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모두 살기 위하여
왕삼이 달려들었다.
그에게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가 두 명 있었다.
선우척은 무덤 아래에서, 주덕문이 조종하는 강철용에 의해서 죽었다.
그리고 지금 또 하나의 친구인 보광이 스스로 죽고 있었다.
“보광! 이 멍청아아-!”
보광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친구를 보았다.
슬픈 와중에 더 없이 기뻤다.
평생 가슴 속에 꽁꽁 숨긴 채 살아왔던 한 가지의 임무.
태어났던 이유이며, 자라온 이유이자, 죽어야 하는 이유!
연기 없는 불에 대해서 깨닫고, 그 실체를 깨달은 이를 죽여서 비밀을 수호하는 것이 성화산인의 임무였다.
그래서 사도명을 죽여야 했다.
하지만 친구를 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보광은 가슴에서 폭발하는 굉천환을 최대한 닫았다.
자신의 앞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친구를 보호하려고 모든 힘을 다하고 있는 사도명을 보았다.
사도명은 자신을 구하러 달려온 은교교와 연자강을 밀어냈다.
보광과 자신의 주변에만 강기의 막을 씌우면서, 사도명은 폭발의 충격을 그 안에 가두려 했다.
“당신만 알아주시오.”
보광은 마지막 힘을 다해 달려오는 왕삼을 향해 장력을 쳐냈다.
밀려나면서, 왕삼이 다시 한번 더 소리쳤다.
“보광! 보과-아앙!”
보광은 사도명이 펼친 강기의 막 속에서, 오직 사도명에게만 말을 걸 수 있었다.
“내가 죽으면 저 친구만 날 기억해주겠지? 하지만 내 사연은 모를 거요. 그러니 당신이 봐 주시오. 오직 당신만,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주시오.”
꽈아-아아앙!
굉천환이 폭발했다.
강기막 속에서 일어난 폭발이었음에도, 은교교와 연자강은 사방으로 퍼지는 후폭풍에 밀려나려는 몸을 세우기 위해 애써야 했다.
“안 돼애-!”
산산조각 갈라진 몸뚱이가 핏덩이와 엉켜 날아왔다.
왕삼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
태어나면서 운명이 정해졌다.
부모가 살아온 운명은 그대로 자신의 운명이 되었다.
과거에 그들은 배신당했다.
나라를 세우는 일을 도왔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희생했건만, 정작 돌아온 것은 쓰고 차가운 배신의 검날이었다.
믿음과 신의로 뭉친 형제들
일천 명의 성화산인은 그러한 형제들의 죽음을 세상에 돌려주기 위해서 탄생했다.
“배신의 날 이후, 우리는 연기 없는 불이 되었다. 누구도 우리가 대운광명교도임을 몰라야 했다.”
대운광명교, 혹은 마니교!
명존(明尊)을 지키던 그들은 명나라의 건국을 도왔으나, 결국 마교로 매도당해 무수한 교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형제들의 죽음을 복수하고자, 스스로의 죽음을 각오했다.
호교의 맹세와 복수의 맹세를 동시에 선택한 일천 명의 성화산인!
굉천환은 불을 숭상하던 명교 비전의 물건이었다.
언제든 스스로 죽어 적을 죽일 수 있도록, 그들은 자신의 몸속에 굉천환을 심었다.
자신의 대에서 이루지 못한 꿈은 자식의 대로 넘겼다.
그렇게 태어난 운명도, 살아갈 운명도, 죽을 운명도 타인에 의해 정해진 아이들이 탄생했다.
죽기 위해 사는 사람.
불이건만 불로 보이지 않아야 하는, 연기가 없는 불.
보광은 죽기 위해서 사는 자신의 운명을 후대에 전하지 않으려고 평생을 혼자 살았다.
하지만 친구는 옆에 두었다.
스스로를 위하지 못하고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일까?
힘겹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좋아했다.
황실은 무너져야 마땅했다.
그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하지만, 변동의 와중 백성들이 고통받을 일은 안타까웠다.
나라를 멸망시켜야 하는 운명을 거부하지 못했기에, 대신 주변 사람들을 돕는 삶을 목표로 살았다.
자신들의 소망이 이뤄지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그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존재.
“나는 내가 죽을 일이 없기 바라면서 죽기를 바라고 살았소.”
