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다르지 않다면 친구와
회천연합은 배화교의 공격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곳곳에 심어진 회천객으로부터 연이은 경고가 전달되었다.
그럼에도 총수는 회천객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 그들에게는 각자의 임무가 있고, 그 임무는 중요하다.
총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을 지키는 일에 회천객을 불러들이는 것을 반대했다.
- 나는 너무 오래 살았지. 심지어 죽고나서도 살았어. 그러니 이제는 죽고 싶다네.
산다는 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총수는 지쳤고, 쉬고 싶어 했다.
회천연합의 총수를 지키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은 연합이 아니라 신 무림맹 소속이었다.
두 시진이 지난 후, 지평선을 따라 모래 먼지가 피어올랐다.
더러 휴식을 취하고, 혹은 음식을 먹던 무림인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결전의 시간.
머지않아 많은 이들이 죽고, 살아남는 자는 적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피하지 않았다.
무림이란 대지에 몸을 담은 이상, 생사를 가르는 싸움의 운명은 피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냉겸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앞을 보았다.
배화교 공격대의 전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한 사람.
냉겸은 그를 알고 있었다.
“그대가 아니길 바랐는데! 그대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 냉겸에게는 더 없이 아팠다.
“좌도독!”
좌도독 혁담!
그는 냉겸과 함께 나라의 병권을 나눠서 책임지고 있었다.
좌도독이면서, 동시에 적마교의 교주인 혁담!
병가의 무장이며 친구!
함께 참여했던 외적과의 전쟁이 대체 몇 번이었던가?
“짐작하셨던 건가요?”
은교교의 물음에 냉겸은 고개를 끄덕였소.
“왜 그런 것일까? 진정으로 아니길 바라는 일들은, 언제나 결국 일어나고 마는구려.”
냉겸은 다가오는 배화교 전대를 맞이하듯 걸어가면서 말했다.
“부탁이 있소.”
“말씀하세요.”
“혁담과는 내가 싸우겠소. 누구도 간섭치 말아 주시오.”
둘은 같은 황실의 신하였다.
살아온 과정이 베낀 듯이 같았으나, 그 끝은 달라졌다.
한 사람은 가슴에 회천의 뜻을 담았고 다른 사람의 배화교의 복수로 마음을 물들였다.
한때의 동지는, 마침내 서로가 적으로 마주 보게 되었다.
냉겸과 같은 마음이었을까?
배화교 전대에서도 혁담이 가장 앞으로 달려 나왔다.
은교교는 고개를 끄덕일 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부탁드려요.”
냉겸의 걸음이 빨라졌다.
“왜 변했나, 혁담?”
달려가면서, 냉겸은 등의 거도를 뽑아 들었다.
“변했다고? 내가?”
혁담도 폭이 넓은 검을 꺼내면서 속도를 높였다.
“가슴에 품은 명교의 의지는 한순간도 변했던 적이 없네. 회천연합 총수가 누군지를 이제 알았는데, 어찌 살려둘 수가 있겠나?”
꽈-앙!
거대한 도와 폭넓은 검이 굉음을 터뜨리며 충돌했다.
그것이 신호였다.
혁담이 이끌고 온 적마교의 교도들과 배화교의 교도들이 일제히 신무림맹 고수들을 덮쳤다.
십구성좌의 고수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무림은 그동안 너무 큰 희생을 오랫동안 치렀다.
비극이 낳은 분노가 하나로 뭉쳐서 배화교의 무리를 향해 폭발하고 있었다.
연자강은 나서지 않았다.
그는 제자리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나의 싸움은 이곳이 아니다. 한 시진이 더 걸린다고? 율천, 그 자식의 목을 내가 벤다.”
곽소혜가 약속대로 연자강의 옆을 지켰다.
덤벼들었던 적마교의 몇 명 고수가 비침에 찔려 주저앉았다.
“너희는 이제부터 나다. 내 남편을 지켜야 해.”
규화보전 진사비침술 상의 목우종형이 펼쳐졌다.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배화교 복수심의 노예건, 내 비침의 노예건 조종당하는 건 같으니.”
주저앉던 적마교의 교수들이 빠르게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새롭게 연자강을 공격하러 달려오는 자신의 동료들을 막아섰다.
