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화. 제왕검결 제이결, 군림
사도명은 깨달음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기연은 아무 때나 오지 않는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깨달음의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도명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상처와 죽음!
희생은 언제나 숭고하다.
사도명은 인질의 죽음에서 설청산에게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위대한 정신을 느꼈다.
“우언봉! 자네의 말이 옳네.”
“이분은 스스로를 던져 우리를 구하려 하셨어. 우리가 또한 죽어서 이분을 구하지 못하면, 살아도 세상을 볼 낯이 없지.”
사도명은 완전히 사라지려는 기력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멀리, 황제의 얼굴이 뿌옇게 흐려진 형상으로 보였다.
잔뜩 찡그린 얼굴.
황제는 웃지 않고 있었다.
‘제발 물러들 나요.’
사도명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했으나, 목소리가 밖으로 나와 주지 않았다.
인질들은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계속 스스로 죽으면서 사도명을 지킬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살릴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서 있는 황제!
애초 하고자 했던 바대로, 황제를 죽여야 계속 죽어야 하는 사람이 사라질 것이다.
‘돌아와라, 힘아. 다시 모여라! 이 사람들이 죽지 않도록! 건녕제의 소망을 들어줄 수 있도록!’
콰-앙!
황제가 오른쪽 발로 땅을 힘껏 굴렸다.
진각의 기세가 폭음과 더불어 사방을 웅웅 울렸다.
“날 죽이겠노라는 저 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아직도 조화무제를 죽이지 못하고, 대체 뭘하는 거냐, 도연?”
**
사람의 몸은 의외로 거칠다.
수십 명을 연달아 벤 도광효는 지쳐서 뒤로 물러났다.
머리를 쓰는 일과, 무공이나 대법의 쓰임새를 연구하는 일이 도광효의 적성에 맞았다.
도광효는 날이 빠지기 시작하는 자신의 검을 살폈다.
“치잇! 이렇게까지!”
당황하여 내공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한 탓이었다.
도광효는 자신이 결국 사도명을 베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가 뒤로 물러난 순간에도,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더 달려와서 사도명을 보호했다.
사람의 벽.
금군들이 뒤에서 창으로 찔러대도 소용이 없었다.
창에 찔리고 칼에 베임 당해서 죽어가면서도, 사람들은 모두 사도명을 보호하려 했다.
힘으로는 인질들이 만드는 사람의 벽을 뚫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방법은 있다.’
도광효는 몸과 힘이 아니라 머리를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뒤로 검을 돌렸다.
사도명을 베려고 하지 않고, 대신 뒤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목에 자신의 검을 겨눴다.
방유였다.
“놈들에게 물러나라고 해라.”
방유가 자신의 목을 겨눈 도광효의 검을 물끄러미 보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도광효를 보는 방유의 눈빛이 슬퍼 보였다.
“너는 학자였는데 어찌 이리도 변했느냐? 변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느냐?”
“닥쳐!”
“학문을 두고 너와 토론도 많이 했었다. 나는 그 때마다 네 학문의 깊이에 때로 놀랐고, 제자들에게 네 칭찬을 여러 번 했었다.”
“닥치라 했다.”
도광효가 사도명의 앞을 막은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들! 물러나라! 물러나지 않으면 방유는 죽는다.”
인질들의 시선이 방유와 사도명을 번갈아 향했다.
위협은 효과가 있었다.
죄수들 중의 몇 명은, 사도명을 두고 주춤주춤 뒤로 몸을 뺐다.
방유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때로는 죽음이 당당하며, 생존은 오히려 욕되다. 도광효! 너의 삶은 지금 행복한가?”
도광효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방유가 갑자기 도광효의 손을 잡더니 앞으로 달려들었다.
도광효의 검이 방유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무, 무슨 짓이냐?”
놀란 도광효가 소리쳤다.
인질은 오직 살아 있을 때만 가치가 있을 뿐이다.
죽은 인질은 인질이 아니다.
방유가 피가 뿜으며 웃었다.
그는 똑바로 도광효를 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다시 묻지, 도광효. 너의 삶은 지금… 행복한가?”
도광효는 대답하지 못했다.
방유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지금 매우… 행복하구나.”
방유는 결국 죽었다.
그는 인질들에게,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모두에게 많은 말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방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행동은 언제나 말보다 더 깊은 울림을 세상에 남긴다.
대학자 방유.