보광은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말하지 못했었다.
연기가 없는 불은 아무에게도 연기를 보여주지 못하니까.
죽는 마지막 순간에만, 자신의 생각을 사도명에게 활짝 열었다.
“누군가는 알아주기를 바랐소, 나의 이 모순을, 슬픔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 무력함을.”
죽음을 앞두면 사람은 누구나 솔직해지는 법일까?
보광은 사도명을 죽이면서, 오로지 그에게만 솔직했다.
“미안하오.”
보광은 그렇게 죽었다.
“내 모든 호소를 전한 오직 한 사람을, 내가 죽일 수밖에 없어 진심으로 미안하오.”
콰아-아아아아앙!
보광의 몸이 터졌다.
핏덩이가 살점과 더불어 사방으로 퍼졌다.
사도명의 몸도 폭발의 충격과 열, 그리고 엄청난 폭풍 속에 완전히 휘말려서 흔들렸다.
피부가 타고 갈라졌으며, 드러난 살 속의 뼈가 다시 불탔다.
**
무림서는 그 날 이후에 벌어진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조화무제는 무림맹의 맹주로 지옥문과 싸우겠노라며 일로종횡의 길을 오래 걸었다.
하지만 그 끝은 좋지 못했다.
황제의 암살시도!
세상을 수호하겠노라 외쳤던 조화무제가 황제를 찔렀다.
황제는 승려 도연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남았다.
다음날. 하루 동안의 요양이 끝난 후, 황제는 즉시 무림과 무림인에 대한 근절을 명령했다.
팔십만 금군이 황명을 받고 천하 각처로 퍼졌다.
좌도독 혁담과 우도독 냉섭은 군사를 이끌고 무림 문파들을 무너뜨리면서 진군했다.
무림을 무너뜨리는 한편으로, 지방 토호와 번왕들의 군사를 금군의 일부로 합류시켰다.
금군의 숫자는 빠르게 늘었다.
그들은 조화무제가 걸었던 일로종횡의 길을 정확하게 거꾸로 되밟았다.
그리고 마지막 종착지로 정한 숭산으로 모였다.
숭산 근처에 새롭게 건립되는 신 무림맹이 있었다.
황제 암살 시도가 발발한 지 네 달 만에, 금군은 숭산의 주변을 완벽하게 포위했다.
그 숫자는 이미 일백이십만을 넘기고 있었다.
금군이 숭산을 포위하고 최후의 통첩을 했던 날에, 두터운 구름이 하늘을 덮어 세상은 어두웠다.
금군은 마지막 시한을 사흘이라고 못 박았다.
그들은 숭산의 주변에 병영을 꾸리고 항복을 기다렸다.
마침내 최후의 시한이 도래한 날, 천하를 덮는 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도 땅도, 온통 티 없는 백색으로 덮여갔다.
천하 무림은 죽느냐, 죽임당하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
화운악은 굳은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소림사 근처에 임시로 건립한 새로운 무림성의 복도였다.
그런데 계획했던 모습이 채 완공되기도 전에 황실 금군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맹주!”
사도명의 뒤를 이어 칠 대의 맹주위에 오른 화운악!
복도를 지키던 무사들이 그에게 연이어 인사했다.
복도의 끝에는 하나의 방이 있고, 연자강이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침상의 옆을 지키는 은교교가 보였다.
침상 위에는 사도명이 있었다.
온몸이 붕대로 휘감겨 얼굴조차 거의 드러내지 못한 상태로 누워있었다.
“어떻습니까?”
“아직 움직이지 못해요.”
화운악이 묻자 은교교가 한숨과 더불어 고개를 저었다.
“굉천환은 주변 백 장을 초토화시킬 수 있죠. 그걸 혼자 모두 감당했어요. 살갗이 모두 타고 경맥 모두가 산산조각,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에요.”
사도명은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사도명이 죽음을 각오하지 않았다면 은교교, 연자강, 곽소혜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조화무제의 몸 안에는 고금구천강의 내공 여러 종류가 숨 쉬고 있어요. 그 내공들이 살리려 하는 힘이 없었다면, 이미 죽는 것이 당연할 정도의 중상이에요.”
화운악이 품에서 서찰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금군 좌우도독이 황제의 이름으로 최후통첩을 보내왔습니다.”
