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128화 (128/168)

128화. 완전한 휴식

“갑자기 왜 이런 기억이 떠오르는 거지? 내, 내가 누구라고?”

“이럴 수가. 나조차 몰랐던 나의 신분이, 나의 임무가 설마 이런 것이었다니!”

많은 이들이 몸을 떨면서, 오랫동안 금제되었던 자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성화산인!

스스로의 죽음으로 명교의 믿음을 실현하는 존재.

방여립은 천하 곳곳에 성화산인을 심어 놓았다.

심지어 어떤 성화산인은 자신의 기억을 금제당해, 스스로가 성화산인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무화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그는 신 무림맹 무사들 중 몇몇의 얼굴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석단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여-립!”

그는 목이 터져라, 한때는 자신의 제자였고 지금은 자신의 적이 된 이름을 불렀다.

“근방에 있음을 안다. 천명금제로 묶어 놓은 사람들의 기억은, 시전자가 가까운 거리에서만 심령으로 풀 수 있음을 나는 안다.”

대꾸는 들리지 않았다.

방여립은 분명히 근방에 있을 것이건만, 그가 누군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무화가 소리쳤다.

“교주도 교주를 모르오?”

앞의 교주는 석단궁이고 뒤의 교주는 방여립이다.

석단궁이 한숨을 쉬었다.

“방여립은 어릴 때 큰 사고를 당해 얼굴이 부서져 있었다. 나는 내 제자였던 그가 일부러 얼굴을 망가뜨렸다는 사실을, 그의 손에 전신 열두 개 급소가 공격당하는 순간에야 알았다.”

석단궁은 태조에게 명교를 없애야 명이 산다고 간언했다.

하지만 그를 죽인 사람은 태조가 아니었던 것이다.

방여립이었다.

“그가 얼굴을 다시 고친 후라면, 이제 대체 누가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단 말이냐?”

무화는 계속 몸을 떨었다.

팔대천사들도 깨어날 때 방여립의 목소리만 들었을 뿐, 얼굴은 보지 못했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누구도 교주의 얼굴을 모르는군.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인데도.”

그의 목젖 아래가, 기묘한 떨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 내 옆에서 멀어져. 나는 이제 곧 죽는다.”

무화보다 먼저 몸이 가슴 어름에서 빛을 뿜기 시작한 사람은, 무당파의 제자였다.

놀랍게도 무당 오자(五者) 중의 한 명인 보명의 몸속 굉천환이 폭발하기 직전에 달한 것이다.

“이제 기억난다. 나는 명교의 제자. 방여립 교주가 내게 요청했었고, 나는 받아들였다.”

청수진인이 다가오며 소리쳤다.

“왜 그러는 게냐, 보명?”

“아아, 장문인. 그때는 교주의 말이 옳다 여겼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죽기 싫습니다.”

보명의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세상은 이미 변했습니다. 전쟁은 사라졌고 평화로워졌습니다. 석단궁 교주의 깊으신 뜻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죽기 싫습니다.”

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니, 내 친인들을 죽이기 싫습니다. 모두들 물러나시오. 나는 곧 죽습니다. 장문인. 제발 제게서 멀러 떨어지십시오.”

청수진인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보명에게 다가가며 그의 양손을 잡았다.

“태극은 음양의 조화이며 강약의 융합이다. 노력해 보마. 혼자 죽게 두진 않겠다, 보명.”

태극검해의 기운이 청수진인의 양손에서 각각 일어나 보명의 몸속으로 빠르게 흘러 들어갔다.

태극검해는 보명의 가슴 어름에서 하나로 융합되면서, 굉천환의 폭발을 막기 시작했다.

청수진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가까스로 버티지만 오래 견디진 못한다. 굉천환? 단순한 폭약이 아니구나. 이건 누군가의 내공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 아마도 방여립인 모양입니다.

청수진인의 뒤에서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단단하지만 따뜻한 손 하나가 청수진인의 등에 닿더니 강물 같은 내공을 쏟아부었다.

사도명이었다.

“내공이 융합되어 제작되었기에,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석단궁 교주는 그 방법을 연구하여 널리 퍼뜨렸습니다.”

회천객의 탄생이었다.

사도명은 회천객으로부터, 굉천환 해제의 방법을 배웠었다.

