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죽은 자와 산 자
제갈평의 얼굴은 핏기를 잃고 창백했다.
빨리 달려와서가 아니었다.
몹시 놀라운 것을 보고,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버지!”
제갈청미가 달려와서 제갈평을 부축했다.
“안으로, 산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무제, 어서 갑시다.”
제갈평이 제갈청미의 부축을 뿌리치고 사도명을 보았다.
사도명은 좌중을 둘러봤다.
세 명의 천사는 사라졌다.
장내에 남은 네 명의 천사는, 신 무림맹과 싸울 뜻이 없었다.
방여립은 분명히 사람들 사이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찾아낼 방도가 없는 이상, 시간을 들여 존재유무를 푼단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다쳤다.
명교도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옷에 새겨진 불꽃 문양이 붉은, 기주급의 교도가 분명했다.
“우리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아오, 조화무제. 숨겨진 진실을 알게된 이상, 더 싸우려 하는 교도는 이제 없소.”
죽은 사람, 쓰러진 사람을 제외한 살아남은 명교도들도 모두 검을 내던졌다.
사도명은 오늘 싸움의 승자는 석단궁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는 죽음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둘로 갈라졌던 명교가 빠르게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흰 수염이 탐스러운 노인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생존자는 걱정 마시게, 무제. 이 늙은이가 최선을 다해 치료할 것이네.”
[무림사제 중의 의제인 원일경 노선배세요.]
제갈청미가 여느 때처럼 전음으로 설명했다.
독제 당백룡과 함께 의술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는 사람이 원일경이었다.
그는 빠르게 바닥에 쓰러진 무림맹도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사도명은 그를 향해 포권했다.
“감사합니다.”
사도명은 제갈평이 가리키는 탁천산 아래의 동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화운악을 비롯한 신 무림맹 고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제갈평이 그 뒤를 막았다.
“가주님! 왜…?”
화운악이 미간을 찡그리자, 제갈평이 고개를 저었다.
“충격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알려져서는 좋지 않은 것이란 뜻입니까?”
“들어갈 사람을 세 명으로 제한합니다. 무제와, 현 맹주이신 화운악 대협. 그리고….”
제갈평은 한곳에 모여 있는 다섯 명의 천사를 보았다.
“어쨌거나 단일 집단으로는 가장 강한 천사들 중 한 명이 들어가면 되겠습니다.”
소화가 눈을 빛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서 무화를 보았고, 무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내가 대표자로 가도 반대하지 않겠단 의미야?”
무화는 숫제 눈을 감았다.
“지금의 교주와 전대 교주 사이의 선택. 일단은 판단력에서 너의 승리다. 싸움 실력이야 뭐, 꽤나 전부터 네가 더 강했고.”
**
사도명과 화운악, 그리고 소화는 제갈평을 따라갔다.
어두운 통로.
탁천산에 뚫린 수많은 동굴 중, 위에서 지하 광장으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아래로 나오는 통로도 하나뿐이었다.
모든 통로는 미로 그 자체였고, 바른 길은 오직 한 갈래였다.
하지만 제갈평의 기억력은 천하제일이었다.
그는 한 번 본 것을 결코 잊는 법이 없었다.
한 번 내려왔던 길이기에 추호의 오차도 없이 되짚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탁천산의 깊은 곳, 광장에 도착했다.
기묘한 한기가 감도는 곳.
한기는 영기와 뒤엉켜, 알 수 없는 위엄을 공간 자체에 부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석단궁 교주는 자꾸만 되돌아가려는 죽음과 끝없이 싸우며 살았나?”
사도명은 감회가 새로웠다.
광장은 넓었고, 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곳이 벽이었다.
그리고 그 벽들의 한 곳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너머에 한 사람이 보였다.
“본래 연자강 대장까지 함께 데려오려고 했소. 하지만 무제께서 계시기에….”
제갈평이 말했다.
“저분에 대한 것을 알릴 수 없소. 세상이 알아서도 아니 되오. 해서 세 분만 여기로 모시고 수밖에 없었소.”
사도명을 비롯한 화운악과 소화는, 벽 너머의 사람이 누군지를 알지 못했다.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알았다.
