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119화 (119/168)

119화. 미래를 위한 희생

고수의 싸움은 손과 발을 통해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효경은 한동안 말없이 사도명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흉내를 내는 재주’라는 단어는, 자체로는 무척 단순했다.

하지만 그 속에 깃든 의미까지 간단할 수는 없었다.

밀화천사 효경은 혈화천사 율천이 어떤 과정을 거쳐 칠흑의 검과 격공도약을 체득했는지 기억한다.

천사가 되기 위한 세 가지 단계 중의 두 번째!

관문을 깨고 살아남는 숫자보다, 한계를 넘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주어진 명분은 오직 하나!

강해져서, 장차 죽어간 동료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명분만이 참혹함을 견디게 하는 힘이었다.

“거짓말!”

짧다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시간이 흐른 후에 효경은 짧은 단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이에, 효경과 사도명은 수많은 초식을 주고받았다.

손과 발이 아니라 마음의 얽힘이었고, 기세의 싸움이었다.

뿜어내는 기세와 감춰진 기품을 가늠해가면서, 상상과 그에 이어지는 확신으로 서로의 승패를 미리 짐작해 보았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무수히 이겼고, 셀 수도 없이 졌다.

효경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이건 거짓말이다. 너의 능력은 율천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은령선자가 가진 성화령이 아니었다면, 너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란 사실도!”

효경의 말투는 달라져 있었다.

궁녀의 신분일 때와 밀화천사일 때의 말투가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팔대천사의 나이는 겉보기에 비해 매우 많았다.

그들은 배화교의 전대 교주 때부터 길러졌기 때문이다.

사도명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해 듣는 게 모두 진실일 수는 없지. 더구나 사람이란, 어제와 오늘이 당연히 다른 법이라.”

두 사람은 모두 자신들이 싸우면 승패를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보다 무서운 쪽은 효경이 아니라 사도명이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강한 사람만큼 두려운 존재는 없다.

내일은 더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이미, 성화산인으로는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윤시호가 한숨을 길게 쉬며 말했다.

“굉천환을 잃었고, 죽음으로 이룰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성화산인의 임무는 처절하다.

타인과 같이 죽을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임무였다.

그는 소매 폭이 넓은 자신의 장삼을 열었다.

속에 든 내용물을 보이면서, 윤시호가 힘없이 말했다.

“하지만 이 독들은 다릅니다. 천사님의 임무를 이뤄드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옷 속에 병이 여러 개 보였다.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엇이 거기 들었는지는 확실했다.

사도명이 마셨지만, 내공으로 배출시킨 녹혈산!

혹은 그와 유사한 여러 개의 맹독들이 나누어 들었을 것이다.

효경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알고 보니 문제가 생겼을 때 황제암살의 임무를 맡은 건, 나만이 아니었군.”

“독을 모두 터뜨리면, 조화무제라 해도 무사하진 못할 겁니다. 황제는 당연히 죽습니다.”

윤시호가 효경을 보며 웃었다.

“명교의 뜻은 흔들림이 없이 이뤄져야 합니… 아!”

윤시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이마에 구멍이 작게 뚫렸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굉천환을 제거할 때도 끊기지 않았던 그의 호흡이, 윤시호가 날린 지풍에 의해 끊어졌다.

쓰러지는 윤시호를 보며 효경이 고개를 흔들었다.

“산인의 임무와 천사의 임무는 달라요. 한쪽은 죽는 것. 다른 쪽은 죽이는 것.”

효경은 윤시호의 미간을 꿰뚫은 지풍을 날린 검지를 그대로 치켜든 채, 사도명을 보았다.

“독이 퍼지면 황제와 무제가 죽겠지만 나 역시 위험할지도 모르죠. 그럼 내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게 되잖겠어요?”

사도명이 물었다.

“너의 임무란 저 나으리를 해치는 것! 그러자면 날 이겨야 하겠지? 아직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믿나, 밀화천사?”

효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며칠 전 나는 율천에게 패했다. 그리고 조금 전 상상의 싸움에서는 너와 분명히 동수를 이뤘지. 그런 후에 아주 약간이라 해도 시간이 흘렀다.”

사도명의 온몸에서 강력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이 여자는 자신은 살고 나으리만 죽이겠다는구려! 걱정 마시고 죽으시오. 나으리의 뜻대로, 당신이 죽는다 해도, 나는 배화교를 산산조각내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드리겠소.”

