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마지막 계획
냉겸은 움직이지 않았다.
은교교의 검은 총사의 목을 정확하게 노렸다.
총사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목을 노리며 날아오는 검을, 꽃을 감상하듯 태연한 눈으로 보았다.
“치잇!”
은교교가 검 끝을 돌렸다.
청상검은 완전히 빗겨가진 못하고, 총사의 어깨를 길게 스쳤다.
스-컥!
전력을 다해 찔러간 검이었다.
직접 찌르는 것보다 옆으로 흘리는 것이 더욱 힘들어, 은교교는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왜 피하지 않았지?”
총사가 오히려 물었다.
“왜 검을 돌리셨나?”
“화가 나. 진심으로 화나.”
은교교가 한숨을 쉬었다.
“아주 많은 사람이 죽었어. 그런데도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이제야 겨우 나타나더니, 내가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라고 떠드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총사는 은교교를 보았다.
냉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오. 하지만….”
“죽이려던 건 아니었어. 적어도 당신들이 살아 있어야 배화교와 싸울 수 있다는 건 아니까.”
은교교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어. 당신은 그들을 구할 수 없었나?”
총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뼈와 가죽만 남은 몸이 삐거덕거리면서 은교교의 앞에 갔다.
그리고 앙상한 손을 뻗어 은교교의 손을 잡았다.
은교교는 그 손을 피하려 했고, 실제로도 피했다.
“헛? 이, 이게 어떻게?”
놀랍게도 이미 피했다 싶었던 다음 순간, 자신의 손목이 총사에게 잡혀 있음을 발견했다.
“내 손은 비록 느리지만, 내가 살아 있을 때도 지금도, 이 손을 피해낼 사람은 없다네.”
총사가 은교교의 검을 움직여 자신의 가슴을 그대로 찔렀다.
은교교는 검을 통해 전해오는 둔탁한 감각을 느꼈다.
청상검이 총사의 몸을 찌르고 지나가 등으로 나왔다.
냉겸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은교교는 조금 전 자신이 벴던 총사의 어깨를 보았다.
피가 흐르고 있지 않았다.
등으로 뚫고 나간 청상검에도 피의 흔적은 없었다.
“헛!”
은교교가 놀라서 물러났다.
총사는 외견만으로 목내이인 것이 아니었다.
죽은 듯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죽은 사람이었다.
총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몸이어서 나설 수 없었네. 나는 이미 죽었고, 겨우 이곳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어서.”
은교교는 총사가 건네는 청상검을 다시 넣었다.
총사는 자리로 돌아갔다.
냉겸이 말했다.
“총사께서 인연이 닿은 회천객 한 명을 길렀고, 그 회천객이 다시 다른 회천객을 길렀네. 그렇게 늘려서 지금 삼백 명이야.”
“삼백 명? 성화산인은 모두 일천 명이라 했습니다. 상대하기엔 부족하군요.”
“그래서 접촉한 걸세. 신 무림맹. 검과 방울의 전사들이 도와준다면, 배화교를 막을 수 있네.”
은교교가 미간을 찡그렸다.
“우리가 도울 것 같나요?”
“도우리라 믿네.”
총사가 뒤에서 말했다.
“배화교를 막는 건 신 무림맹으로서도 필요하니까.”
“신 무림맹 모든 사람들이 귀하를 생각하는 방식은, 좀 전의 나와 똑같을 겁니다.”
“똑같다면 결국은 용서하고 돕겠구먼. 좀 전의 자네처럼.”
“…….”
은교교는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었다.
총사가 다시 말했다.
“회천객들은 천하 각처에서 성화산인을 찾고 있네. 찾아내면 그들의 움직임을 내게 보고하지.”
“알겠어요. 알겠는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나요?”
“자네들이 우리와 힘을 합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려고. 풍, 우, 뢰! 그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으신가?”
**
삼도천광의 방어가 결국 무너져 내렸다.
야율라는 본래 이틀을 장담했지만, 꼬박 하루를 더 버텨냈다.
그녀는 모든 기력이 쇠해 무너졌고, 그 사이 힘을 비축한 연자강이 앞으로 나섰다.
“수고하셨소. 덕분에 기력이 충만하오.”
동굴 주변을 포위한 세력은 모두 셋이었다.
적우방!