역모를 정당화시켜달라는 황제의 말에, <대적찬위>라고 답함으로써 죄인이 되었던 사람.
그는 죽었다.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인질이 되길 거부했다.
생명의 위협조차 방유의 위대한 마음은 깨지 못했다.
황제는 눈을 부릅뜨고 죽은 방유를 보았다.
그는 방유를 죽이고 싶어 했다.
그토록 죽이고 싶어 했으나 아직 죽이지 못했는데, 방유가 스스로 죽어버린 것이다.
어디선가 낮고, 차분하며, 온화한 목소리가 흘렀다.
- 자신을 던져 타인을 구하면, 타인은 다시 스스로를 던져서, 또 다른 이를 구한다.
황제가 사도명을 보았다.
사도명의 입은 움직이지 않는데, 그의 목소리는 분명히 황제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 황위를 찬탈한 대적 나으리! 방유 대학사가 나으리의 스승이라 했소? 스승의 죽음에서 느끼는 점이 혹시 없으시오?
콰아아아-!
사도명의 몸에서 백색의 서광이 일어났다.
백색 서광은 강력하면서도 부드러워, 그의 주변을 보호하던 인질들을 천천히 밀어냈다.
황제가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사도명의 몸에서 일어나는 힘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네놈은 황실의 핏줄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힘이 네놈의 몸에서 일어나느냐?”
황제가 양손을 모았다.
거대한 봉황의 날개가 그의 뒤에서 일어났다.
봉황천익!
파천봉황신공 중 파괴력이 가장 강한 봉황천익은, 시전자의 성취에 따라 날개의 숫자가 늘어난다.
두 개에서 네 개로, 네 개에서 여덟 개로 계속 늘어나는 것이다.
황제의 등 뒤에 어리는 날개의 숫자는 일백이십네 개였다.
쿠오오오오오오!
꾸워어어엉-!
봉황의 울음이 터지면서 황제의 두 손이 사도명을 때렸다.
쩌어-어어엉!
사도명이 서 있던 바닥이 균열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하지만 정작 사도명의 몸을 감싼, 백색의 서광은 자그마한 변화조차 없었다.
“저 힘이 대체 무엇이기에 놀라십니까, 황상?”
“제왕검형의 제이결, 군림.”
도광효에게 대답하는 황제의 안색에서는 핏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놈의 몸을 감싼 기운은 군림옥이다. 금강불괴보다 단단하며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다. 그런 효과가 열두 시진 동안 이어진다.”
“열두 시진 동안의 절대방어입니까? 군림옥이 금강호갑보다 더욱 단단하단 말씀입니까?”
“금강호갑은 싸울 때에 쓰는 것. 군림결은 단단히 지키는 것.”
황제가 신음했다.
“이런 일은 벌어질 수 없다. 일어나서는 아니 되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말았다.”
도광효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상황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럼 열두 시진 후에, 사도명은 본래의 힘을 온전히 회복한 상태로 깨어나는 겁니까? 건녕제는 대체 왜 외부로 전할 수 없는 군림결을 사도명에게 전했을까요?”
““건녕이 전한 것이 아니다.”
“네?”
“제왕검결은 전국 옥새에 남아 있는 무공이다.”
도광효의 눈이 커졌다.
“화씨지벽으로 만든 옥새는 사라졌다고 알려졌는데, 설마 다시 찾으셨단 말입니까?”
“군림결은 한 고조가 항우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창안한 무공이다.”
황제가 고개를 흔들었다.
“전국 옥새는 당금 황실에도 없다. 건국 태조께서 대업을 세우실 때도 찾지 못하셨다.”
군림옥에 휩싸인 사도명을 보며 황제가 길게 한숨 쉬었다.
“옥새에 새겨진 제왕검결 중 황실에 남아 있는 것은 천자결뿐이다. 대체 사도명이 어떻게 제왕결을 갖고 있을까?”
황제가 도광효에게 물었다.
“십팔로의 팔십만 금군의 지금 어디에 있느냐?”
“날이 밝으면 숭산으로 가 무림맹을 포위할 것입니다.”
“출동을 중지시켜라.”
“네? 아, 네. 존명.”
“모든 군세와 힘을, 이곳으로 되돌린다.”
황제가 도광효와 동창 위사, 금의위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깨어나면, 사도명은 이 나라의 모든 무력이 자신을 포위하고 있음을 보게 만들라. 그가 아는 비밀을 샅샅이 털어놓게 만들어라. 그런 후에, 놈을 죽여라.”
