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법허의 갈등
법허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을 크게 뜨고 손에 든 염주를 굴렸다.
가장 먼저 상황을 깨달은 곽소혜가 눈을 부릅뜨고 법허와 사도명을 번갈아 보았다.
종심기는 놀라지 않았다.
연자강은 한숨을 쉴 뿐이었다.
야율라가 말했다.
“역시나 그랬구나! 법허가! 그런데 적통자는 대체 어떻게 이 사실을 아시게 된 것일까?”
법허가 사도명에게 물었다.
“휴우. 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거요?”
“생사의 고통 속에서 그 고통을 피하겠노라, 살아온 시간들을 되짚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재검토. 질문해 보았습니다. 황제의 뒤! 그들은 누굴까?”
사도명은 이제는 차분히 말을 듣고 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황실과 무림에 동시에 원한을 가진 자들. 그들은 큰 배신을 당했겠죠? 한 가지 답이 떠올랐습니다. 배화교! 혹은 마교라고 불렸던 자들!”
“마교가 아니라 명교요.”
법허가 소리쳤다.
“대업을 도왔소. 명존을 받들어 세운 나라가 명이건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배신이었소.”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들은 지하로 숨었겠죠? 분명히 불이건만 연기가 없는 불이 된 겁니다.”
종심기가 한숨을 쉬었다.
“배화교 내부자임이 분명한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한동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맹주님은 저를 천거하여 무림맹에 들어가게 만들어주신 분이니까요.”
연자강이 사도명에게 물었다.
“나도 종심기 령주의 전갈을 듣고 겨우 알게 되었다. 그런데 몇 달은 기절해 있었던 네가 대체 어떻게 그걸 알게 된 거냐?”
“몸을 두고 정신만 세상을 떠돌았지만, 마치 유령 같은 상태라 알아낼 건 별로 없었다.”
사도명도 한숨을 쉬었다.
“그저 상상했지. 배화교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어둠 속에 숨어 성화산인을 남겼다는 것까진 내가 알고 있으니까.”
사도명이 법허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물었다.
“결론을 내렸죠. 무림에, 황실에 성화산인을 남긴 배화교가 무림맹 안에는 성화산인을 남겨놓지 않았을까? 무림맹 초기부터 명교의 제자가 무림맹에 들어와 있었다면, 그는 대체 누구일까?”
“그래서 답을 구했소?”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못 구했습니다. 하지만 누군지 알아낼 방법을 알아냈죠. 그 성화산인이 누구든, 내가 있는 곳으로 황제가 동원한 군사를 데려올 거다, 라는 결론을 통해.”
법허는 부인하지 않았다.
연자강이 법허를 향해 피를 토하듯이 물었다.
“어떻게 사부일 수 있습니까? 다른 누가 그러더라도, 사부는 그러실 수 없잖습니까?”
법허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사도명을 보았다.
다시 한번 염주를 굴리면서 법허가 말했다.
“마음의 벽을 지웠소. 마음껏 내 마음을 읽어 보시오. 그리고 내 제자에게 말해 주시오.”
사도명은 열린 창처럼 훤한 법허의 마음을 찬찬히 읽었다.
**
법허는 마씨 가문에서 태어났고 속명은 익덕이었다.
마익덕은 부모의 가르침으로 어릴 때부터 명존을 믿었다.
동료들끼리 아끼고, 타인을 해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명교는 곧 배화교였다.
마익덕은 한 마음으로 명존의 밝은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겠노라 결심하면서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부처를 만났다.
세상과 그 세상을 너머까지 비치는 자비의 빛에 감명을 받아, 본래의 믿음을 버리고 부처에 귀의하겠노라는 뜻을 밝혔다.
배화교의 수많은 간부들이 마익덕을 질타했지만, 배화교주 석단궁은 기꺼이 그를 놓아주었다.
“사해가 모두 하나이니, 어디에 있어도 명존께서 품은 진실의 빛은 골고루 비치리라. 익덕아. 무엇보다 사람을 아껴라. 네가 준 것을 그대로 돌려받는 것이 세상이지만, 주고도 받지 못함을 슬퍼하지 않는다면, 너는 크나큰 불법도 이룰 수 있을 게다.”
마익덕이 소림에 들어 법명을 받고 법허가 되었다.
천하가 혼란스럽기에 무림맹에 들어 세상을 도왔다.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대업에 자신의 출신문파인 명교가 힘을 보탠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리고 명교가 배신당하여 교도들이 끔찍하게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에 슬퍼했고, 절망했다.