벽 너머에, 무림인이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
“대체 무슨 짓인가?”
마합지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에, 사방을 둥글게 감싸며 도열해 있던 혼돈마인과 아수라혈마인들이 술렁거렸다.
자신들을 조종하는 마합지의 감정에 반응하는 것이다.
“황제의 명을 어길 참이냐?”
마합지가 고함을 지르자, 은교교가 앞으로 나섰다.
“무슨 얘기죠? 명을 어긴다?”
“황상께선 명하셨다. 반역자들을 모두 해치우라 하셨다. 그런데 저건 대체 무슨 짓이냐?”
마합지는 원일경을 가리켰다.
의제 원일경은 부상자를 치유하고 있었다.
그 대상이 신 무림맹의 무사든 명교의 교도건 가리지 않았다.
“황명을 어긴 대역죄인들을 치료한다는 건, 너희가 대역죄인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 아닌가?”
은교교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무제와 맹주가 안으로 들어간 지금, 겨우 비밀 순찰에 불과한저, 은령선자 은교교가 무림맹의 지휘를 맡아도 될지 모르겠네요.”
서문용맹이 소리쳤다.
“선자께서 맡아주시지 않으면 누가 맡겠습니까?”
청수진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량수불. 피하려 하셔도 맡아 달라 외칠 참이오.”
“그렇다면….”
은교교가 곽소혜를 보았다.
“도와주시겠어요?”
은교교의 눈빛을 받자, 곽소혜가 곧장 몸을 날렸다.
“그렇게 말해주지 않으셨음, 직접 시작했을 거예요.”
곽소혜는 규화보전을 익혔다.
규화보전 안에 기재되어 있는 진사비침술은 진사술과 비침술로 다시 나눠진다.
곽소혜는 진사술의 공격술인 천도무형과 비침술의 괴뢰번명을 동시에 펼쳤다.
특이한 점은 괴뢰번명을 스스로의 몸에 펼쳤다는 것이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조종해, 인간 이상의 빠르기와 정확도를 시전해 내고 있었다.
마합지는 곽소혜의 몸이 땅을 떠났다 싶은 순간, 곧바로 자신의 앞에 나타나자 크게 놀랐다.
“헉!”
하지만 마합지의 반응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다.
곽소혜의 오른손이 얼굴에 닿기 전, 그는 이미 일백 개의 봉황의 날개를 사방으로 피워냈다.
꽃처럼 핀 봉황의 날개가 안으로 다시 모였다.
날개는 곽소혜의 공격을 한편으로 막고, 한편으로 공격했다.
공격과 조화가 완벽하게 어울린 일초, 금봉개화였다.
“그것으로 충분할까?”
마합지는 곽소혜의 오른손이 금봉개화를 흩어버리고, 대신 왼손이 밀려오는 것을 보았다.
방어와 공격을 맡은 두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돕는다? 진사비침술을 이 정도까지 익힌 사람의 얘기를,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바가 없다.”
마합지는 물러났다.
말 위에 앉아 있던 몸을 띄워, 십여 장이나 물러선 다음에야 바닥에 내려섰다.
곧바로 균형을 잡은 마합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을 공격했던 곽소혜의 몸이 어느새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해치려는 게… 아니었나?”
“파천봉황신공을 익혔지? 십이 성, 극성까지인가? 그런데도 곽소혜 낭자의 공격을 제대로 받아낼 만하던가?”
은교교가 걸어왔다.
“귀하는 스스로를 강하다고 여겼을 거야. 하지만 당신 정도를 당해낼 사람은 무림에 넘쳐.”
“그, 그것이 어쨌다고?”
마합지가 주춤 물러났다.
물러난 후에야, 자신이 물러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앞으로 돌아오며 고함을 질렀다.
“그런 건 황명을 어긴 변명이 되지 못한다.”
“중요한 건 황제가 바로 그러한 무림을 없애려고 했었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나 있어.”
은교교가 일장을 뻗었다.
마합지는 또다시 봉황천익을 피워냈지만, 강력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삼 장 뒤로 밀려났다.
콰-앙!
“자극하지 않는 게 좋아, 마합지 장군. 지금 모두가 가까스로 분노를 참고 있다고.”