청뢰각!
백풍전!
뒤쪽의 동굴을 등진 채, 연자강은 앞에 있는 붉은 옷과 왼쪽에 있는 푸른 옷,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푸른 옷 무사들을 보았다.
야율라의 삼도천광은 자신의 죄를 비추는 빛이다.
죄는 환상을 만든다.
사도명을 쫓아 모인 무사들 중 많은 숫자가 야율라의 삼도천광에 의해 광기에 빠졌다.
야율라가 무너지자 방어막은 사라졌다.
하지만 한 번 광기에 빠진 자들은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제가 없앨 수 있는 전력은 열에 둘뿐이었습니다.”
야율라가 바닥에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칠 할 이상이 남았습니다. 적통자를 지켜줄 수 있으시죠?”
“물론!”
연자강이 빙그레 웃었다.
“황천법문의 적통자 이전에, 저 녀석은 내 친구니까요.”
연자강의 왼쪽에 곽소혜가 서고, 오른쪽에 법허가 섰다.
그 세 사람의 뒤쪽, 쓰러져 있는 야율라를 종심기가 돌봤다.
세 개의 문파와 그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 세 명.
붉은 옷의 중년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적우방주 적보운이다. 무림 말살령은 이 나라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청뢰각 군사들의 뒤에 서 있는 푸른 옷 사내는 덩치가 좋았다.
큰 덩치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가 앞쪽까지 또렷했다.
“청뢰각주 청희태다. 너희는 모두 죽는다. 우리를 이겨내도 죽어. 황상께서 움직일 수 있는 군사는 우리 외에도 차고 넘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나온 사람은 흰옷의 뚱뚱한 노인이었다.
“백풍전을 맡은 백산이다. 그럼에도 너희는 이기지 못한다. 우리 군사들을 광기에 빠뜨린 죄, 철저하게 물어주마.”
백산이 손을 들었다.
백풍전의 군사들이 가장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몰려오는 흰색 옷의 병사들을 보며 연자강은 한숨을 쉬었다.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청황백적을 색으로 삼는 네 개 조직. 그 조직장의 이름이 또한 각각의 색과 같다. 본명일까?”
“그럴 리가요.”
곽소혜가 열 개 손가락 사이 각각에 여덟 개의 비침을 잡았다.
“가명이겠죠. 본래는 금의위 출신 고수들이고요.”
“아미타불. 저들도 출신은 무림! 그렇기에 본명을 밝히지 못하는 것 아니겠나?”
법허의 몸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연자강이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 문제군요, 사부. 저들에게는 우리가 적인데, 우리에겐 저들이 적일 수만은 없으니!”
천뢰각과 적우방도 군사를 함께 움직였다.
세 사람은 삼재진을 형성하며 수백 명의 병사를 맞이했다.
강기의 회오리!
혼자서 능히 수백 명을 감당할 수 있는 극강고수 세 명이, 한꺼번에 수십 명씩 병사를 쳐냈다.
콰콰-콰콰쾅!
폭음 속에서, 야율라가 종심기를 올려다보았다.
“어떤가요?”
“당분간은 막아낼 수 있을 듯 보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쳐들 가시겠지만….”
“그쪽은 …?”
“아! 삼재진은 힘의 균형이 맞아야 하기에….”
“그런 뜻이 아니에요. 아까 전달한 말! 그 비밀이라는 정보.”
야율라가 물었다.
“신 무림맹 안에 성화산인이 있다. 맞죠?”
“그건….”
“말해줘요. 나는 적통자를 지켜야 합니다. 황천법문은 그 일을 위해 존재합니다.”
종심기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단순히 있다가 아닙니다. 성화산인이 누군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입니다.”
야율라의 눈이 빛났다.
“내 눈을 봐요. 뭔가가 보이죠? 그래요. 계속 보세요. 자, 말을 하세요. 신 무림맹에 스며든 성화산인은 대체 누구죠?”
**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자꾸나. 짐은 쉬어야겠으니.”
황제가 손을 저었다.
대신 관료들이 고개를 깊이 조아린 후 모두 물러갔다.
도광효만 남았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자, 도광효는 궁녀와 환관들조차 모두 내보낸 후 황제를 보았다.
황제가 물었다.
“제가 잘 하였습니까?”