도광효가 황급히 몸을 날려 황제의 앞을 막았다.

“제가 지키겠습니다, 황상.”

효경이 빙그레 웃었다.

“황제의 뜻은 본래 그게 아니었잖아, 무제? 귀하가 황제를 죽인 후에, 귀하가 명분까지 가져가는 것이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지켜보던 은교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성화산인이 죽기 위해 살고, 당신들이 죽이기 위해 산다면, 사도명은 살리기 위해 살고 있어요. 황제를 해칠 리 없잖아요?”

“만약 내게 방법이 있다면?”

효경이 달콤하게 웃었다.

“만약 조화무제가 자신의 의지로 황제를 죽이게 할 방법이 나에게 있다면 어찌하겠느냐?”

사도명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있었다.

서로 마주 보면서 밀화천사 효경과 자신의 능력을 가늠하던 짧은 사이에, 이미 확신이 섰다.

율천에게는 졌다.

하지만 효경과는 싸워서 이길 가능성이 생겼다.

사도명이 가진 가장 무서운 능력은 바로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이었다.

그러나 효경은 자신의 말처럼 죽이는 사람이지, 싸워서 이기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안 돼!”

사도명의 몸이 그의 옆에 나타난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은교교의 바로 앞, 만들어진 구멍으로 나타났다.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공간을 건너 뛴 효경이 사도명의 바로 앞에 나타나 오른손을 찔렀다.

은교교는 강하다.

그녀는 적암마계의 세 가지 힘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팔대천사는 팔대마문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일종의 병기였다.

효경이 앞으로 내민 손에 실린 힘은, 아무리 적암의 마녀가 된 은교교라 해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사도명이 양손으로 효경의 오른손을 막았다.

“호호! 율천의 격공도약은 변화무쌍하지만 나의 붕멸(崩滅)은 더 없이 단순하다. 오직 강력함. 막아 서는 모든 것을 부순다.”

쩌-어엉!

공간 자체를 깨뜨려버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사도명의 몸이 뒤로 날려갔다.

모든 힘을 끌어올리고 금강으로 응축시킨 상태에서도, 사도명은 효경의 일장을 막지 못한 것이다.

“도명!”

은교교 역시 사도명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힘을 끌어올려 그의 등을 안았다.

본래 이삼십여 장 이상을 날아가야 했던 사도명의 몸이, 은교교의 힘 덕분에 가까스로 벽에 부딪치기 전에 멈췄다.

은교교의 목에 걸린 성화령이 강한 충격에 나풀거렸다.

효경이 웃었다.

“이제 회천연합 총수의 정체가 뭔지 알았다. 배신자가 준 성화령임을 알았으니, 명교의 누구도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장의 부딪침에서 드러난 우열은 선명했다.

하지만 사도명은 태연했다.

일장에 날려갔건만, 그의 몸에서 피어나고 있는 기세는 조금도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무승부!”

사도명의 몸이 그 자리에서 허깨비처럼 꺼졌다.

구멍이 나타난다거나 하는 미세한 징조조차 없이, 사도명의 몸은 사라짐과 동시에 효경의 주변 네 곳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그렇게 판단을 하고!”

“시간이 지났다고!”

“내가 이미 조금 전에!”

네 곳에서 나타난 네 명의 사도명이 동시에 무영섬의 검공을 심검으로 쏟아내면서 외쳤다.

“이미 말했을 텐데!”

효경은 피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양손을 합장했고, 그러자 그녀의 몸을 감싸고 강기의 구(球)가 환하게 피어올랐다.

콰콰콰-쾅!

네 명의 사도명은 분심의 술에 의해 마음이 나눠진 실체이면서 동시에 허상이었다.

사도명의 일의생멸은 이미 실과 허를 구분할 수 없는 경지까지 치달은 상태였다.

은교교의 귀에 전음이 울렸다.

[싸우는 틈에 달아나.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알리러 달아나! 그래서 모두에게 전해.]

혜광심어로 머릿속에 바로 전해지는 사도명의 전음에는 당황하거나 조급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신무림맹의 모든 이들이 향할 곳은, 당신만이 알고 있는 거기다! 회천연합을 노리는 배화교의 뒤를, 다시 우리들 신무림맹이 친다. 재반격이야.]

콰콰콰-콰콰쾅!

휘몰아치는 강기의 폭풍!

