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암흑도래(暗黑到來)
사도명의 몸에서 빛이 솟기 시작했다.
하지만 완전히 괴사한 피부의 상처는 회복될 기미가 없었고, 조각조각 끊어진 경혈과 혈맥 역시 이어질 징조조차 보이지 않았다.
[죽으면 반드시 황천(黃泉)을 건너야 한다지? 황천의 물을 마시면 이승의 기억을 잊고.]
사도명의 말에 은교교가 내공을 전달하는 와중에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황천에 가야겠소. 지금은 죽지 않고는 살아날 방법이 없으니까.]
혜광심어로 전해지는 사도명의 전음은 은교교가 반발할 틈을 주지 않고 이어졌다.
[신 무림맹 모든 사람에게 전하시오. 비수를 준비해야 한다고. 스스로 죽겠다는 각오 외에는,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 없다고.]
고오오오오오오-!
이십 갑자의 내공을 한꺼번에 주입받은 사도명의 몸에서 성스런 빛이 솟구쳤다.
투둑! 투두두둑!
그의 몸을 묶고 있던 붕대가 저절로 끊어졌다.
[일단은 죽으시오. 우리 모두, 죽은 후에 다시 봅시다.]
**
진시가 되었다.
계속 내릴 것 같던 눈이 신기하게도 시간에 맞춰 그쳤다.
좌도독 혁담과 우도독 냉섭은 각각 한 잔씩의 뜨거운 차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강설이 마침내 끝났구려.”
냉섭의 말에 혁담이 웃었다.
“무림이라는 대지 또한 곧 끝이 날 거외다.”
혁담은 좌도독이었다.
또한 또한 적마교주라는 숨겨진 신분도 갖고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지금의 황제를 따랐다.
무림을 없애야 한다는 황제의 뜻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때문에 눈이 그치고 있는 숭산을 바라보는 입가에, 혁담은 환한 미소를 띠울 수 있었다.
냉섭은 달랐다.
그는 도독의 신분이었지만, 무림과는 인연이 깊었다.
외아버지 곽인웅이 소림의 속가 장문인을 맡기도 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금군이 마찬가지였다.
무림은 무인을 기르는 토지였고, 그렇게 열매 맺은 무인 중 벼슬에 꿈을 둔 이들이 관에 진출하여 관군이 되었다.
“표정이 어둡구려.”
혁담이 냉섭의 표정을 살피더니 말했다.
냉섭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소? 비록 몸이 떠났다 하나, 무림은 우리들의 고향과도 같소.”
“고향?”
혁담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무엄하게도 황상을 해치려 한 자가 소속된 집단을 우리의 고향이라 부르는 게요?”
“믿기지 않는 일이 많소.”
냉섭은 표정은 계속 어두웠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수하들의 말에 따르면, 조화무제의 검은 분명 황상의 가슴을 뚫었다고 하였소. 하지만 황상은….”
“살아 계시지. 냉 장군은 황상께서 무사하심이 불만이오?”
냉섭이 펄떡 뛰었다.
“그럴 리야 없잖소.”
“하늘이 도우셨지. 우리는 신하된 도리를 다하면 그뿐이오.”
“은밀하게 실종된 부하들의 행방도 문제요. 황상께 주청을 올렸으나 도연과 상의하라셨고, 도연은 동창이 조사 중이니 더 이상 따지지 말라는 말뿐이었소.”
냉섭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왜 이토록 이상한 일과 답답한 일만 늘어나는지.”
“우리는 무인이오. 다만 명령받은 싸움을 수행하면 되오.”
혁담이 찻잔을 들었다.
“드시오. 이미 진시가 지났소. 약속대로 이 찻잔을 비우고 나면 숭산을 향해 진군하는 거요. 단전을 스스로 폐한 자들은 생포하되, 저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죽여야 할 것이오.”
냉섭도 찻잔을 따라 들었다.
혁담은 찻물을 단숨에 마셨다.
눈 맞은 차는 이미 식어있어, 천천히 마실 핑계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냉섭은 최대한 천천히 자신의 찻잔을 비웠다.
냉섭이 찻잔을 내리자마자, 혁담이 벌떡 일어섰다.
“전군 진군! 앞을 막거나 항복하지 않는 자는, 단 한 명도 살려놓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좌도독은 군의 절반을 통솔하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우도독 역시 나머지 절반의 군을 통솔한다.
금군 팔십만 명!
각처의 토호와 번왕들이 각각 제공한 사십만 명!