도광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잘 하고 있다. 이젠 누구도 너를 진짜 황제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훌륭하구나.”
“감사합니다.”
“너처럼 황상과 꼭 닮은 자가 나타나 준 것은 행운이었다. 네가 있기에, 나와 황상은 이 모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도광효가 걸어갔다.
“따라오거라.”
도광효가 앞에 걷고 황제의 얼굴을 한 가짜가 뒤에 걸었다.
그러다가 마주치는 사람이 보이면, 도광효는 황제를 수행하는 듯 허리를 조아리고 걸었다.
교태전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도광효가 벽의 기관을 만졌다.
비밀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눈앞에 열린, 지하로 통하는 통로로 들어갔다.
지하 깊은 곳에, 침상에 누워 있는 진짜 황제가 있었다.
“어서 오라, 도연.”
황제가 도광효를 불렀다.
도광효가 허리를 숙였다.
“상처는 어떠하십니까? 황상께서 희생하셔서 만든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화무제는 어찌 됐느냐?”
“몽골 깊은 곳에서 마침내 찾았습니다. 풍우뢰가 함께 공격하고 있다는 전갈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도광효가 데려온 가짜를 보았다.
“정말로 나와 닮았군. 한 치의 어김도 없이 같아.”
“점점 더 비슷해지고 있습니다. 행동과 말투까지.”
도광효가 웃었다.
“덕분에 마지막 계획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계획?”
황제가 묻자 도광효는 계속 웃으며 대답했다.
“황상께선 배화교의 요구를 응낙하셨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받았던 그들의 원한. 그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무림을 말살한다면, 황실은 내버려 두겠다는 조건.”
“그랬었지.”
“무림 말살령의 명분을 얻기 위해 스스로 최고의 위험까지 각오도 하셨고요.”
“제왕검형이 짐의 몸을 보호한다. 크게 다칠망정 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랬는데 때마침 이 녀석이 나타나 주었지요.”
도광효가 가짜를 보았다.
가짜가 빙그레 웃었다.
“엄부동이란 이름을 가졌습니다요, 헤헤.”
“그래, 엄부동. 너 때문에 짐이 쉴 수 있게 되었다.”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상처도 치유하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여유도 없고.”
도광효도 따라 웃었다.
“그런데 만약 엄부동이 나타난 게 우연이 아니라면 어떨까요?”
“무어라?”
“가령, 배화교가 황상과의 약속, 그러니까 무림만 없애면 황실을 놓아둔다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면? 그래서 굳이 때를 맞추어 황상의 얼굴을 하고있는 엄부동을 보내온 거라면?”
황제의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
황제가 자신을 보자, 엄부동이 포권하며 환하게 웃었다.
“성화산인 칠백사십구 호. 황제께 인사드립니다.”
황제가 도광효를 보았다.
그 눈빛을 알아들은 도광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배화교는 엄부동을 통해 절 회유했죠. 이제 무림이 없다. 그럼 황실조차 없으면 어떻게 될까?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그냥 만인지상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도광효는 검을 갖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 중, 황제 앞에서 검을 갖고 있어도 되는 유일한 사람이 도광효였다.
도광효가 검을 뽑아 황제를 향해 겨누었다.
“저는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아하, 진짜가 죽어 가짜가 진짜가 되면, 나를 방해할 사람은 세상에 없겠구나.”
“…도연아!”
황제가 자신의 목을 겨눈 도광효의 검을 보았다.
엄부동이 황제의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도광효 학사는 올바른 선택을 했습니다, 황제. 덕분에 우리 배화교는 복수를 완성하게 되고, 도 학사는 모든 권력을… 아!”
차가운 빛이 엄부동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엄부동은 도광효의 검에 묻은 핏물을 보았다.
그것이 자신의 피라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에, 엄부동의 목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람이라는 게 참으로 기묘한 존재라서요, 황상.”
도광효가 황제를 보며 웃었다.
“자신에게만 숨겨진 신분이 있고, 타인에게는 숫제 없을 거라 생각하지 뭡니까?”
황제가 미간을 찡그렸다.
“자네에게도 숨겨진 신분이 있었다 말하는 겐가, 도연?”
도광효가 검을 검집에 넣고, 포권하며 웃었다.
“도광효가 스물세 번째 회천객 으로 다시 인사드립니다, 황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