교주인 석단궁이 결국 죽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에, 몸담고 있는 불문의 가르침조차 잊고 목 놓아 울부짖었다.
바로 다음 날, 부교주인 방여립이 그를 찾아왔다.
“믿음은 배신당했고, 그들은 은혜를 선혈로 갚았다. 우리는 연기가 없는 불이 될 것이거니와, 일천 명, 성화를 지키고자 몸을 사르는 존재로 돌아올 것이다.”
방여립은 그렇게 성화산인의 탄생을 예고했다.
“너는 계속 법허로 살아라. 하지만 성화산인들이 세상에 출현하는 날, 제이호 성화산인 마익덕으로 다시 태어나라.”
대살륙!
황실은 금군에 명령했다.
무림인들까지 동원되어, 명교에 대한 대살륙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법허의 부모도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방여립은 법허의 가슴에 굉천환을 묻고 사라졌다.
“명교의 불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날, 황실과 무림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깨달을 것이다.”
법허는 오랫동안 그저 법허로서만 살았다.
그리고 법허로서 죽을 수 있기를 바랐다.
무림을 덮은 재액과 벌인 모든 싸움에서 법허가 목숨을 돌보지 않고 가장 용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자신이 성화산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법허의 마음이 자신을 보는 사도명의 마음에 말했다.
“사람이 태생을 선택할 수 있는 것 아니잖소? 그래서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랐건만….”
**
사도명은 법허의 마음을 읽으면서 그 마음을 계속 연자강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이윽고 법허의 마지막 마음까지 읽은 후, 연자강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법허 선사는 내가 있는 곳으로 풍우뢰, 세 조직의 병사와 주인을 이끌고 온 것이다.”
“그 전에는 왜 사부가 배화교의 편임을 몰랐던 거냐, 도명?”
“마음은 오묘하거든.”
사도명이 웃었다.
“내가 손쉽게 침입하는 건 흔들리는 마음. 성화산인은 악을 행하는 게 아냐. 성스러운 복수. 그 신념을 행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하는 마음은 굳건해서 침범해 읽어내기가 쉽지 않아.”
연자강이 법허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왜 사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도명을 해치려 했습니까? 풍우뢰를 데려와서 해칠 정도로, 도명이 사부께 잘못한 게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 자강아.”
법허가 고개를 저었다.
“그 모든 마음에 대해서도, 이미 조화무제께서는 아신다.”
사도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사는 나를 믿었으니까.”
“믿어? 믿고 있어서 적에게 이곳을 누설하여, 널 위험에 빠지게 했다고?”
사도명이 종심기를 보았다.
“종심기 령주. 아까 말한 내부자로부터 받은 정보, 성화산인이 모두 몇 명이라 했소?”
“아! 숫자까지는! 그저 부맹주님에 대한 전갈만 받았습니다.”
“천하에 천 명. 무림맹에는 법허 부맹주님. 그럼 저기에 모인 수 많은 병사들 사이엔 어떨까요? 저들 중에는 성화산인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종심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사도명의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알고 있었다.
없을 리가 없었다.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아미타불! 우리 성화산인들이 몸속에 심은 굉천환은 두 가지 경우에 폭발하오.”
법허가 적보윤과 청희태, 그리고 백산을 보며 말했다.
“하나는 우리들이 폭발을 스스로 원할 때! 나머지 하나는 방여립 부교주가 성화산인들의 몸속에 심은 성화기(聖火氣)가 주인의 불안감을 감지할 때!”
삼대 조직의 주인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은 금의위 무장 출신으로 나라를 지켜야 할 무장이 백성들을 해쳐야 하는 임무에 자괴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세 사람 중 서열이 가장 높은 백산이 물었다.
“우리 병사들 중에도 성화산인이 있고, 그들이 불안감을 느끼거나 스스로 굉천환을 터뜨릴지 모른다는 말인 거요, 법허 선사?”
“아미타불. 한 번 터지면 주변 수백 장이 초토화! 주변의 병사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외다.”
연자강은 비로소 법허가 불살의 계를 원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성화산인이 죽음의 위험에 처해, 스스로 굉천환을 터뜨릴까 두려워하신 겁니까, 사부?”
“아미타불. 의미 없는 죽음을 보고 싶지 않구나, 자강아.”
“그럼 사부께서는 혹시….”
연자강이 사도명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 병사들 속에 있을 성화산인의 굉천환을 제거하고, 그들을 죽지 않게 만들 유일한 사람이 사도명이라 생각해, 이곳으로 저들을 유인한 겁니까?”
