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회천연합(回天聯合)
사도명의 정신이 은하대 위에 몸을 둔 채로 세상을 떠돈 이유는 단순히 고통을 피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유를 찾고 있었다.
자신이 순간마다 죽음과 재생의 고통을 감당하면서까지 힘을 간직해야만 하는 이유.
세상을 지켜야 하는 이유.
많은 이들을 보았고, 그들의 삶을 관찰했다.
은교교도 보았다.
사도명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그녀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살폈다.
때로 순수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 정신만 남아 떠도는 사도명을 알아보기도 했다.
“검과 방울을 그려라. 널 도울 사람이 찾아올 것이다.”
고통받는 아이에게 은교교의 도움을 연결해 주면, 은교교도 자신을 인지할 거라 생각했다.
사도명은 유령이었지만, 또한 유령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들을 발견했다.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들!
그래서 돌아왔다.
지옥보다 훨씬 지독한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사도명은 굳이 눈을 떴다.
[찾아냈다, 자강! 세상을 떠돌다가 이제 겨우 찾았어. 그 사람들 때문에, 그들 때문에라도 나는 계속 강해야 해! 스스로를 지키려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나, 이 고통을 기꺼이 감내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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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께서 대업을 이룬 후 말씀하시었다.”
냉겸이 모든 병사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내공의 막은 이미 풀려서, 그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렸다.
“황위란 가시가 잔뜩 돋은 몽둥이와 같다. 짐이 후대를 위해 그 가시를 제거하마.”
은교교는 미간을 찡그렸다.
태조의 말이 익숙했다.
후대를 위해 무림을 제거하겠다는 황제의 선언과 그 뜻에 있어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냉겸의 말이 이어졌다.
“때문에 나라의 안녕을 위해 공신조차 숙청하고, 잘못을 범한 이들을 참하셨다.”
태조가 무수한 이들을 죽인 것은 사실이었다.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훗날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방법 또한 잔인하여, 최대의 고통을 주면서 죽였다.
허리를 자르고, 사람을 살을 포로 떠내어 죽였으며, 사지를 찢어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실무자는 해치지 않았다. 그 점이 태조 폐하의 진심을 증명한다고 모두들 믿어 달라.”
냉겸이 병사들을 둘러보더니 마지막 시선을 은교교에게 주었다.
“아무튼 그렇게 숙청한 대상 중에, 그들도 끼어 있었다. 대업의 초기, 태조께서 잠시 몸을 담기도 했던 대운광명교!”
대운광명교(大運光明敎)는 마니교라고도 불리며, 명존을 신으로 섬기는 문파다.
그들은 스스로를 명교라 불렀지만, 태조가 벌인 대대적인 숙청 이후에는 오히려 마교라 불렸다.
마니교라는 이름이 변형되어 마교가 된 것이다.
“죽어가면서 그들은 세상을 저주했지. 도움이 커서 국호를 명이라 하게 했음에도, 오히려 죽임을 당했으니까! 그리고 서원(誓願)을 세웠다. 모든 것을 다시 바꿀 것이라고. 자신들을 배신한 세상에 재액을 되돌려 줄 거라고.”
은교교가 물었다.
“혹시 그들인가요? 지금 황제의 뒤에 있는 자들!”
냉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죽었으나, 믿음을 감추고 숨어 있던 배화교도들은 살아남았소. 그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불렀지. 연기가 없는 불!”
은교교의 눈이 커졌다.
비로소 건녕제가 남겼던 단어의 진짜 뜻을 깨달았다.
왜 보광이 연기가 없는 불을 언급한 사도명을 죽이고자, 자신을 던졌는지도 알게 되었다.
“오랜 시간, 그들은 조금씩 스며들었소. 결국 모든 것을 장악했지만 눈치를 채지 못했소.”
은교교가 물었다.
“연기가 없으니 아무도 불이라 생각 못 했다, 인가요?”
“그렇소. 그렇긴 한데, 아무도는 아니오.”
은교교는 비로소 냉겸이 태조의 대업과 공신의 숙청에 대해 언급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배화교도의 서원!
복수의 맹세!
“누군가는 그들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대비하기 시작했소. 세상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려는 움직임. 그게 우리들이오.”
냉겸은 다시 병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우리들의 이름은 회천연합이다. 너희에게 이 모든 걸 말해주는 이유는 하나다.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의 뒤에는 명교, 즉 배화교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
병사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숙청한 황실을 증오한다. 뿐만 아니라, 황실을 도와 자신들을 해친 무림인들을 철저하게 증오하고 있다.”