일백이십만 명의 군사가 진군을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사람의 발이 땅을 딛는 소리가 흡사 우레와 같았다.
눈은 완전히 그쳤다.
세상을 하얗게 덮었던 눈은 군사들의 발에 의해 회색으로 빠르게 물들어갔다.
**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금군과 번왕 군사들의 눈이 모두 찢어질 듯이 커졌다.
격렬한 저항이 있을 것이라 예상되었던 신 무림맹의 무사들.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군사들이 산을 올라갔을 때, 그들은 모두 제자리에 가부좌하고 앉아 있었다.
손에 비수를 들었다.
비수는 각자의 배를 가른 후였고, 피가 내장과 더불어 흘러 바닥을 온통 적시고 있었다.
피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혁담은 이미 연자강의 시신을 찾아냈다.
그 옆에 곽소혜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은교교를 찾아낸 혁담은 이를 갈았다.
“망할! 죽이기 전에 이미 죽었다고? 그럼 우리가 공을 세울 기회가 더 이상 없지 않은가?”
냉섭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시체 중에서 법허 대선사의 시신을 발견하고 또다시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나는 그대를 사숙이라 불렀겠지?”
냉섭은 부릅뜬 채로 죽은 법허 대선사의 눈을 감겨 주었다.
감촉이 이상했다.
매우 차갑고 거칠어서, 흡사 나무껍질을 만지는 듯 했다.
“이봐. 척후병의 전달로는 분명히 오늘 아침만 해도….”
아침에 신 무림맹의 무인들이 멀쩡하다는 전갈이 왔었다.
그 점을 묻고 짚으려는 찰나에, 하늘 높은 곳에서 껄껄 커다란 웃음이 들려왔다.
“하하하. 죽였으나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건가, 황제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한 사람이 떠 있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하얀 장삼을 표표히 날리며 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조화무제다.”
“저 얼굴을 기억한다. 궁에서 황상을 찔렀던 바로 그자다.”
혁담은 그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사도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자금성에서 사도명과 한 차례 싸웠었다.
사도명의 허벅지를 가르던 자신의 칼이 건네던 짜릿한 감각을, 혁담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혁담의 온몸을 타고 붉은 강기가 흘렀다.
저승으로 통하는 붉은 구멍에 흐르고 있다는 적혼혈기였다.
“조화무제-! 아직 죽지 않았던 거냐? 다시 베어주마. 차핫.”
적혼혈기를 머금어 붉어진 도가, 악독하도록 정확하게 사도명의 허리를 노렸다.
사도명은 단지 오른손을 약간 위로 흔들었을 뿐이었다.
까-앙!
폭음과 함께 도가 뒤로 튕겨나갔다.
강력한 진동을 견디지 못한 혁담은 칼을 놓쳤고, 아귀가 갈가리 찢겨나간 혁담의 오른손에서는 피가 튀었다.
“크으!”
“영세토록 세상에 알려라. 우리는 힘이 없어 스스로 죽는 것이 아니다.”
사도명이 오른손을 들었다.
휘황한 빛이 그 오른손에 어린다 싶더니, 사방으로 뻗었다.
수천 갈래로 나뉘어 뻗어 나간 빛은, 땅바닥에 닿는 즉시 굉음과 더불어 폭발했다.
퍼퍼퍼-퍼퍼퍼퍼펑!
의도적으로 피한 듯, 폭발은 군사들이 서 있는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결한 신 무림맹 무사들의 몸뚱이는 그 폭발에 더러 휩쓸렸다.
살점이 조각나 흩어졌다.
피에 뒤섞인 살점 묻은 뼛조각들이 금군 병사들의 좌우에서 흩어졌다.
“죽이고자 싸웠으면 장담하건데,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멀쩡히 돌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도명이 오른손을 내렸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을 내려다보면서 사도명이 다시 말했다.
“세상을 평안케 만들고자 검을 들었다. 세상이 우리의 죽음을 원하니, 잠자코 사라져 주마. 하지만 반드시 전해라.”
사도명의 눈빛은 눈발이 걷히고 겨우 나타나는 햇살보다는 훨씬 더 형형했다.
“지켜보겠노라고!”
병사들 중 몇몇이 이상한 냄새를 맡고서 소리쳤다.
“화, 화탄이다.”
“내가 포화병 소속이라서 잘 알아. 화탄의 냄새가 분명하다.”
냉섭은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전군 철수! 신 무림맹이 바닥에 화탄을 묻어, 스스로 죽고자 한다. 폭발에 휩쓸려 죽어서는 아니 된다. 후퇴해!”