사도명과 효경의, 인간이 것이 아닌 듯한 싸움을 보며 은교교는 황실 밖으로 몸을 날렸다.

황제는 신음했다.

“이미 한계를 벗어났군.”

도광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는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강합니다. 하지만 조화무제 또한 예상했던 속도 이상으로 빠르게 강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모두가 예상했던 이상의 것을 준비해 두지 않았는가, 도연?”

“물론입니다. 이미 여기로 모이도록 신호를 보냈습니다.”

어기전혼의 수법.

멀리 있는 존재에게 혼의 일부를 보내 명령하는 사술.

사도명과 효경의 싸움으로 폭풍 속에 휘말린 황궁 밀실의 주변을 은밀히 포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콰쾅! 콰콰쾅!

수만 근의 암석으로 쌓아지고, 다시 강철의 벽에 휩싸인 밀실의 벽조차 두 절대고수의 싸움 앞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너진 틈 사이로,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혼돈마인과 아수라혈마인.

“싸움의 준비하려 애꿎게 희생당한 이들이 많음을 안다.”

황제가 말했다.

“하지만 그 희생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초석이 될 것이다. 짐은 오래도록 저들의 희생을 애도하고 추모할 것이다.”

무림인도 있었다.

황실 근위군이 있었고, 도성을 지키던 평범한 병사도 있었다.

혹은 애초부터 팔대마문의 유혹에 빠져, 자신의 영혼을 던진 마인 역시 존재했다.

그들은 모두 죽었다.

육체적으로는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혼을 잃고, 황제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인형이 되었다.

황제의 중얼거림이 끝나자, 사도명과 효경을 둘러싸고 돌아가던 강기의 폭풍이 흔들렸다.

그 속에서, 갑자기 효경이 날벼락 같은 고함을 지르며 사도명을 두고 황제를 노리며 날아왔다.

“희생? 희생이라 했느냐-?”

사도명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호흡에 수천 초를 부딪치던 효경이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래 은교교를 제압하려고 했었다.

사도명을 조종하기 위해서였다.

성화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은교교를 제압하면, 사도명은 효경의 명령이 아무리 부당해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짐작하고, 사도명이 황급히 은교교의 앞을 막았다.

그랬는데 효경은 왜 갑자기 사도명과의 싸움을 포기했을까?

왜 갑자기 황제의 목숨을 노리려, 싸움에서 손을 뺐을까?

**

천사가 되는 건 쉽지 않았다.

명교의 전대교수 석단궁.

그는 팔대천사의 육성을 처음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팔대마문의 난을 대비하려 천사를 만들겠지만, 이는 매우 큰 희생을 동반하는 과업이오.”

강해지는 것은 어렵다.

이미 강해진 상대와 싸워서 이기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천사가 되는 길에는 세 가지의 관문이 존재했다.

먼저 기재의 선발.

석단궁은 천하를 뒤져 일만여 명의 기재를 찾았다.

그중에서 팔백 명을 선발했고, 그들은 이차 관문에 투입되었다.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는 수련에는 필연적으로 희생이 따른다.

이차를 넘어 삼차 관문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열 명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필요한 시간 내에 내공을 키우지 못하는 사람과 키운 내공을 필요한 초식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후보자는 결국 죽어갔다.

이차를 통과한 팔십 명의 기재를 모아 놓고, 석단궁은 희생의 필요성을 연설했다.

“죽어간 동료의 수보다 수천 배, 수만 배의 천하인을 살리기 위해, 우리는 전진한다.”

삼차의 관문을 위해 삼 년의 기한이 주어졌다.

그리고 다시 열 명 중 한 명만이 선택되었다.

세 번째의 관문은 가장 지독하고 어려웠다.

열 명의 동료가 모여 싸우고, 살아남은 마지막 한 명이 팔대천사가 되는 절차였다.

혈화천사 율천은 본래 온화했고 붙임성이 좋았다.

하지만 아홉 명 동료의 피를 검에 묻힌 후, 스스로의 얼굴에 피로 물든 붉은 꽃을 문신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여덟 명의 앞에서 석단궁은 다시 말했었다.

“수고했다. 너희들의 희생으로,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효경은 황제의 말에서 그때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명과의 싸움에서 손을 빼고 날아가는 것이다.

“희생? 희생이라 했느냐? 너의 목숨이 끊어져도 희생이라 할 수 있을지! 한 번 보자,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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