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111화 (111/168)

111화. 급변

“자결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냥 두었소?”

은교교는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돌려 냉겸을 보면서 오히려 되물었다.

“냉 장군은 왜 그랬죠?”

은교교는 관평의 앞에 있었고 냉겸은 뒤에 있었다.

자결을 막고자 했다면, 냉겸이 훨씬 빨리 손을 쓸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뒤에서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성화산인에 대한 자료를 이미 거의 모았소. 관평에게서 추가로 얻을 정보가 없었소.”

살려 놓을 필요가 없었기에, 굳이 살라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은교교도 그제야 대답했다.

“배화교의 행동에 찬성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들의 한스러움은 이해할 수 있어요.”

“일부러 죽게 두었다?”

“그는 신념을 위해 산 사람이니, 굳이 살려서 수치를 견디게 할 생각이 없었어요.”

은교교는 사도명을 다치게 만든 배화교를 증오했다.

하지만 신념을 지닌 자의 죽음만은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냉겸이 병사들을 보았다.

“관평은 스스로 죽었다. 배화교가 세상을 점령하고 농락하는 방식은 이처럼 무섭다. 명심하라. 흑운문에 내려오는 황실의 명령은 황상의 것이 아니다. 무림을 말살하라는 명령은, 이제부터 철저하게 무시하라.”

**

연자강은 더 이상 참고 볼 수가 없었다.

고통을 참기 위해, 맞닿을 듯이 악다문 사도명의 이와 잇몸.

다무는 힘을 견디지 못한 이가 피를 흘리다가, 결국 저절로 뽑혀 나오고 있었다.

“으으으!”

상처는 날 때 가장 아프다.

하지만, 나아가는 도중의 고통도 그에 못지않았다.

사도명은 온몸이 스스로 파괴되는 고통에 더해, 그걸 최단기간에 회복시키는 고통까지 함께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그만둬! 싸워야 한다면 내가 싸울 게. 넌 충분히 노력했어. 이건 너만 감당해야 할 싸움이 아니란 말이다.”

연자강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인간 사도명이 아닌, 조화무제 사도명이기 위해서 감당해야 하는 극한의 고통.

사도명은 차라리 죽고 싶어 하는 육체를 견뎌내고 있었다.

은하대에서 계속 공급되는 내공은 그의 육신을 살리지만, 그 대가는 죽음보다 큰 고통이었다.

[그… 그러지 말고 나가. 혼자 둬. 죽고 싶어도 죽을 힘조차 없게 아프니까, 내가 죽을 걱정은 말고 나가 있어라, 자강.]

연자강은 사도명을 안에 둔 채 혼자서 밖으로 나왔다.

동굴 밖 세상은 어두웠다.

밤이 깊은데 하늘에는 별이 없고, 달도 없었다.

아래쪽에서 사람들이 올라왔다.

연자강의 밤눈은 밝다.

가장 앞장서서 올라오는 사람은 야율라였고, 그 뒤를 따르는 사람은 법허였다.

“사부님!”

“아미타불! 기다리고만 있기가 초조하여 굳이 왔다. 야율라 법문주를 졸라 이곳을 알아냈지.”

법허는 두 사람과 함께 왔다.

그들 중 뒤에 서 있던 곽소혜가 달려왔다.

그리고 연자강을 와락 안았다.

“얼굴이 어떻게 된 거예요? 설마 제대로 먹지조차 못하고 계속 머무른 건가요?”

연자강도 그녀를 안아주었다.

“나는 괜찮소. 동굴 속 도명의 모습을 보면, 내가 정말 괜찮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사도명은 짧은 포옹 후, 곽소혜의 어깨너머에 법허가 데려온 또 다른 사람을 보았다.

연자강은 신 무림맹의 사람을 모두 알았지만, 법허가 데려온 사람의 얼굴은 알지 못했다.

그는 중년의 남자로 코밑에는 팔자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연자강이 자신을 보자, 중년 남자는 스스로를 소개했다.

“종심기입니다.”

법허가 그의 설명을 보충했다.

“종심기는 과거 무림맹에서 기찰령주를 맡았었다. 오래 은거해 있다가 이번에 신 무림맹의 이야기를 듣고 합류했다. 천하 정세의 파악에 큰 도움이 된다.”

“명성은 들어보았습니다.”

연자강의 말은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니었다.

종심기의 정보수집 능력은 매우 뛰어나, 설청산마저 직접 여러 번 칭찬을 했었다.

황제가 내린 말살령 이후, 무림인들은 모두 지하로 숨었다.

그리고 각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무림에 싫증이 나 조용히 있던 은거고수들은 그 반대로 움직였다.

