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령천하, 나의 검 너의 노래-103화 (103/168)

모든 것이 뿌옇게 흐렸다.

회색의 안개가 자욱한 공간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군데군데 피가 튀었다.

무엇인가 통쾌한 것 같기도 했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황제가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중간의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꿈인지 생신지 모르는 상태에서 벗어나자, 그 모습이 보였다.”

주변이 조금씩 밝기 시작했다.

사도명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중년의 여인이었고, 약간 뚱뚱했으며, 복부가 갈라져 피와 내장을 함께 흘리고 있었다.

황제를 보며 죽어가는 중년 여인이 손짓을 했다.

“…태, 태명아. 나… 아파. 아정은… 많이 아파.”

“아정은 내 유모였다.”

사도명의 옆에 황제의 생각이 있었다. 그 생각은 현재 황제의 모습으로 말을 건네왔다.

“사고로 다쳐서, 머리가 조금 이상했었다. 황손인 나를 태명이라는 자신만의 이름으로 계속 불렀다. 무엄하게도.”

“…….”

“그래도 나는 유모가 좋았다. 아껴줬거든 나를. 맛있는 게 있으면 내게 먼저 주었다. 다친 것도, 나를 구하다가 벌어진 사고였지.”

아정은 힘겹게 손을 들어 허공만 휘젓다가 눈을 감았다.

어린 황제는 그녀 옆에 있었다.

하지만 아정의 손을 잡아주지는 않았다.

부들부들 떨면서 피가 묻은 자신의 손만 계속 보았다.

“그 전날, 황궁 비고에서 재밌는 책 하나를 발견했었다.”

황제의 생각이 다시 말했다.

“무공에 대한 것이었다. 파천봉황심법에다가 금강호갑, 제왕검형의 천자결까지! 규화보전만 빼고 무공의 기초를 다져가던 짐은, 새로운 무공 비급을 발견하고 기뻤다. 몰래 익혀보기로 했지. 그리고….”

아정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신 커다란 대저택 후원에 마련된 무덤이 하나 나타났다.

어린 황제는 멀리에서 무덤을 지켜보면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는 울지 않았다.

사도명의 황제의 생각을 향해 물었다.

“왜 울지 않았지?”

“우는 건 황제가 할 일이 아니니까. 짐의 부모가 늘 말했었다. 황제는 황제다워야 한다고.”

“하지만 적어도 나으리가 죽인 유모에게, 사과는 했어야지.”

황제의 생각이 커졌다 작아졌고, 명멸(明滅)을 반복했다.

“짐이 해친 것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을 뒤흔드는 기묘한 마공. 무림인들이 만든 무공이란 것이 아정을 죽인 것이다.”

“그래서 무림을 없애고 싶은 거요? 아정의 복수를 하려고?”

“해야지, 복수를! 무림인들을 없애야지.”

사도명이 황제의 생각을 똑바로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스스로도 죽고 싶은 거요? 아정의 복수를 위해서-?”

사도명이 눈을 떴다.

황제도 눈을 뜨고 사도명을 바라보았다.

“이제 내 생각을 모두 보았느냐? 내가 왜 무림을 없애려고 하는지, 납득했느냐?”

“모두, 하나하나 보았소.”

사도명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황제의 배에서 검을 뺐다.

“그런데 납득? 그건 아니지!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덮어씌우는 변명을 보고, 누가 납득씩이나 하냔 말이다, 이 미친 늙은이야!”

그들은 융흥사에 있었다.

은교교의 물음에 연자강이 고개를 흔들었다.

연자강이 고개를 흔들었다.

“도명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혼자면 달아날 수 있다고.”

“그랬었죠.”

“도명더러 황궁으로 오라고 한 구패객은 건녕제였습니다. 혼자 오라고 했으니, 뭔가 안배를 남겨 놓은 게 아니었을까요?”

“무제가 그 안배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더러 나가라고 한 거다, 라는 건가요?”

“그렇지 않다면 굳이….”

콰-앙!

바깥에서 폭음이 들렸다.

연자강이 가장 먼저 나갔다.

은교교와 곽소혜가 그의 뒤를 따랐다.

마당에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면서, 중년 미부 한 명이 서 있었다.

“시, 심마문주 구옥화?”

“천비령(天秘令)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러들 주시게. 황제께서 친히 내리신 이름이고, 나는 그 이름이 무척 자랑스러워.”

구옥화는 두 팔로 사내 한 명을 안고 있었다.

그는 혼절하여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도명!”

은교교가 고함을 지르자, 구옥화는 상처투성이인 사도명을 그녀에게 건넸다.