양선정이 두려운지 몸을 떨며 양거창의 손을 잡았다.
양거창이 냉겸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의 황제께서 하시는 행동은 어떻게 설명됩니까?”
냉겸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황실은 조금씩 장악당했고 계속 침습 당했소. 지금에 이르러, 황상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배화교의 조종을 받고 있소.”
은교교가 외쳤다.
“회천연합은 누가 만든 거죠? 배화교와 싸워서 이길 자신은 있는 건가요?”
“없소, 아직은!”
냉겸이 한숨을 다시 쉬었다.
“그 자신감을 만들기 위해 내가 여기에 있소. 은령선자, 그리고 검과 방울의 이름 아래 모이신 분들! 당신들이 도와준다면 우리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겠소.”
병사 중의 한 명이 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중경부의 관평입니다. 배화교의 음모는 증빙이 됩니까? 설령 증빙이 된다 해도, 이미 내려진 황상의 명에 따르지 않는 건 반역이지 않습니까?”
냉겸의 눈이 빛났다.
“더 말하고 싶은 사람이, 관평 이외엔 없느냐?”
양선정의 어깨를 안고 있던 하승연이 한숨을 길게 쉬었다.
“저는 흑운문에 잡혀 죄 없이 고문을 받았어요. 은령선자께서 나타나시지 않았으면, 분명 사진봉의 손에 죽었겠죠?”
냉겸이 하승연을 보았다.
“모든 것이 황상의 명령이지만, 또한 배화교의 음모이기도 하오. 지금 그 말을 하고 있소.”
“하지만 죄 없이 고통을 당해보니 느낀 게 있어요.”
하승연이 흑강의 목 잘린 시체를 보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배화교의 사람들은 무척 분노했을 거예요. 충분히 복수를 결심할 정도로 말이죠.”
“이해하는 것과 용납한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
냉겸이 말했다.
“배화교는 일천 명의 성화산인을 키웠소. 그들은 자신들의 서원을 위해 언제든,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도록 교육받았고.”
은교교가 미간을 찡그렸다.
“우리는 이미 한 번 경험해 보았어요. 보광은 비밀을 지키겠노라 스스로 죽었어요.”
냉겸이 고개를 흔들었다.
“성화산인은 천하 어디에나 있소. 연기가 없는 불이기에 누구도 그들이 배화교를 섬기는 후손인 줄 알지 못하지.”
“그렇다면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도 있다는 겁니까?”
병사들 중 앞으로 나섰던 관평이 묻자, 냉겸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한 명이 있지.”
“한 명? 대체 누굽니까?”
되묻는 관평을 향해, 냉겸은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었다.
“타인은 모르지만 자신만은 안다네, 관평. 너는 네가 굉천환을 가슴에 심은 성화산인이 아니라고 주장할 생각이냐?”
관평의 눈이 커졌다.
그의 주변에 서 있던 다른 병사들이 놀라서 빠르게 사방으로 퍼졌다.
순식간에 관평의 주변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공터가 생겼다.
냉겸이 다시 물었다.
“아니라면 말해보라. 배화교주 석단궁은 사교를 섬겼으니 죽어 마땅했나? 혹은 아닌가?”
“교주께서는!”
관평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모든 것을 바치셨다. 중팔(重八)은 본교의 힘을 빌려 나라를 만들었으면서도, 은혜를 악으로 되갚았다.”
중팔은 태조의 아명이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씩씩거리며 분노에 차 소리치는 관평의 태도가, 굳이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모든 것을 설명했다.
은교교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관평! 황제의 명령에 따르자는 것이 알고 보니….”
“알고 보니 명존의 뜻을 받들자는 것이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소, 은령선자? 모든 걸 듣고도 우릴 비난하오? 우리들의 원한이 이유가 없다 싶소?”
“이유야 있겠지.”
은교교가 땅을 박찼다.
그녀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관평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니 너희 때문에 죽고 다친 사람을 위해, 내가 널 베는 것도 넌 이해하겠지? …헛!”
쏘아가던 은교교의 몸이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돌아왔다.
관평의 몸에서 뿜어지는 빛.
그와 같은 빛을, 은교교는 융흥사에서 이미 한 번 보았다.
굉천환이 폭발하기 전 뿜어 나오던 빛이었다.
