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충렬일세 양가장
은교교가 양선정을 안고 흑운문에 도착했을 때는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저녁이었다.
멀리 보이는 마을,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요리가 만들어지는 구수한 내음은 흑운문 안에서도 계속 풍겨왔다.
“우육탕의 냄새네요.”
양선정의 눈에 찰랑거리는 눈물이 차올랐다.
“아버지가 좋아했어요.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위해서 언제나 우육탕을 준비해 놓았었죠.”
“부모님이 갇히신 지 얼마나 지났지, 정아?”
은교교가 오른손을 흑운문의 정문을 향해 들면서 물었다.
“칠 주야예요.”
“이렇게 하자꾸나.”
은교교의 오른손에서 강력하기 그지없는 힘이 날아가 흑운문의 거대한 대문을 단숨에 부쉈다.
꽈아-아앙!
날아가는 대문을 보며, 은교교가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은 따뜻한 우육탕을 먹기로. 너와, 네 부모님이 모두 함께 말이다.”
**
흑운문의 고문은 불과 몇 달 만에 천하에 유명해진 상태였다.
그들은 고통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몸의 약점과 마음의 약점.
흑운문 고문술의 배후에는 사진봉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군부 출신으로, 젊은 시절 황실과 중원 흑도에 전해지는 고문술을 섭렵했었다.
이후 아수라혈교의 고문 비법까지 모두 익혔다.
“몸과 마음의 약함. 고문이란 그렇게 사람의 약한 곳을 파고드는, 일종의 기술이지.”
사진봉은 양거창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가 앉은 의자는 딱딱한 나무였고, 군데군데 피가 묻었다.
양거창은 허공에 떠 있었다.
손목을 묶은 쇠사슬에 의해 지탱된 채, 두 발이 허공으로 들린 그의 몸 곳곳은 피멍과 상처로 가득했다.
“세상은 나와 같은 기술자를 경외시하지만, 또한 늘 필요로 하지.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그래서 알아내고 싶은 것이 또한 너무 많거든.”
양거창의 입술은 여러 번 터져서 피딱지투성이었다.
쇠사슬에 묶인 손목 위의 손가락들은 뼈가 모두 부러졌고, 손톱은 빠져 있었다.
잡혀 온 첫날, 사진봉은 양거창의 손톱을 모두 뽑았었다.
“충렬일세 양가장.”
사진봉은 오른손 검지 끝으로 허공에 떠 있는 양거창의 몸을 뒤로 밀었다.
끼이이- 끼이이-
양거창의 몸이 허공에 뜬 채로 흔들거렸다.
“나라의 부름에 응해 오랑캐와 싸우느라, 가족 삼대가 모두 죽었기에 내려졌던 칭호. 너희 양가장의 충성심은 그렇게나 높다지?”
“우리는….”
양거창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개국을 도왔던 가문이다. 공을 세웠으나 상을 바라지 않았건만, 어찌 이렇게 다루는 건가?”
“양가장의 장주 양거창 님. 황명이 내렸잖소. 모든 무림인들은 칼을 버리고 스스로 내공을 폐하라. 그래야 살 것이다.”
“…황명대로 하였다. 나의 몸엔 이미 한 올의 내공조차 남아 있지 않음을 확인했잖느냐?”
“양 장주가 우리 흑운문에 온 지 칠 주야가 지났소.”
사진봉이 웃었다.
“첫날, 나는 장주의 손가락뼈를 부쉈고 손톱을 뽑았지. 둘째 날부터 몸 여기저기를 자르고, 뼈를 다시 부수고… 양 장주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더군.”
“나는 충렬제일 양가장의 장주다. 어찌 육체의 고문 따위에 굴복하여 비명을 지를까?”
“양가장! 창술로는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가문! 하지만 그 협명 또한 무림의 것이잖느냐?”
“!”
사진봉이 손짓을 보냈다.
옆에서 기다리던 병사 하나가 붉은 피가 가득 담긴 대접 하나를 들고 달려왔다.
꿀꺽! 꿀꺽!
방금 짜낸 닭피를 단숨에 비운 후, 사진봉이 웃었다.
“살아 있는 닭의 목을 자르고 더운 피를 받아내지. 그 피가 이토록 달고 고소한 이유가 뭔 줄 아시오, 양 장주?”
“…….”
“죽기 싫다는 원한! 복수하고 싶다는 증오! 미물인 닭이라 해도 그런 게 있지. 피에 깃든 상념.”
사진봉은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매로 대충 닦았다.
“양 장주도 그런 것으로 고통을 참는 거지. 무인의 인내와 복수는, 십 년도 길지 않다는 옛말처럼.”