“나는 전 황제의 명을 받아 심마문을 내부에서부터 분열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네. 너무 크게 성공을 하여 심지어, 심마문주의 자리까지 올랐지.”

은교교가 사도명을 받아 진기를 이용해 그 몸을 허공에 띄운 후, 상태를 점검했다.

뒤늦게 왕삼과 도언직이 조화결사대를 이끌고 달려왔다.

그들은 구옥화와 피투성이 사도명을 번갈아 보더니 소리쳤다.

“저 여자가 무제를 해친 겁니까? 명령해 주십시오, 대장. 당장 저 계집을 없애겠습니다.”

연자강이 고개를 저었다.

“입을 조심하라. 은인이다. 무제를 구해주신 분이다.”

“네?”

왕삼과 도언직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서로를 마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그 사이에 은교교가 사도명의 상태에 대한 진찰을 끝냈다.

“다행히, 심맥은 무사합니다. 강한 힘으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곽소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처가 너무 많지만, 크게 지친 것만 빼면 치명적인 상처는 없어요.”

은교교가 사도명을 일으켜 앉힌 후에 명문혈에 진기를 주입했다.

“너무 지쳐 있으니, 임시방편으로라도 깨우겠습니다.”

내공 주입을 끝낸 후에야, 은교교는 사도명을 데려온 구옥화에게 인사를 할 여력을 얻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천비령.”

“나야 뭐, 명령대로 한 거니까. 조화무제가 말했다네.”

구옥화가 사도명이 했던 말을 모두에게 그대로 해 주었다.

“연기가 없는 불.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황상은 내게 명령하시었지. 누군가 그 말을 하면, 반드시 그 사람을 구하라고. 설령 나의 신분이 노출되더라도.”

“황제라 하심은…?”

구옥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황제는 한 분뿐이시라네. 힘과 간교함으로 황위를 찬탈한 자를 어찌 황제라 칭한단 말인가?”

연자강은 구패객을 생각했다.

전대의 황제인 건녕제!

사도명은 눈을 뜨고 나서도, 다시 몇 번의 기침을 더했다.

“깨어났군요.”

은교교가 사도명을 안았다.

구옥화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조화무제가 깨어났군. 그에게 직접 묻는 편이 좋을 것 같네.”

연자강은 사도명을 보았다.

하지만, 연기 없는 불에 대해서는 묻지 못했다.

사도명이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도명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만 줄곧 머물러 있었다.

은교교에게 안겨 있으면서도, 그는 줄곧 다른 한 명의 사람만을 보았다.

사도명의 눈길이 못으로 박은 듯 고정된 사람은 보광이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보광에 계면쩍어하며 웃었다.

“뜨거운 물이 더 필요하십니까? 가져다드릴까요?”

사도명은 오른손으로 자신을 안고 있던 은교교를 밀어냈다.

그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계속 흘렀다.

“저런! 식은땀까지. 제가 닦아 드리겠습니다.”

보광이 물을 적신 깨끗한 천을 오른손에 들고 사도명의 이마를 닦아주려고 했다.

사도명은 그런 보광의 오른쪽 손목을 붙잡았다.

“너는 누구냐?”

느닷없는 사도명의 질문에, 멀리 서 있던 왕삼이 웃었다.

“하하하. 아직 정신이 덜 드신 모양입니다, 무제? 누구긴 누굽니까? 제 친구이자 이곳 융흥사의 주지인 보광이잖습니까?”

사도명은 왕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구옥화를 보며 말했다.

“건녕제께서 남겨 놓으신 안배를, 저는 선배가 아닌 혁담 장군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여서 실망했나?”

구옥화가 쓰게 웃자, 사도명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심마문이 마음을 다루는 능력은 무림에 가장 큰 위협이었습니다. 선배께서 천비령이라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왜 그 승려의 손목을 쥐고 있는가? 그 승려는 자네가 혼절해 있을 때 계속 상처를 닦아주고자 했던 사람일세.”

그는 지혜가 모자라거나 힘이 약해서 숙부에게 황위를 빼앗긴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해치기 싫어서!

건녕제는 상대를 다치게 만드는 것이 싫어서, 오히려 자신이 다치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도명 역시, 친구들이 다치는 걸 막기 위해서 오직 자신만이 다치는 결과를 선택했었다.

“비, 비켜 주십시오. 물이 너무 뜨겁습니다.”

주지인 보광이 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서 허겁지겁 달려왔다.

“크게 다치셨군요. 우선 뜨거운 물로 상처를 닦아내시죠.”

보광은 두 개의 깨끗한 천을 꺼내 그중의 하나를 은교교의 눈앞에 내밀었다.

은교교가 뜨거운 물로 사도명의 상처를 닦기 시작했다.

