설운경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그 상태로, 설운경은 천천히 사도명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잔뜩 긴장해 바라보던 제갈청미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 짐작이 맞아 다행이에요. 제발 모험하지 마세요, 무제!”
“그런가?”
사도명은 쓰게 웃었다.
“나는 여전히 내 짐작이 틀리길 기대하고 있는데.”
“네? 그게 무슨?”
“고금구천강을 되살려, 현재의 재액을 타파하려는 계획.”
사도명은 한 걸음 더 설운경의 앞으로 다가갔다.
“말하자면 또 다른 회천. 아까 제갈 가주는 그 계획을 파악했다고 말했었다.”
“당연해요. 제 아버지는 제갈 세가의 현 가주시잖아요.”
제갈청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사도명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한 걸음 더 설운경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방여립은?”
“!”
제갈청미는 사도명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가 깜짝 놀라서 제갈평을 보았다.
제갈평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방여립 또한 틀림없이 나처럼 상황을 짐작했을 것이다.”
“심마문에는 어기전혼이라는 수법이 있소.”
사도명은 다시 한 걸음을 앞으로 디디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제갈평을 보았다.
“먼 거리에서 혼을 보내 몸을 조종하는 수법! 혹시 제갈 가주도 그에 대해 들어보았소?”
제갈평의 얼굴이 완전히 핏기를 잃었다.
그는 놀라서 소리쳤다.
“그만 멈추십시오, 무제.”
사도명은 멈추지 않고 또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사도명의 얼굴이 설운경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상황을 알고 나서, 무림의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하는 방여립은 대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어기전혼을 알고 있을 텐데.”
사도명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설운경을 보며 물었다.
설운경이 꿇었던 무릎을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사도명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을 했지. 아하! 바로 이거구나.”
설운경의 눈에는 본래 한 올의 빛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찰랑찰랑 빛이 차올라 세차게 흔들렸다.
“세상을 구하겠노라 자신을 희생했던 고금구천강. 그들이 세상을 부수게 된다면, 천하인들에게 가장 큰 절망을 안겨주겠구나.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복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