혁담이 이를 갈았다.
사도명과 싸워 공을 세우고 싶었으나, 그에게는 힘이 모자랐다.
“사도명! 이것이 네가 선택한, 가장 현명한 방법이냐?”
사도명의 시선이 혁담의 눈과 허공에서 마주쳤다.
“너도 마음이 읽히지 않는구나. 보광처럼!”
“!”
“아직 죽지 않았느냐 물었지? 너도 그중의 하나냐? 보광과 같으냐?”
혁담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마음을 닫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워, 집중이 꼭 필요했다.
사도명이 빙그레 웃었다.
“돌아가서 황제에게 전해라. 그 뒤가 더 있다면, 그들에게도 전해라. 내가 지켜본다고.”
두두두두두두-!
회군하고 있는 병사들의 발걸음으로 사방이 흔들렸지만, 사도명의 목소리는 그 와중에도 또렷했다.
“지켜보다가 약속한 세상이 아니면 나타날 거다. 검과 방울! 검령의 소리가 울리면, 내가 나타난 줄 알라고 전해라.”
쾅! 콰콰콰쾅!
산의 곳곳이 작은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묻어둔 화탄이 하나둘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병사들이 산을 내려가도록 독려하던 냉겸이 혁담의 어깨를 잡고 끌었다.
“우리도 내려가세, 좌도독!”
“이상한 예감이 드는 때가 있지. 한 발이라도 물러나면 영원히 수렁으로 빠지는 것 같은 때!”
혁담이 칼을 왼손으로 잡으며 사도명을 향해 몸을 날렸다.
“너무 이상하잖아. 왜 네가 스스로 죽는 거지, 사도며-엉!?”
쩌어-엉!
사도명이 뿜은 일장이 혁담의 가슴에 명중했다.
그럼에도 힘껏 내친 혁담의 왼손은 사도명의 오른쪽 가슴에 깊이 칼을 꽂았다.
“좌 도독!”
뒤로 밀려나는 혁담의 몸을 냉겸이 양손으로 부축했다.
“흐흐흐. 흐흐하하하!”
혁담이 사도명의 가슴에 박힌 자신의 칼을 보고 껄껄 웃었다.
“저럴 줄 알았지. 멀쩡하지 못할 줄 알았어. 칠 호가 스스로 죽었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 있겠어?”
혁담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가슴이 움푹 패인 그의 상처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칠 호?’
냉겸은 이상한 말에 의문을 느끼면서도, 혁담을 안고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폭발은 더 빨라지고 있었다.
사도명의 몸은 무수한 폭발의 연기 사이로 빠르게 묻혀갔다.
숭산 일부가 굉음을 흘리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
조화무림사는 이때의 상황을 ‘암흑도래’라는 짧은 말로 요약했다.
<조화무제가 죽었다.
숭산에 세우려던 신 무림맹은 완공도 하지 못한 채 무너졌다.
무림연합군은 와해되었다.
자결.
스스로 죽음으로써, 무림연합군과 수뇌부는 영웅이 되었다.
일로종횡에서 연합군은 능히 황실의 금군에 맞서 싸우고도 남을 전력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함께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자결함으로써, 무림연합군은 팔십만 금군과 이십만의 토호군, 그리고 이십만의 번왕 병사를 살렸다.
병사들은 자신을 죽게 만들 뻔 한 이가 누군지를 알았고, 자신들을 살게 한 이가 누군지도 알았다.
“충분한 피를 보았다. 이제 더 이상은 피가 보기 싫구나.”
무림 정벌에서 돌아온 냉겸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벼슬을 버린 그는 누구도 찾지 못하는 초야에 묻혔다.
천하에서 무림인이 사라졌다.
힘을 가진 자들이 사라지자, 황실은 해외 정벌을 선언했다.
“백성이 평안케 살도록 하기 위해 천하의 안녕을 추구한다.”
병사들이 징발되었다.
일반의 백성들은 병사가 되어 새외의 군대와 싸워야 했다.
황제가 선언한 부강한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백성은 오히려 더욱 늘었다.
암흑도래.
세상이 또 다른 형태의 암흑으로 뒤덮인다고 판단되던 때, 하남성에 한 자루의 검이 나타났다.
은방울을 매단 그 검은, 휘두를 때마다 딸랑딸랑 울었다.
사람들은 검에 매달려 우는 방울을 검령(劍鈴)이라 불렀다.
바야흐로 세상은 조화의 시대에서 검령의 시대를 향해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