**
사도명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벽이고, 하늘조차 완전히 막힌 벽이었다.
“이곳이 어딘지 안다.”
사도명은 혼자 중얼거렸다.
꿈이나 환상은 아니었다.
사도명은 자신이 황실에서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보호되며 서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나를 보호하는 기운은 대체 무엇일까? 모든 기력이 다했을 때, 그 기운이 홀연이 일어났다.“
사도명은 지금 보이는 주변 역시 환상이 아님도 느꼈다.
“여기는 무림맹 지하의 그곳이다. 내가 삼 년 동안 누워서 전대 맹주님들의 힘을 물려받았던 곳.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수많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하필이면 이 순간으로 돌아온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도명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어지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음을, 사도명은 믿었다.
그때 무엇인가가 옆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놀란 사도명은 돌아보았고, 이내 지하의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
노인은 바닥에 무엇인가를 내려놓은 채, 오랫동안 그것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도명이 다가가서 물었다.
“무엇입니까?”
“무엇인지 알지 않는가?”
사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말처럼 사도명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커다란 옥으로 된 도장.
용과 봉황이 날아오를 듯 조각된 도장은 화씨의 벽으로 만들어졌다는 전국 옥새였다.
“제가 모르겠는 건, 도대체 이런 것을 제가 어떻게 알고 있냐는 것입니다. 절 지키는 군림옥이라는 기묘한 힘도, 제가 어찌 알죠?”
노인이 웃으며 손을 들어 주변을 가리켰다.
“삼 년 동안 자네의 머릿속에 주입된 기억들! 지식들!”
사도명은 비로소 떠올렸다.
“이기전념을 통해서, 어르신의 기억 역시 제 머릿속에 전달된 것입니까? 뉘십니까? 아!”
사도명은 노인이 누군지를 갑자기 깨달았다.
무림맹의 제일대 맹주인, 천무제 좌능후.
그는 천중무국신공을 창안했다.
세상에 조화심을 퍼뜨릴 수 있었던 건, 모두 그의 공이었다.
“제 머릿속에 군림결이 존재하는 이유는 천무제님이시군요.”
“그래. 내가 남겼지. 내 힘을 자네의 단전에 넣고, 모든 텅 비는 순간에 깨어나도록 만들었어.”
“제가 가장 위험할 순간을 대비해서, 말입니까?”
천무제는 빙그레 웃으며 들고 있는 전국 옥새를 다시 한번 더 가리켰다.
“자세히 보게.”
“전국의 옥새는 옛날에 이미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까?”
“우리 원나라는 많은 죄를 지었지. 다르다는 이유로 핍박을 했고, 해치기도 하였네.”
사도명은 비로소 천무제의 본래 신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원(元) 황실? 맞습니까?”
“주홍무가 대업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나는 무림맹주가 아니라 황제가 되어 있었겠지?”
좌능후가 다시 웃었다.
“이편이 훨씬 낫다. 황제였다면 힘으로 세상을 괴롭혔을 터인데, 천무제라 불리자 세상을 도울 수 있게 됐으니까.”
“개개조화. 조화의 마음이 퍼져나가며 천하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모두 천무제님의 천중무극신공 덕분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문과 선조들은 세상에 큰죄를 지었네.”
천무제의 안색은 어두웠다.
“그 빚을 갚고자, 나의 시신에 상념을 남겼지. 자네를 구할 수 있도록, 나름 안배를 하였네.”
사도명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무림맹은 맹주와 태자 사이가 사제의 연으로 이어진다.
따져보면 사도명은 천무제의 사대 제자이기도 한 셈이었다.
“감사합니다. 군림옥 속에서 저는 회복하고 있습니다. 깨어날 때, 저는 본래의 저일 것입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네.”
천무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전국 옥새 위쪽의, 날아오를 듯한 용과 봉황이 뒤엉켜 있는 조각을 가리켰다.
“군림옥은 한 번 사용한 후에는 점차 약해지고 사라질 거야.”
“그러합니까?”
천무제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실망 말게. 제왕검형의 마지막 구결이 여기 있으니! 지극한 뜻은 글과 말로 할 수 없지. 보게. 찾아내게. 자네라면 제왕검형의 마지막 구결인 제왕결을 여기에서 찾아낼 수 있을 거야.”