“설명 들은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흉내 내는 것이지만, 제법 정확할 겁니다. 제가, 제대로 흉내 내는 법을 좀 압니다.”

청수진인은 사도명의 내공이 자신의 몸을 통과해 손을 통해 뻗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 힘이 보명의 몸속에서 굉천환을 해체하는 것도 감각을 통해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석단궁 교주가 회천이라 이름을 붙였던 이유! 폭발하는 굉천환을 되돌립니다.”

“컥!”

보명이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본래 폭발할 것이었던 굉천환이 보명의 가슴에서 떨어져 나왔다.

“아아.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구나, 보명.”

청수진인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의 사도명을 돌아보았다.

“고맙소, 무제.”

“방금의 방법을 기억하십시오. 회천입니다. 회천을 사용해, 죽어갈 운명의 성화산인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무화는 그 모든 광경을 보았다.

그의 목젖 아래에 박힌 굉천환도 이제 옅은 빛을 내고 있었다.

“이러기 위해, 죽었으면서도 줄곧 사셨던 겁니까?”

무화가 석단궁을 보며 물었다.

석단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도들이 죽게 둘 수 없었다. 타인을 해쳐, 명교의 뜻을 위배하고 죄를 짓게 둘 수 없었다.”

“당신을 오해했습니다. 사과는 죽음으로 대신합니다. 모두들 내 옆에서 떨어져! 싸우다 동료를 죽일 순 있어도, 내 죽음에 동반자 삼고 싶진 않다. 어서 물러나!”

“내 생각도 비슷하다.”

흑화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무화의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의 오른손이 기묘한 흔들림을 보였는데, 무화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단숨에 알아보았다.

“회천?”

사도명이 청수진인의 손을 통해 전개했었던, 굉천환의 해제법.

무화는 흑화의 손이 자신의 목에 닿자, 굉천환이 작은 폭발만을 일으킨 채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네, 네가 회천객이라고?”

무화의 눈이 커졌다.

그는 비로소, 흑화가 능화에게 공격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편으로 넘어온 이유를 알아차렸다.

“나, 나를 구하기 위해서? 내가 성화산인인 걸 알았나?”

흑화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석단궁을 곁눈으로 보았다.

“회천객은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성화산인을 구하는 것이 임무. 교주께서 조금 전, 신분을 감춰야 한다는 금약을 푸셨어.”

신 무림맹에서도 몇몇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들은 자신이 성화산인이었음을 깨닫고 몸을 떠는 사람들에게 손을 댔다.

회천의 대법이 성화산인의 굉천환을 풀었다.

방여립이 정한 운명!

성화산인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석단궁은 자신의 죽은 목숨을 되돌리면서, 죽어갈 성화산인의 운명도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되었다. 이제 되었다.”

석단궁은 몸을 떨며 울었다.

그는 천하 백성을 살리려 죽는 길을 택했고, 자신의 교도들을 살리려 죽음을 돌리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이제 뜻했던 바를 이루고, 다시 죽어가고 있었다.

“무화야. 너를 처음 볼 때가 기억나는구나. 너는 어른스러웠고, 신중했으며, 누구보다도 동료를 걱정하는 마음이 많았지.”

무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려 뺨을 닦았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누가 자신의 스승이었고, 자신을 아껴주었던 사람이었는지.

그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호칭은 나직이 불렀다.

“…사부!”

스승이면서 동시에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교주였던 사람.

석단궁의 몸이 발아래부터 풍화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만류귀원으로 생명을 되돌린 부작용이다. 괜찮아. 아프지 않다. 고통은 이미 모두 겪었으니, 지금은 오히려 편안하다.”

석단궁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 속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의 모습으로 있을 방여립을 향해서 석단궁은 말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다. 돌이켜서는 안 되는 것이 존재한다. 여립아. 나를 해치고 싶었느냐? 나는….”

석단궁은 잠시 쉬었다 말했다.

“나는 널 만나고 싶었다.”

그의 몸은 이제 곳곳이 거의 풍화되어 버린 상태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먼지로 변한 그의 몸이 날려가기 시작했다.

“아아!”

몸을 떠는 은교교의 손을, 사도명이 붙잡았다.

“완전한 휴식이오. 석단궁 노선배는 오히려 편할 것이오.”

가슴과 얼굴 부근만 남은 석단궁이 빙그레 웃었다.