콰콰-콰콰쾅!
뒤엉켜 싸우는 자들이 시전하는 무공은, 곽소혜의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혼전의 와중이었다.
가부좌를 하고 앉은 연자강의 모습은 모두의 눈에 띄었다.
가슴에 불꽃의 그림을 새겨 넣은 무사 몇 명이 달려왔다.
그들은 배화교의 교도였다.
숨어서 힘을 길렀던 전사였고, 팔대천사보다 많이 약했지만, 적마교도보다는 훨씬 월등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배화교도 네 명이 동시에 연자강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침술로 조종받는 적마교도쯤은 단숨에 물리칠 것 같았다.
“크윽!”
“크악!”
“뭐, 뭐지?”
“저 계집은 누구냐?”
네 명은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욱 빠르게 물러났다.
한 사람이 어느새 연자강을 지켜준 것이다.
“은령선자!”
곽소혜는 갑자기 나타나 네 명의 배화교도를 물리친 은교교를 보며 소리쳤다.
화빙강의 세 갈래 강기가 은교교 주변에서 표표히 움직였다.
“고함지르고 싶은가? 배신당했으니 복수하고 싶다고! 하지만 우리는 어때? 너희의 배신에 이용당한 우리는 어떤 마음일 것 같아?”
은교교는 적암마계의 힘을 이은 적암의 마녀였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지닌 힘에는 적암마계의 후예들이 당했던 세월의 고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회천연합 총수가 그 사람이라고? 그래서 복수하겠다고? 그럼 우린 누구에게 복수하지? 이 피보라가 망할 명교와 빌어먹을 명교, 그 둘 사이의 싸움이라면 우린 그저 닥치는 대로 죽이면 될까?”
네 명은 질린 표정으로 다시 달려들지는 않았다.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배화교도들은 교주의 명령을 받고 이곳으로 왔다.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는 알았지만, 누가 기다리는지는 몰랐다.
회천객이 아니라 신무림맹의 고수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건 너희가 끼어들 싸움이 아니다, 신 무림맹!”
네 명의 배화교도 중, 가장 덩치가 큰 자가 소리쳤다.
“아니었지, 본래는. 하지만 너희가 끼어들게 만들었잖아?”
은교교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아버지는 너희가 세상에 던진 음모와, 그 음모가 만든 전쟁 속에서 죽었어.”
설청산.
무림맹의 제오대 맹주.
아수라혈황이 되어야 할 운명을 스스로의 의지로 극복한 영웅.
은교교의 어머니 은요진은 여와방의 명령을 받고 그러한 설청산에게 접근했었다.
하지만 달빛이 교교한 밤에, 그녀 또한 자신이 빠진 사랑으로 모든 운명을 거부했다.
그렇게 은교교는 태어났다.
사도명을 처음 만났던 날, 그녀의 마음을 무엇보다 흔든 것은 그가 했던 자신의 소개였다.
- 내 이름은 도명! 운명을 이끈다는 뜻이오.
은교교는 자신의 운명, 세상의 운명을 스스로 이끌고 싶었다.
청상검을 높이 들며, 그녀는 배화교도들을 향해 외쳤다.
“회천연합의 총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냐! 내 의지다!”
퍼지는 강렬한 의지에 네 명의 배화교도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날렸다.
은교교는 진짜 싸움이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음을 안다.
먼 곳의 지평선.
그 너머에서 다가오고 있는, 정말로 거대한 일곱 갈래의 기운을 은교교는그녀는 느꼈다.
연자강도 마찬가지였다.
그 기운을 느끼기에, 혼전의 와중에도 운기조식하며 힘을 비축하는 것이다.
“헛소리! 우리의 원한은….”
물러나던 네 명의 배화교도 중 덩치가 큰 사람이 소리 질렀다.
그는 물러나던 걸음을 멈추었다가, 갑자기 앞으로 움직였다.
다른 세 명도 일제히 은교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래! 우리의 원한은!”
“황실과 무림을 모두 없앤다 해도….”
“그런다 해도 결코 풀리지 않을 정도란 말이다!”
은교교는 이제 더 이상 경고하지 않았다.
쐐-액!