사진봉은 옆에 놓인 고문 도구 중, 끝이 뭉툭한 끌을 집었다.
그 끌을 양거창의 허리에 박더니 옆으로 그었다.
고통을 참아내려는 양거창의 입술이 푸들푸들 거칠게 떨렸다.
“이렇다니까! 몸의 고통을 잘 참아내는 자에겐, 고문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고! 데려와라!”
사진봉이 밖을 향해 외쳤다.
철문이 열리고, 병사 한 명이 연두색 옷을 걸친 여인 한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여보!”
양거창의 눈빛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떨렸다.
병사가 데려온 여자는 양거창의 아내인 하승연이었다.
“아악. 여보!”
하승연이 양거창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울부짖었다.
사진봉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울부짖는 하승연을 매달았다.
“지금까지 장주의 부인을 고이 모셨소. 고문하고 더 나쁜 짓을 저지르고 싶은 유혹도 많았지만, 애써 참았지. 아무 짓 않았어.”
“풀어줘라! 사내로서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없느냐?”
양거창이 소리를 질렀다.
사진봉은 하승연을 매달더니, 그녀의 옷을 갈가리 찢었다.
“고문을 당하는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게 뭔 줄 알아?”
“아악!”
“고통? 틀렸어. 상실이야. 돌이킬 수 없다는 상실의 절망.”
사진봉은 벌거벗겨진 하승연의 목을 잡고 웃었다.
“손가락에 박히는 침보다 아픈 건, 그 손가락이 잘려나가 두 번 다시 쓸 수 없게 되는 상실.”
사진봉이 하승연의 고개를 돌려 양거창과 마주보게 했다.
“왜 장주의 부인을 이토록 고이 모셨는지 이젠 아시겠소? 맞아요. 장주의 눈앞에서 보여주려고. 장주의 부인이 절대로 돌이킬 수 없게 망가지는 걸, 똑똑하게 보여주려고 한 일입니다.”
“하,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하니 더더욱 하고 싶어지는군. 하하.”
“차, 차라리 날 죽여라.”
“내가 왜? 장주를 죽이는 일보다 장주 부인을 망치는 게 훨씬 더 재밌는데 도대체 왜?”
“제발! 뭐든 하겠다.”
양거창이 애원했다.
“원하는 건 뭐든 할 테니까 제발 내 아내만은….”
사진봉의 손이 하승연의 목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요. 이미 여러 번 말했잖소.”
“하, 하지만 그건….”
“황제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숨어서 지하 조직을 만들었소. 이름은 회천련합(回天聯合)! 하늘을 돌이키겠다는, 무엄한 의미를 지닌 자들의 모임.”
사진봉이 소리를 질렀다.
“이미 양가장과 회천련합의 연관을 확인하고 왔다. 그러니 당장 말해. 말한다면, 너와 네 여자를 고통 없이 죽게 해 주마, 양거창!”
콰아-아앙!
바깥에서 폭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었다.
놀란 사진봉이 고개를 돌렸다.
정문 쪽이었다.
누군가 흑운문의 정문을 박살 낸 것이 분명했다.
“뭐야? 폭약이라도 쓴 건가? 아니면 혹시… 무공?”
- 장력이다. 적암마계의 화빙강 중 강에 속하는 적강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사진봉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아름답기 그지없는 붉은 옷의 여인이 보였다.
사진봉은 그녀를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뒤, 어느새 바닥으로 내려지는 양거창과 하승연의 모습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양선정이 두 사람의 옆에서 울고 있었다.
“흐흐흑. 아빠. 흐흑. 엄마.”
폭음은 정문 쪽에서 들렸다.
그리고 정문에서 이곳 고문실까지는 백여 장이 넘는 거리라는 사실을, 사진봉은 안다.
“이토록 빨리? 너, 너는 설마 무공을? 너는 누구냐?”
“누군가는 날 적암의 마녀라고 부르지. 친한 사람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고.”
붉은 옷의 미녀가 사진봉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사진봉은 그녀를 몰랐다.
하지만 이름만은 귀에 닳도록 들어서 알고 있었다.
“으, 은교교?”
“황제가 무공을 금지시켜서 편리한 점은 있구나. 너 정도의 자가 감옥을 지킨다면, 세상에 구하지 못할 사람이 없겠지?”
은교교는 자신이 구한 양거창과 하승연의 상태를 살폈다.
하승연의 몸에는 특별히 나쁜 곳이 없었다.
양거창의 몸 상태는 심각했지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우수한 고문자는 피고문자를 살려 놓는다.
고통은, 오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전할 수 있으니까.