화운악은 누워있는 사도명의 옆에 서찰을 놓았다.
“오늘 신시까지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스스로의 내공을 폐하지 않으면, 무차별 도륙을 시작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은교교가 한숨을 쉬었다.
“내공을 스스로 폐쇄? 살아 있으나 살아 있지 못하도록 만들겠다는 거군요.”
“과거 극락문 시절. 그때로 돌아가는 겁니다.”
화운악의 안색도 무거웠다.
“한 번은 낯설지만, 두 번이 되면 이미 익숙해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극락문 시절에 통제를 경험했다.
네 달 사이에 무림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는 황제의 조치로 세상이 안전해질 거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다.
은교교가 침상에 누워 있는 사도명을 보았다.
“황제가 살아 있대요. 분명히 심장을 뚫었다고 말했잖아요?”
[맞소. 나는 분명히 그의 심장을 뚫었지.]
목소리가 은교교와 화운악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사도명이었다.
[그의 심장은 부서졌소. 심장이 부서지고도 살아 있는 방법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하오.]
사도명의 몸은 굉천환의 폭발로 인해 완전히 망가졌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는 몸속에서 사도명의 정신은 여전히 활동하며, 혜광심어의 수법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럼 지금 황궁에서 무림인 멸절의 명령을 내리는 황제는 대체 누구일까요?”
[황제에게는 여러 명의 영무자가 있었소. 지금의 황제는 그중 태명이라고 스스로 불렀던, 지옥문의 문주! 그가 틀림없겠군.]
화운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광효! 법명은 도연! 바로 도연이 지금 황제를 대신해 전권을 행사하는 모양입니다.”
[무림맹의 모든 연합군이 금군과 싸운다면, 승부는 어찌 되리라 보시오?]
“지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길 수도 없습니다. 금군 중에는 연결된 자들이 많습니다. 구파일방의 속자제자도 있고요.”
화운악이 잠시 쉬었다가 무거운 어조로 덧붙였다.
“그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모두 죽을 수도 없구요.”
사도명의 전음이 끊겼다.
눈이 그치지 않고 내렸다.
새하얗게 물든 세상을 다시 피로 붉게 물들여야 하는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은교교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공을 갖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건 자유를 갖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화운악이 한숨을 쉬었다.
“죽이느냐, 죽임을 당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싸움을 결정하면, 어떤 경우라도 세상의 절반이 죽습니다.”
사도명이 물었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오? 아니면 살아 있소?]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화운악이 고개를 저었다.
“세상이 아는 건 융흥사의 대폭발뿐입니다. 그 폭발로 누군가의 시체가 산산조각이 나서 사방에 흩뿌려졌다는 것만 압니다.”
[…….]
사도명이 잠시 생각한 후에 다시 전음을 보냈다.
[나는, 살아야겠소.]
“물론입니다.”
화운악이 은교교를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제갈평 가주께서 천하 의술의 조종이신 의제 원일결님을 백방으로 찾고 있음을, 은령신녀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은교교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살아나야 해요, 도명. 나보다는 더 오래 살아야 해요.”
[사람들을 모아주시오. 내공이 삼 갑자가 넘는 사람으로 스무 명이 필요하오, 지금 당장.]
잠시 후, 여전히 부맹주의 직위를 맡고있는 법허를 비롯한, 무림맹의 고수 스무 명이 사도명이 누운 침상 주변에 모였다.
사도명의 전음이 모두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내공이 필요하오. 각자가 일갑자 씩. 도합 스무 갑자의 내공.]
법허가 불호를 읊었다.
“아미타불. 스무 명의 이십 갑자를 무제의 한 몸에 넣으면, 저마다 성질이 다르고 통제하는 방법이 달라 서로 부딪치거나 적대시할 수도 있을 거외다. 득이 되지 않고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일의생멸과 창천사해로 서로 다른 것을 융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서문용맹이 제일 처음 나서서 자신의 내공을 전달했다.
“꼭 살아나세요, 천부!”
[나는 상처가 너무 위중하여 살 방법이라곤 없다. 다만, 이 길만이 모두가 사는 길이다.]
사람들은 사도명의 말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무림을 위해 희생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모두 앞 다투어 내공을 전했다.
스무 갑자라는 내공이 한 사람의 몸에 모이는, 고금 미증유의 일이 숭산 신 무림성 깊은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