보광도 남은 한 장으로 사도명의 몸을 깨끗이 닦아주었다.

연자강이 구옥화에게 물었다.

“도대체 연기가 없는 불이란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천비령?”

구옥화가 아무도 듣지 못할 낮은 소리로, 홀로 탄성을 밭았다.

그녀에게 천비령이란 이름을 내려주었던 건녕제는 죽었다.

황제가 죽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능함을, 천비령은 마음속으로 혼자 한탄했다.

그리고 건녕제를 죽게 만든 태명은 사도명의 손에 죽었다.

“모든 불은 연기를 뿜어내는 것이 당연하네. 하지만….”

“콜록! 콜록, 콜록!”

사도명이 연달아 기침을 했다.

“저에게는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은교교가 놀라서 소리쳤다.

“제 마음 읽고 있는 건 아니죠? 싫어요. 읽지 마세요.”

사도명은 쓰게 웃었다.

“승려 보광. 왕삼의 옛 친구이자, 융흥사의 주지. 이상하게도 이 사람의 마음이 읽히지 않아.”

사도명이 보광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뿌옇게 흐린 너의 마음은 군데군데만 보일 뿐이다.”

“무, 무제! 손을 놓아 주십시오. 아픕니다.”

“어린 시절부터의 임무. 연기 없는 불. 정체를 드러내면 안 된다. 이런 정도가 내가 읽어낸 귀하의 생각 전부다.”

“갑자기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무제?”

“내가 읽은 귀하의 생각 중에, 잘못 판단한 것이 있는가?”

이야기를 듣던 왕삼이 영문을 알지 못하여 소리쳤다.

“무제! 제 친구입니다. 제 친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나, 핍박하시 마소서.”

사도명이 한숨을 쉬었다.

“너의 친구가 저렇게 너를 위하고 있다! 저 우정 앞에서, 계속 거짓말을 할 생각인가?”

보광이 결국 고개를 저었다.

“쳇. 하는 수 없군.”

난데 없는 보광의 말에, 왕삼의 안색이 변했다.

“보광. 무슨 소릴 하는 겐가?”

“나는 네가 원망스럽다, 왕삼. 평생 보광으로 살아왔는데, 왜 나의 앞에 무제를 데리고 온 거냐? 나는 보광으로 살고 싶었다.”

사도명은 여전히 보광의 마음을 편하게 읽어낼 수가 없었다.

뭔가 특별한 훈련을 받았던 것이 분명했다.

사도명은 뿌옇게 흐린 보광의 생각을 조각조각 보았다.

“임무의 완성. 홀가분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슬퍼하지?”

사도명이 미간을 찡그렸다.

“친구의 죽음? 왕삼이 죽게 되어 슬프다고? 무슨 소리야? 마음속에 나를 죽여야 한다는 의지만 가득하면서, 왜 왕삼이 죽는다고 슬퍼하는 거지?”

사도명의 눈이 커졌다.

그의 몸에서 엄청난 압력이 일어나, 보광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자신의 앞에 꽁꽁 묶었다.

“대답해. 아니, 생각해.”

사도명이 소리쳤다.

“네 마음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겠다. 그래, 지금처럼 생각을 피하려고 노력해라. 그 노력이 오히려 생각을 이어가게 만드니까. 자아, 계속해서… 아!”

사도명은 마침내 보광의 머릿속 생각을 읽어냈다.

그리고 경악하여 외쳤다.

“모두 뒤로 물러나. 한 걸음이라도 더! 최대한 물러나!”

보광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왕삼! 오래 사귄 친구여. 미안하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사도명은 보광을 밀쳐내려 하지 않았다.

보광의 마음속에서 몇 가지의 단어를 더 읽어냈기 때문이다.

“굉천환! 손톱만한 크기로 사방 백 장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배화교의 물건! 태어나자마자 굉천환을 몸에 주입받는 성화산인(聖火散人)의 임무는….”

“나의 임무는 죽음으로 진실을 묻는 것. 그것이 천하 일천 명 성화산인의 유일한 임무.”

보광의 가슴에서 희미한 빛이 일어났다.

사도명은 자신에게 남은 모든 내공으로 호신의 막을 만들었다.

번쩌-어어억!

보광의 가슴이 마침내 터졌다.

사도명은 폭발의 힘이 주변으로 퍼져가지 못하고, 자신에게만 집중되도록 만들었다.

“안 돼!”

세 사람이 뒤로 피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달려왔다.

은교교와 연자강.

세 번째 사람은 왕삼이었다.

“보광! 이 멍청아아-!”

은교교가 주입한 내공이 효험을 발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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