그들은 무림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속속 복귀했다.

그들은 신 무림맹을 택했다.

사도명에 의해 무사히 피난했던 무림연합군의 십구성좌 고수들이 은밀한 연락을 맡고 있었다.

신 무림맹은 검과 방울을 증표로 삼으면서, 스스로를 검령의 대리인이라고 불렀다.

검령의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중요한 정보가 있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습니다.”

연자강이 눈을 깜빡거렸다.

“중요한 정보라면 화운악 맹주에게 전하시지 왜 나에게?”

“맹주가 아니라 조화결사대의 대장에게만 직접 전해야 하는 정보라서 그렇습니다.”

종심기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연자강의 귀에만 들리는 전음 입밀로, 종심기는 꽤나 긴 얘기를 전달했다.

연자강의 눈이 커지다가, 나중에는 안색까지 창백하게 변했다.

“사, 사실이오?”

“성화산인과 그들을 움직이는 자들에 대한 정보를 제게 직접 전달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누구요?”

“정체를 밝히지 않아 누군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전달되어 오는 정보는 매우 정확합니다. 적들 속의 내부자가 틀림없습니다.”

옆에서 듣던 법허가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표정이 그리도 엄중하냐?”

“사부님에게조차 말씀드릴 수는 없는 일이라 죄송합니다.”

연자강이 몸을 돌려 동굴을 보았다.

명멸하는 희미한 빛은 사도명의 몸과 그를 받치고 있는 은하대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빛의 명멸은 그대로 사도명의 고통이기도 했다.

법허가 물었다.

“조화무제는 괜찮으신 게냐?”

“멍청하니까 괜찮아야죠.”

“그게 무슨 뜻이냐?”

연자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편한 짐을 두고 큰 짐을 지고 있단 의미입니다.”

“내 말은, 나으실 수 있는 건지를 묻는 게다.”

“살아났습니다. 멀쩡하게 살아나 놓고도, 굳이 죽으려고 멍청한 짓을 택했습니다.”

아무도 연자강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오직 야율라만이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마지막 황자는 진정한 남자를 후계로 정하셨네. 초원의 여자들은 그런 남자를 존경합니다.”

“칠 일 후에 조화무제로 나오거나 나무꾼으로 나올 겁니다.”

연자강이 곽소혜를 돌아보았다.

“은령선자는 어떻소?”

“전서구를 보내왔어요. 황제의 뒤에 있는 자들의 정체를 마침내 알아냈다 했어요.”

“그들은 배화교입니다.”

종심기가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보자 종심기는 말을 이었다.

“이것도 그 제보자가 보내온 내용입니다. 황제의 배후에 배화교가 있고, 그런 배화교와 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회천연합이라 불립니다.”

연자강은 지난 네 달 사이, 사도명과만 함께 있었다.

자연 그동안 무림과 세상에 벌어진 일을 알지 못했다.

“내가 동굴에 있는 동안 벌어진 일들을 설명해 주시오.”

“황제는 무림 말살령을 내렸고, 그걸 위해 네 개의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운, 우, 뇌, 풍이라 불립니다.”

종심기가 설명을 시작했다.

“은령선자가 그 중 흑운문을 해체시켰고, 거기서 냉겸을 만났습니다.”

“우도독 냉겸?”

“냉겸은 사직했고, 지금은 회천연합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핵심 인력으로 보입니다.”

“나머지 세 곳은요?”

“적우, 청뢰, 백풍! 사흘 전부터 모두 행방이 묘연합니다.”

연자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행방, 곧 명확해지겠군.”

“예? 무슨 말씀이신… 아!”

종심기는 연자강이 가리키는 산 아래쪽을 보았다.

어두워진 사방.

아래쪽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야율라가 큰 눈을 깜빡거렸다.

“두 명의 제자를 데려왔고, 산 아래에 배치해 두었어요. 모두 황천법문 출신으로 법술에 뛰어납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아무 연락도 없다는 것은….”

“흑운문은 금군 출신 위주로 구성됐지만 풍, 우, 뢰 저 세 곳은 모두 금의위 출신입니다.”

종심기가 설명했다.

“각각의 곳이 흑운문보다 서너 배 이상 강하다 봐야죠.”

“내 두 아이들이 이미 죽었다? 그런 뜻인가요?”

야율라의 몸을 감싸고 이글거리는 기운이 일어났다.

콰아아-!

연자강이 미간을 찡그렸다.

“세 곳이 뭉쳐서 쫓아오고 있습니다.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미안하다.”

법허가 고개를 저었다.

“내 실수구나. 조심성이 부족했다. 뒤를 느끼지 못했다.”

