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가장 큰 적은
빛이 흑화를 감쌌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뿜어 나오던 흑화의 흑공이 그의 몸 안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사라졌다.
놀란 흑화가 몸을 허공에서 뒤집은 후 바닥으로 내려섰다.
“이, 이게 무슨…?”
그는 빛이 무엇인지 안다.
소화를 비롯한 천사들 모두가 빛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 무림맹의 사람들 중에서는 오직 제갈청미만이 빛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만류귀원!”
또 다른 고금구천강 중의 하나.
고금구천강은 고금을 통틀어 가장 강한 아홉 명을 말하지만, 또한 그들이 전하는 아홉 개의 무공을 의미하기도 한다.
만류귀원은 예언자 마니의 무공이었다.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을 지닌 그 빛은 모든 것을 되돌린다.
마니교, 지금의 명교를 창시했던 예언자 마니는 살가죽을 벗기는 형을 받고 죽었으나, 만류귀원으로 되살아났다고 했다.
고금구천강 중 마니의 이름이 잘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중원의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흑강을 비롯한 천사들의 시선이 모두 탁천산을 향했다.
사도명도 탁천산의 중간, 동굴 하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곳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살이 거의 없고, 뼈에 살가죽만 올린 듯한 모습이었다.
죽어 시체가 된 사람이 걸어 다닌다면 이와 같은 모습일 터였다.
은교교는 그를 알고 있었다.
“총수!”
소화를 비롯한 천사들 모두도 그를 알아보았다.
소화가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그의 본래 이름을 불렀다.
“석…단…궁… 님.”
명교의 전대 교주 석단궁.
“돌아가시지 않았군요?”
소화가 물었다.
석단궁은 팔대천사를 직접 선택했고, 또한 직접 키웠다.
천사들에게 석단궁은 태어나게 해 준 아버지였고, 자라게 해 준 사부였으며, 믿게 만든 교주였다.
그는 태조를 도와 나라를 건국했었다.
하지만 배신을 당했고, 결국엔 죽임마저 당했다고 알려졌다.
석단궁이 죽을 때 수많은 명교의 교도들도 함께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방여립을 중심으로 새로운 명교를 만들었다.
새로운 명교는 성화산인과 팔대 천사를 이용해, 세상에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것이 진 삼대재액의 시작이며 본질이었다.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요. 당신께서 회천연합의 총수라뇨? 어떻게 우리를 돕지 않습니까? 어떻게 우리를 방해를 합니까?”
석단궁이 고개를 흔들었다.
“너희를 돕고 있다. 내가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조금 전에 흑화는 죽거나 크게 다쳤을 것이다.”
“헛소리. 믿지 못합니다.”
“조화무제는 역천반야대능력을 끌어올린 상태였다. 밀소림의 불화가 남긴 그 힘은 너의 흑공에 상성이 좋아 매우 치명적이지.”
사도명은 한숨을 길게 쉬며 은교교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 사람은 마치 세상의 모든 걸 안다는 듯이 말하는군.]
“안다는 듯이가 아니라 실제로 나는 대부분을 알고 있네.”
총수 석단궁이 시선을 돌려 사도명을 보았다.
사도명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지금, 내 전음을 훔쳐 들었다는 겁니까?”
강호에는 상대의 전음입밀을 훔쳐 듣는 기술이 몇 가지 있다.
하지만 조금 전 사도명의 전음은 뜻을 직접 보내는 혜광심어였기에, 훔쳐 듣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석단궁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은 것이 아니라 느낀 걸세. 그 마음을 흐름을. 자네에게도 비슷한 재주가 있지 않는가?”
사도명도 역천대반야능력으로 상대의 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의지가 강한 상대가 마음의 빗장을 내렸을 때는 소용이 없는 재주였다.
사도명이 물었다.
“그것 또한 만류귀원이라는 무공의 응용입니까?”
“그러하네. 자네는 만류귀원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는가?”
“이름만 듣고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귀하가 이미 죽었건만, 여전히 살아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만류귀원 덕분입니까?”
천사들의 표정이 변했다.
석단궁은 쓰게 웃었다.