은교교는 양가청의 내공이 단전 깊은 곳에 특별한 형태로 숨겨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잠적하기 전, 개개조화의 마음을 담아 세상 곳곳에 우리와 만날 방법을 전달했어요.”
은교교가 말했다.
“조화금제를 이용해 내공을 단전에 숨기는 방법. 때가 와서 은빛 방울이 울리면, 우리가 찾아가겠노라고도 말했죠.”
사도명이 황천법문으로 떠나고, 조화결사대원이었던 사람들은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조화금제의 방법은 빠르게 강호의 모든 무림인에게 퍼졌다.
조화금제를 이용해 스스로의 내공을 금제시키면, 무림인들은 황제의 멸살령을 피할 수 있다.
조화무제는 떠났지만, 검령이 세상으로 돌아올 때를 대비하며 살아남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으, 은령신녀십니까?”
양거창이 눈을 크게 뜨고 은교교를 보았다.
은교교가 고개를 끄덕인 후, 빠르게 그의 혈도를 짚었다.
“이제부터 조화금제를 풉니다. 염려말아요. 언젠가 검령이 세상 전체에서 울리게 될 겁니다.”
화아아아-아!
양거창의 몸에서 무서운 빛이 솟기 시작했다.
하승연은 그 빛이야말로, 자신의 남편이 얼마 전 봉인했던 본래의 내공임을 알아보았다.
사진봉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마, 말도 안 돼. 무림연합군은 수, 숭산에서 죽었다. 좌도독 혁담 장군이 확인했다 말했다.”
사진봉은 몸을 돌려 달아났다.
“문주님께 알려야 한다. 적암의 마녀가 살아 있다면, 조화무제 또한 살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 어서 문주님께 알려서….”
사진봉의 손이 철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꽈-앙!
맹렬한 기세 한 줄기가 날아와 사진봉의 손등을 꿰뚫었다.
그리고 철문에 깊이 박혔다.
“끄아-악!”
사진봉은 비명을 터뜨렸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양거창이 오른손을 사진봉을 향해 뻗고 있었다.
철문에 박힌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양가청을 묶고 있었던 쇠사슬이었다.
쇠사슬은 마치 창처럼 사진봉의 손등을 뚫고 들어가, 철문에 그를 붙박아 놓은 것이다.
“야, 양가의 창법?”
양 씨 가문 창법의 무서움은, 개개용활에 있다.
주변의 무엇이건 창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쇠사슬을 창처럼, 으으!”
스스로 걸었던 조화금제가 풀린 양거창은, 또 다른 쇠사슬을 뱀처럼 조종해 사진봉의 목을 감았다.
“끄으으!”
목이 졸린 사진봉이 신음할 때, 하승연이 양선정의 눈을 가렸다.
“보지 마렴.”
양거창이 왼손을 내렸다.
사진봉의 목을 감았던 쇠사슬이, 이윽고 느슨해졌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놈은 오늘의 일을 위에 알리지 못할 겁니다.”
양가청이 은교교를 향해 포권하면서 말했다.
“양 씨 창법의 명예를 걸고 보장합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령신녀!”
“저의 탓으로, 숨어 사시던 양 장주님이 내공을 버리지 않았다는 걸 들키셨네요.”
은교교가 방긋 웃었다.
“지켜 보겠노라던 검령이 이제는 세상 밖으로 나옵니다. 동참해 주세요, 장주님.”
“물론입니다.”
은교교가 주변을 살폈다.
“대문을 부수고 들어왔어요. 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흑운문의 문주는 누구죠?”
“탁탑제 흑강입니다. 천축국의 탁탑마공을 사용하며 스스로를 황제 아래, 제후국을 다스리는 제왕으로 부릅니다.”
“황제는… 무림을 없앤다 하면서 자신의 수하는 모두 무림인으로 배치했군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을 다스리는 힘을 갖기 위해서는….”
콰아-앙!
사방의 벽이 터졌다.
무너진 벽 너머로, 어깨에 검은 구름 모양의 견장을 단 무수한 병사들이 나타났다.
양거창이 말을 이었다.
“황제는 단순히 무림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 힘을 자신들만 손에 넣고 영원히 가지려는 겁니다.”
“저기, 제일 나쁜 놈이에요.”
양선정이 손을 들어, 병사들 사이의 한 곳을 가리켰다.
거기에 거인이 한 명 보였다.
다른 병사보다 어른 머리통 두 개가 더 큰 그가 바로, 흑운문의 문주인 흑강이었다.
“나의 병사들아!”
흑강이 소리쳤다.
“아직도 계집 하나를 붙잡지 못했느냐? 싸움이 끝나면, 저 계집의 손에 죽지 않은 놈은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