“문답은 나중에 하자꾸나.”
법허가 세 명의 무장과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빈승은 두 번째로 성화산인이 된 후에, 후회하였소. 죽음이 두려워서였소.”
병사들 중 몇 명의 눈빛이 크게 변했다.
사도명은 이미 마음을 여러 갈래로 나눠놓고 있었기에, 그런 변화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법허가 말을 이었다.
“나의 목숨이 아니오. 내가 죽으면, 죽어야 하는 다른 이들의 목숨! 우리 명교는 분명 억울한 일을 당했소. 하지만 그 억울함을 해소하고자 또 다른 억울한 죽음을 더 만들어야 한단 말이오?”
법허는 병사들 중에 있을 또 다른 성화산인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웃을 아끼되 베풀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 마음에 환한 빛을 기르는 것. 나는 비록 불문에 들었으나, 명존의 가르침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소.”
백산이 입술을 몇 번 깨물더니 이윽고 말했다.
“선사의 뜻, 알겠습니다. 내 병사들을 모두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거지요?”
적보윤과 청희태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장군! 황명을 거역하실 작정입니까?”
“두 장군도 이미 들으셨잖소? 우리가 들은 황명은 진짜 황명이 아니라, 배화교의 명령이라고 하지 않소?”
백산의 말은 단호했다.
적보윤과 청희태는 더 이상 반발하지 못했다.
법허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사도명을 보았다.
그는 이미 양손에서 휘황한 빛을 뿜어내, 모든 병사들의 몸을 덮게 만들고 있었다.
“병사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중입니다.”
사도명이 쓰게 웃었다.
“아까 살기를 없앴던 것과 같은 수법이긴 하지만, 제게 이런 수단이 없었으면 어쩌시려고 그랬습니까?”
“믿었소. 부처께서 자비심을 베푸실 것을. 내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나 스스로 죽어서라도 무제를 살리려 했소.”
연자강은 법허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의 사부는 변절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
병사들 중에 있는 성화산인을 살리고자, 법허는 자신의 생명을 걸었던 것이다.
“나는….”
연자강은 옆에 있는 곽소혜를 보며 목이 메여 말했다.
“너무 훌륭한 사부를 두었소. 다시 태어나도 영원히, 나의 사부는 저 분뿐이시오.”
백산을 비롯한 세 명의 장군이, 병사들을 모두 앉게 했다.
가부좌하고 편안히 앉은 병사들 한 명 한 명을 사도명이 둘러보며, 성화산인을 찾게 했다.
바로 그런 순간에 은교교가 온 것이다.
그녀는 가부좌하고 앉은 병사들을 뛰어넘어, 그 앞에 내려섰다.
**
[그래서, 성화산인이 누구인지는 찾아냈나요?]
은교교가 전음으로 묻자, 사도명도 전음으로 대답했다.
[찾았소. 두 명. 문제는 그들의 몸에 심겨진 굉천환을 제거할 방법이 없다는 거요.]
성화산인의 굉천환이 터지면 모두가 죽게 된다.
몇 명의 고수만 살아남을 뿐, 모여 앉은 병사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을 수 없다.
사도명은 이미 굉천환의 위력을 체험해 보았다.
절대고수의 반열이 오른 사도명조차, 몇 달 동안 생사의 기로를 헤맸던 것이다.
[굉천환의 제거! 그것, 방법이 있어요.]
은교교가 전음을 마치고 병사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하늘을 되돌립니다. 내려앉았던 빛이 하늘로 돌아갑니다.”
뜻밖의 행동, 뜻밖의 말에 사도명은 영문을 알지 못해 눈만 끔벅이면서 은교교를 보았다.
병사들도 은교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웅성거렸다.
백산이 뒷머리를 긁었다.
적보윤이 미간을 찡그렸다.
“은령선자인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사도명의 귀에 전음이 울렸다.
[오른쪽을 맡아 주시겠소?]
백산의 전음이었다.
백산은 웅성거리는 병사들 사이를 걸어, 일곱 번째 줄에 앉아 있는 얼굴이 긴 병사의 앞에 섰다.
사도명은 몸을 날려, 열두 번째 줄의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병사를 향해 떨어졌다.
“…전주님. 왜?”
백산의 오른손이, 자신을 보며 묻는 병사의 이마를 잡았다.
“회천객의 임무는 성화산인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굉천환을 제거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