“이로써 조화무제의 행방은 결국 황실에 누설됐네요.”

곽소혜가 동굴의 앞을 막았다.

연자강도 그 옆에 섰다.

“일곱의 낮과 밤 동안 우리 다섯 명이 저 수백 명을 모두 막아내야 한다는 얘기기도 하고!”

야율라가 수결을 짚었다.

그녀의 몸 주변 아지랑이가 더욱 강해져서 회오리로 변했다.

회오리는 온갖 색채를 지니고 있어, 마치 무지개가 둥글게 맴을 도는 느낌이었다.

“삼도천의 물은 빛을 받으면 이승의 죄를 반사하죠. 삼도천광은 그걸 흉내 낸 겁니다.”

콰아아아아-!

뻗어나간 칠색의 회오리가 동굴의 주변을 덮었다.

그 속에 자신들의 몸도 감춘 채, 야율라가 말을 이었다.

“죄의 반사! 이틀 동안 저들은 자신의 죄가 만드는 환영과 싸우게 될 겁니다. 그동안은 우리의 모습을 감출 수 있습니다.”

야율라가 연자강을 보았다.

“제 힘이 다하고 나면, 그때부턴 여러분 차례입니다. 저는 후계자님이 마음에 들어요. 보호해 주실 수 있죠, 여러분?”

콰아아아아아아아아-!

**

“저곳이라네.”

냉겸이 돌산 하나를 가리켰다.

“도착했나요? 저기입니까?”

은교교는 그 돌산의 곳곳에 뚫린 크고 작은 동굴을 보았다.

두 사람은 이틀이나 걸려서 청해성 가장 서쪽까지 왔다.

그러다가 마침내 회천연합의 본단에 도착한 것이다.

“많은 동굴 중 진짜 본단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갈래뿐이야. 그것도 수없이 갈라지는 미로를 무사히 통과해야 겨우 도착이 가능하지.”

냉겸이 후르르 몸을 날렸다.

“지금부터 내가 가는 길로, 내가 밟는 곳만을 따라오시게. 미로 속에는 기관장치도 있으니.”

은교교는 그의 뒤를 따랐다.

냉겸은 회천연합이 배화교를 막고자 싸운다고 말했다.

은교교로서는 회천연합의 총수와 만날 기회를 버릴 수 없었다.

신 무림맹에는 전서구를 보내어 간략히 상황을 알렸다.

냉겸은 바위산의 동굴들 중 왼쪽 일곱 번째로 들어갔고, 은교교는 그 뒤를 따랐다.

동굴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계속 갈림길이 나타났는데, 냉겸은 그때마다 일정한 선택을 이어갔다.

양 갈래가 나타나면 왼쪽으로 갔고, 세 갈래의 길이 나타나면 오른쪽을 택했다.

은교교는 충실하게 냉겸이 밟은 위치만 밟으면서 걸었다.

이윽고 길이 끝났다.

돌산의 깊은 중앙에서, 은교교는 냉겸이 앞을 가리키면서 하는 말을 들었다.

“도착했네.”

그가 가리키는 곳에 한 명의 사람이 보였다.

지나치게 말라 한 점의 살조차 보이지 않았고, 뼈와 가죽이 그대로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돌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에 빛이 없었고, 호흡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목내이 같았다.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회천연합의 총수시네. 삼백 회천객을 기르신 분이시지.”

은교교가 포권했다.

“어떻게 부르면 됩니까?”

“그냥 총수라 부르면 되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부르니까.”

냉겸이 대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총수!”

은교교가 다시 말했다.

“배화교의 계획은 대체 언제부터 아신 거죠?”

“처음부터 아셨다 들었네.”

“냉겸 장군. 계속 대신 대답할 건가요? 총사! 새외 오대마문과 우내 삼대마문을 통합한 지옥문. 그 모든 계획의 배후에 배화교가 있다는 것도 아셨고요?”

총사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은교교를 똑바로 보더니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알고 있었네.”

“배화교가 황제를 조종하고, 황제가 무림인들을 없애게 만들고. 그 모든 것들도 다 알고 있었던 거 맞아요?”

“또한 알고 있었지.”

“그렇다면 여기 오느라 이틀씩이나 쓴 거, 옳았다는 거네.”

냉겸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무슨 말을…”

냉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교교의 몸이 앞으로 날았다.

허리의 검은 이미 뽑혀, 흑마강을 서리서리 뿌리고 있었다.

“모든 걸 알면서! 무림인들이 죽어갈 걸 알면서! 뒤에서 보고만 있었다는 그 목을 꼭 한번 찔러주고 싶었단 말이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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