“맞네. 하지만 순리를 거슬러 되돌린 것은 언제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죽음으로부터 돌린 삶은, 호시탐탐 되돌아갈 기회를 노린다.
사도명은 은교교로부터 회천연합 총수의 상태에 대해서 들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그것이 탁천산에서 나오지 못하는 이유라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왜 나오신 겁니까?”
“살아 있는 존재도 죽을 때가 있네. 하물며 이미 죽은 존재야, 당연히 죽어야 할 때가 있지.”
사도명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석단궁을 잘 알지 못했고, 더 이상 물어볼 것이 없었다.
자신과는 달리 천사들은 물어볼 것이 많을 거라 생각했기에, 사도명은 옆에 있는 효경을 보았다.
효경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오히려 소화만 보았다.
소화가 잔뜩 미간을 찡그리며 석단궁을 향해 물었다.
“방여립 교주께서 저희를 깨웠습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오직 한 마디만을 하였습니다. 당신께서 돌아가셨다고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믿었기에, 우린 한 가지만 생각하면서 그 후를 살았습니다. 복수!”
석단궁은 천사들을 한 명 한 명 보았다.
“모두 기억하고 있다. 처음 만난 날. 너희를 선발한 날. 세상을 위해 희생해달라고, 염치없는 부탁을 했던 날도.”
“그걸 모두 기억하시면서, 거기에 있습니까? 당신을 위해 복수해 오던 우리와 싸우겠다고, 회천연합을 만들었습니까?”
고함보다 더 격앙된 감정이 차분한 말 속에 녹아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가 해도 될까?”
효경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소화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배신자는 입 다물어!”
“내가 배신자가 된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는 거다.”
소화가 인상을 쓰며 노려보았지만, 효경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난 줄곧 황제와 있었지. 너희와 달리 세상의 비밀을 접했어.”
“세상의 비밀?”
“몰랐으면 좋았을 일! 알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
효경이 천사들을 한 명 한 명 둘러보았다.
석단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말았다.
효경은 마지막으로 소화를 똑바로 보면서 물었다.
“태조가 왜 명교도들을 모두 없애야하겠다 결심했을까?”
소화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집히는 바가 있어 얼굴이 핏기를 잃고 일그러졌다.
“…서, 설마?”
“대업을 이룬 개국조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지. 그런 개국조가 명교도들을 모두 해친 배후엔, 한 사람의 설득이 있었어.”
효경이 석단궁을 보았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또렷한 어조로 물었다.
“왜 그래야 했죠? 명교의 교주셨으면서, 왜 태조에게 명교를 멸하지 않으면 나라가 다시 망할 거라고 조언을 하셨나요?”
**
제갈평은 탁천산 지하의 깊은 곳에 있었다.
본래 회천연합의 총단이었고, 석단궁이 머무르는 장소였다.
석단궁이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태음의 기운이 지맥을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굴 내부는, 만류귀원을 이용해 억지로 붙잡아 놓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랬던 석단궁이 지하의 태음굴을 벗어났다.
“죽음에 대한 각오인가?”
제갈평이 낮게 한숨을 내쉴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대는 어이해 이곳에 있는 겐가, 제갈평?
제갈평은 놀라지 않았다.
그의 무공은 높지 않았으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약한 것 또한 결코 아니었다.
“그건 당신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 것이잖소?”
- 내가 잘 안다? 왜?
“당신이 나를 이곳까지 끌어들였으니까.”
- 내가 끌어들였다고?
“산 위에 서 있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렸소. 소리를 따라 들어서자, 빛이 계속 나를 인도했소. 따라왔더니 결국 이 장소더군.”
제갈평은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남은 사람이 한 명뿐인데,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날 끌어들였겠소?”
- 나는 머리가 좋은 사람을 좋아하네. 말이 잘 통하거든.
“당신이 날 끌어들인 이유는 뭔가 보여줄 것이 있어서겠지. 내가 모르겠는 건, 그 보여줄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오.”
뒤의 목소리가 웃었다.
- 내가 누군지는 궁금하지 않다는 겐가, 제갈 가주?
“당신은 회천연합 총수가 숨은 장소를 알고 있고, 그곳에 날 끌어들일 수 있으며, 바깥에서 벌어지는 석단궁 전대 교주와 천사 사이의 일에 대해 무심하오.”