“으으! 가, 감히….”
“우린 당신 같은 충신이 아냐. 황제를 도와주겠다고 여기 뭉친 사람들이, 그대로 반란군으로 돌변해도 난 놀라지 않을 거야.”
의제 원일경이 웃었다.
“하하하. 난 사람의 몸을 치유하는 의원이지만, 몸보다 치유하기 어려운 것은 마음이지.”
그는 무림맹 무사의 치료를 마친 후 옆쪽 명교 교도의 치료로 넘어가면서 껄껄 웃었다.
“내가 들은 일갈 중 가장 속시원하외다, 은령선자.”
마합지는 몸을 떨었다.
그가 명하면 혼돈마인과 아수라혈마인은 동시에 달려들 것이다.
‘하지만 이길 수 있을까? 이긴다 한들, 그 후엔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은 짧아야 했다.
은령선자가 뿜어내는 기세는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마합지는 부들부들 떨다가 이윽고 들었던 손을 다시 내렸다.
“미, 미안하오.”
“미안? 그래. 미안해야지.”
은교교가 소리쳤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도, 미안해야 정상이다. 그런 게 사람의 마음인 거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어둠에 잠긴 탁천산을 보았다.
이제 밤이 깊었다.
“세상 사람들이 미안해야 할 때 진심으로 미안해했다면, 처음부터 저 사람들이 고생할 일도 없었을 거잖아.”
그렇게 복잡한 감정들을 마무리해갈 때, 사도명을 비롯한 네 명이 동굴에서 나왔다.
모두의 안색이 창백했다.
은교교와 시선이 마주치자, 사도명이 소리쳤다.
“이곳을 벗어나야 해.”
은교교은 눈빛으로 그 이유를 물었다.
사도명이 대답하기 전, 화운악이 먼저 소리쳤다.
“신 무림맹의 맹도들은 전력을 다해 이곳을 벗어나라. 재집결지는 제삼구역으로 하고, 경로는 개별 결정한다. 움직이라.”
사도명과 화운악이 똑같이 말한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 무림맹 맹도들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갈청미가 다가와 제갈평의 손을 잡았다.
“산의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죠?”
“우리도 벗어나자. 여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분분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도명은 부상자들의 치유에 몰두하고 있는 의제를 보았다.
“노선배도 떠나십시오. 더 이상 머무시면 안 됩니다.”
“하, 하지만 부상자가 아직 많이 남았는데….”
“무사들이 도울 겁니다. 부상자를 같이 옮겨서, 재집결지에서 치료를 계속하시죠.”
모여 있던 신 무림맹 무사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소화는 여전히 남아 있는 천사들을 보았다.
밀화 효경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묻지는 않았다.
그들은 물러나고 있는 신 무림맹 무사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천사들은 강했다.
미약하기 그지없는 기운조차 감지할 능력이 있었다.
천사들에게는 탁천산의 위로, 하늘에 닿을 듯 올라가는 불길한 기세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대체 뭐야, 저건?”
“느껴지나? 그렇다면 우리는 남기로 한다.”
소화가 말했다.
“우린 세상을 위해 키워졌다. 다시 세상을 없애고자 깨어났으나, 이젠 시작으로 돌아간다.”
드드드드드드드-!
탁천산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신 무림맹의 무사도, 명교의 생존자도 모두 물러나고 없었다.
소화는 사도명을 보며, 명교도들의 시신을 가리켰다.
“우린 명존을 숭상하지.”
명존은 불의 신이다.
사도명은 소화가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축융의 반지가 불을 뿜었다.
화르르르르-륵!
명교도들의 시신이 불타기 시작했다.
“불을 숭상하는 명교도에겐 가장 존엄한 죽음의 형식이다. 소화는 죽은 이에 대한 경의를 부탁했고, 무제는 그 요청에 답했다.”
제갈평이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저쪽이구나.”
드드드드드드드-!
진동이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바위로 이뤄진 탁천산이 꼭대기부터 갈라지기 시작했다.
쩌저-쩌저저저적!
균열은 위에서 시작되어 쉼 없이 아래로 내려왔다.
크고 작은 바위가 사방으로 떨어지며 산사태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