“모두 피해요! 굉천환의 유효 거리는 반경 백 장이 넘습니다!”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양거창도 딸을 안고 뒤로 몸을 날렸다.
냉겸은 물러나지 않았다.
“회천연합은 배화교와 싸우기 위해 결성되었소.”
물러나지 않는 사람은 그 외에도 한 명이 더 있었다.
양거창의 처, 하승연은 오히려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관평을 향해 다가갔다.
“여보-!”
“엄마!”
놀란 양거창과 양선정이 그녀를 부를 때, 냉겸은 미소 지었다.
“당연히 성화산인이 있는 곳이라면, 우리 회천연합의 사람들 또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관평이 뿜는 빛이 강해졌다.
하승연은 더욱 빠르게 걸었다.
하얀 빛을 머금은 그녀의 오른손이 관평의 가슴을 쳤다.
쩌-엉!
관평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뒤로 밀려났다.
폭발이 일어났다.
콰앙-!
하지만 굉천환 본연의 폭발은 아니었다. 굉천환이 터졌다면 주변이 온통 불길에 싸였을 것이다.
폭발은 관평의 가슴 어름에서만 일어났다.
하승연이 관평 가슴 속의 굉천환만을 골라 부순 결과였다.
“크으! 네가 회천객이냐? 회천연합 놈들이 여기도 있는 거냐?”
관평은, 으드득 이를 갈면서 하승연을 노려보았다.
“별다른 내공은 느껴지지 않는데도 어떻게 굉천환을… 으아아!”
관평은 검을 뽑으면서 땅을 찼다. 곧장 하승연에게 달려들었다.
하승연은 눈빛에 흔들림이 없이 담담했다.
“회천객은 한 명의 명호가 아니다. 회천엽합에서 성화산인의 굉천환 제거만을 위해 키운 비밀 대원들. 그 모두의 이름이지.”
꽈아-앙!
하승연의 바로 앞에서 폭음이 일어났다.
관평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어느새 하승연의 앞에는 냉겸이 나타나 방호를 위한 검막을 치고 있었다.
“엄마!”
양선정이 달려와서 하승연의 품에 안겼다.
딸을 안은 채, 하승연은 남편인 양거창을 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제 임무에 대해 미리 말할 수 없었어요.”
“성화산인의 존재가 비밀이듯, 회천객 또한 비밀이었던 거요?”
하승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화산인의 흔적을 쫓고 발견하면 기회를 노려 굉천환을 제거하는 것. 그 일 외에는 저, 하승연 그대로예요. 당신의 아내.”
양거창은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승연은 자신의 아내로 딸의 엄마로 언제나 최선을 다했었다.
모르며 살던 자신보다, 알면서 숨기던 하승연의 고통이 훨씬 더 컸을 것이라고 양거창은 생각했다.
“집으로 갑시다.”
하승연이 냉겸을 보았다.
냉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너의 임무는 이미 끝났다. 편히 지내거나 새로운 임무를 택하거나는 너의 선택이니, 내 눈치를 볼 것은 없다.”
하승연이 환하게 웃으며 남편과 딸의 손을 잡았다.
세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은교교는 생각했다.
‘도명은 이런 상황을 이미 알았구나. 그래서 정아에게 말을 걸어 날 여기로 불렀구나.’
사도명이 양선정에게 검과 방울을 그리게 했기 때문에, 은교교는 냉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성화산인을 만나고, 회천연합에 대한 설명도 듣게 되었다.
은교교는 관평을 보았다.
가슴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흥건히 물들이고 있었다.
“너희는, 너희 죽음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또 다른 억울한 죽음들을 계속 만들었다.”
“도망치는 우리 명교도들을 무림인들은 추적해 와서 죽였어!”
관평이 고함을 질렀다.
“그래서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죽게 만드는 건가?”
“우리는 공정하다.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줄 뿐이다.”
“그럼 우리 역시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줘야 하는 걸까? 얼마나 이자를 붙여서 돌려줄까?”
은교교가 관평에게 다가갔다.
“누구에게 돌려줄까? 너 외의 성화산인들이 누구누구인지 이제부터 찬찬히 얘기해 보자.”
“하하하. 푸하하하.”
관평이 껄껄 웃었다.
“내 입은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관평이 검을 바꿔 들며 스스로의 목을 그었다.
그리고 쓰러졌다.
목숨이 끊긴 사람의 입은 당연히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은교교는 관평의 시체를 보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냉겸이 뒤쪽에서 물었다.
“자결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냥 두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