석단궁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한 명뿐일 거요.”
- 하하하. 계속해 보게.
“방여립 교주.”
제갈평은 단호한 확신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금 천하를 암중에 모두 움직이고 있는 방여립이 귀하라고 판단하는데, 틀렸소?”
- 하하. 틀리지 않네. 자네는 내가 방여립임을 알면서도 왜 돌아서서 얼굴을 확인하지 않나?
“나는 기록자니까.”
- 기록자?
“하늘은 좋은 머리를 내게 준 대신, 절대고수는 될 수 없는 몸도 함께 주었지.”
제갈평은 눈앞의 벽을 살폈다.
“그래서 나는 천하에 벌어지는 일을 기록하지만, 그 속에 들어가 싸울 힘은 갖고 있지 않소. 귀하가 날 죽이지 않고 그저 데려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 아니겠소?”
- 하하하. 하하하하.
목소리가 다시 껄껄 웃었다.
- 가주의 조상인 제갈량과 나의 조상인 방통께서는 한 때 지략으로 우열을 다투었지. 지금 가주를 보니, 그때 나의 조상이 일찍 돌아가신 점이 아쉽네. 좋은 승부가 되었을 터인데. 하하하.
“그러나 지금은….”
제갈평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한번 말했다.
“지금 귀하는 강하고, 나는 약하오. 귀하의 얼굴을 보면, 날 해칠 것이 분명하여 감히 고개를 돌리지 못할 정도로 두렵소.”
- 정확한 판단이군. 나는 확실히 자네에게 내 얼굴을 보여줄 생각은 전혀 없었네.
제갈평은 온몸을 짓누르던 압력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비로소 뒤를 보았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온통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닦아 내리면서, 제갈평은 손을 덜덜 떨었다.
“시, 시험한 것이다. 내가 고개를 돌려 얼굴 볼 정도의 담량이 있다 생각했으면, 그는 반드시 날 죽여 후환을 없앴을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손과 발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통제하는 곳에는 머리가 있어야 한다.
제갈평은 무림의 머리였다.
“내가 후환이 되리라 판단되면 날 없애리라 결심한 채로, 그는 무엇인가 세상에 알려야 할 것이 있어 나를 불렀을 것이다.”
제갈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살폈던 바로 앞의 벽에 다시 시선을 멈췄다.
동굴이 끝나면서 막혀 있는 벽이었다.
한 부분이 확실히 이상했다.
물에 흐름이 존재하듯, 돌과 흙에도 결이 있다.
자연스럽게 흐르던 결이 그 부분에서 끊기고 있었다.
“누군가 파내고 다시 메웠다. 언뜻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보이려 했던 탓에 오히려 결이 흩어졌다.”
제갈평은 손바닥을 벽에 대고 살짝 누르고, 옆으로 밀고, 두드리고 흔들어 보았다.
“안은 비어 있다. 단순히 막아놓은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게 만들었다면….”
제갈평의 눈이 빛났다.
“들어가는 기관을 찾아낼 수 있다. 나는 제갈평이며, 무림천하록의 집필자다.”
천하의 모든 기관진식이 그의 머릿속에 존재했다.
제갈평은 빠르게 주변을 조사하며, 벽을 열 수 있는 기관을 찾기 시작했다.
**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천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도명조차 입을 다물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오직 한 곳을 향했다.
거기 석단궁이 있었다.
명교의 전대 교주.
그는 태조를 도와 나라를 세웠고, 그 나라의 이름에 명교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태조에게 명교를 없애라 간언했다.
소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길게 흘렀다.
눈물은 투명하지 않았다.
핏물이 섞인 눈물은 막 물들기 시작하는 서쪽 하늘처럼 붉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적은 무엇이라 가르쳤느냐, 소화?”
석단궁이 소화를 보며 물었다.
소화는 즉시 대답했다.
“자신이라고! 사람에게 가장 큰 적은 누구나 결국 자기 자신이라고 가르치셨죠.”
“그럼 다시 물으마. 명교의 경우는 어떠할까? 명교의 가장 큰 적은 대체 무엇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