빠른 흐름이 그들 네 명의 목을 동시에 휘감았다.
그리고 나타날 때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졌다.
은교교는 빙화강의 세 가지 공력을 하나로 뭉친 지 오래였다.
사도명의 도움이었다.
융합된 힘이 청상검을 타고 흘러, 허공을 벤 것이다.
그 허공 속에 네 개의 목이 떠올랐다.
피는 튀지 않았다.
매끈한 상처.
마치 그들이 스스로 원하여 목을 내어준 듯, 자연스런 움직임.
남겨진 그들의 몸뚱이는 강기로 인해 산산조각 부서졌다.
“그렇구나. 운명이란 생명체와 같아서, 한 번 시작되면 설령 그 잘못이 사라진다고 해도….”
은교교는 수많은 사람들이 얽혀 싸우는 혼전을 바라보았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멈출 수가 없는 거구나. 이 싸움처럼 말이다.”
딸랑 딸랑 딸랑.
은교교는 몸을 날렸다.
흔들리는 방울 소리 속에서 적암의 마녀가 춤을 췄다.
더러 불타고, 더러 얼어붙고, 더러 부서지는 적들 속에서 은교교는 소리를 질렀다.
“빨리 끝내야 해요. 곧 후대가 옵니다. 거기엔 천사들이 있어요. 빨리 끝내지 않으면 그들을 대비할 시간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내공을 실은 목소리는 혼전의 와중임에도 또렷하게 울렸다.
한 시진은 길지 않았다.
팔대천사가 도착하면, 싸움의 양상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
대혼전.
하지만 모두가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자강은 가부좌를 한 채 운기조식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탁천산의 중간 어름에도 마찬가지로 싸우지 않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 역시 혼전을 벗어나 먼 지평선만 보고 있었다.
“점점 다가온다.”
제갈세가의 가주인 제갈평!
그의 뒤에서 제갈청미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팔대천사! 한 명만으로도 조화무제를 위험할 지경까지 몰아넣었다 들었어요.”
“사실이다. 천사들은 마문을 막고자 키워졌고, 매우 강하다.”
제갈평이 다시 한번 멀리의 지평선을 보았다.
“소름이 끼치는구나. 일곱 기운! 한 갈래는 지금 어디에 있기에 일곱이지?”
“위험해지겠죠?”
“죽음까지 각오해야지.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진 삼대재액 중의 두 번째를 저 정도만으로 막아낸다면, 이 아비가 왜 천하를 걱정해 움직이겠느냐?”
“내려가야겠어요.”
“뭐?”
“나 혼자 편하긴 싫어서.”
제갈평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라. 하늘이 우리 제갈세가에게 싸움을 시키고자 했다면, 좋은 두뇌가 아니라 강력한 신체를 주었을 것 아니겠느냐?”
“아버지!”
“기다려라. 황제는 이미 전체의 상황을 계산하고 있다. 그의 안배들 또한 곧 나타날게다.”
제갈청미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물었다.
“세상의 일에 대해, 아버지는 대체 어디까지 아시죠?”
“어쩌면 전부!”
제갈평이 태연하게 대답한 후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어쩌면 하나도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슨 뜻이세요?”
“드러난 것과 숨은 것이 다르다. 얄궂게도 일을 꾸미는 자와 과실을 따는 자도 또한 다르니,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별다르게 다르다 싶지 않구나.”
제갈청미는 아래의 혼전을 계속 응시했다.
은교교의 싸움은 빨랐다.
또한 강하기 그지없어 한 명의 적을 상대하는 일에 삼 초 이상을 허비하지 않았다.
하지만 싸워야 하는 상대의 숫자가 너무 많았고, 심지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다른 게 다르지 않다면, 싸우는 것과 싸우지 않는 것 또한 별다르지 않겠네요?”
“너 혹시… 안 된다!”
제갈평의 고함은 때가 이미 늦고 말았다.
제갈청미는 아래를 향해 몸을 날렸고, 제갈평은 그런 딸을 막을 수가 없었다.
[머리가 좋으신 건 아버지잖아요? 서로 다른 것이 다르지 않다면, 전 그냥 둘 중에서 친구와 함께 싸우는 쪽을 택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