“뒷일을 부탁하네, 무제! 은령선자. 내가 성화령을 전한 뜻을… 알고 계시지?”

석단궁은 완전히 스러졌다.

그는 탁천산을 나오면 오래 버티지 못할 운명이었다.

방여립은 알면서도 그를 나오게 하려고, 배화교도들을 보냈다.

석단궁은 방여립의 의도를 알면서도 굳이 밖으로 나와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다.

바람에 날리는 그의 잔재.

효경은 손을 저어 바람 속, 석단궁의 먼지를 쥐었다.

“이미 명교는 둘로 나뉘었어요. 전대의 교주와 지금의 교주! 누군가는 세상을 멸하려 들고, 누군가는 막으려 하고.”

먼지는 아무리 쥐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마치 석단궁의 삶처럼, 분명히 존재했건만 더 이상은 없었다.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무조건 사부의 편을 들게요. 그래야 하는 이유를, 황실에 숨어 지내면서 나는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무화가 효경을 향해 걸어왔다.

효경의 옆에 있던 소화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싸우자고 하면 언제든 싸워 주긴 하겠는데! 그래도 지금은 좀 때가 아닌 것 같아서.”

무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효경과 소화 사이에 서더니 몸을 돌렸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본래의 자리에 서 있던 능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같은?”

“선택해야 한다면 이제부터 나는 무조건 사부의 편이다. 사부가 누구인지, 너희도 알지?”

무화가 뜻을 바꾸었다.

능화는 이미 자신이 회천객 중의 한 명임을 밝힌 흑화를 보며, 냉소했다.

“흥! 이렇게 되면 오 대 이에서, 순식간에 삼 대 사로 변한 건가?”

흑화가 빙그레 웃었다.

“본래부터 사 대 삼이었지.”

“아까 좀 더 깊이 찔러둘 걸 그랬지?”

흑화는 얼굴이 떠올린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원한다면 지금 시도해도 좋아. 혈화의 칠흑검은 본래 그 어떤 검보다 깊이 들어가거든.”

웅량한 소리가 사방을 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 석단궁은 나의 사부기도 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하지.

내공이 약한 이는 귀를 막았다.

하늘과 땅 모두를 웅웅 울리도록 만드는 육합전성이었다.

들려오는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고, 누가 말하는지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내공이 뜻을 담고, 자신과 떨어진 곳에서 소리로 바꾸고 있다. 방여립의 재주는… 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군.”

사도명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소리가 다시 울렸다.

- 죽음을 애도하여 사흘을 쉬마. 황제에게 전하라. 사흘 후부터 천하 곳곳이 폭발할 것이다.

“그 말, 성화산인들을 자폭시키겠단 소리지, 방여립?”

사도명이 소리를 질렀다.

- 하하하. 막아보겠느냐, 조화무제? 하하하. 하하하하!

웃음소리는 약해지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사도명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방여립은 분명히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있었다.

하지만 누가 방여립인지 가려낼 방법은 없는 것이다.

“세상일 중에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지.”

사도명은 어딘가에 있을 방여립을 향해 말했다.

“성화산인이 있는 곳에 반드시 회천객이 있다. 석단궁 교주는 돌아가셨지만, 살아 있는 너를 반드시 막아낼 것이다.”

은교교가 옆에서 미소 지었다.

“그 말이 옳아요.”

그녀는 자신이 걸고 있던 성화령을 벗었다.

“총수께서 성화령을 내게 주신 진짜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요.”

은교교는 성화령을 사도명의 목에 걸어 주었다.

“이걸 내게 왜?”

“석단궁 교주는 방여립을 자신의 후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남기신 뒷일이란 성화산인을 구하는 임무. 이제 알겠어요. 그 임무를 맡을 사람에게 이걸 전하란 것이 교주의 의도였어요.”

사도명은 성화령을 목에 건 채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능화가 냉소했다.

“흥! 이러니 우리들의 교주께서 노하실 수밖에. 사흘이다. 사흘 후에, 여기 모인 모든 자들의 목을 가지러 돌아오마.”

능화가 사라졌다.

뒤이어 몽화와 비화의 모습도 꺼지듯 사라졌다.

어디로 사라지는지, 일반의 고수라면 흔적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신법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도명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데, 탁천산으로부터 한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제갈평이었다.

“크, 큰일이오. 정말로 큰일이 저 안에서 벌어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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